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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5)화 (5/144)

“음, 저어, 필요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연기력은 꽤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지금 평가당할 만한 요소가 아닌 것 같고, 일단 제가 이곳에 무단으로 침입을 한 거라면 그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초행이라 잘 몰랐거든요. 바로 나가겠습니다.”

“정말 몰랐나?”

“여기가 누구에게나 개방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걸 몰랐냐는 질문이라면, 정말 몰랐…….”

“이 정원이 누구의 거라고 생각하지?”

“네?”

메일이 멈칫했다. 추궁하던 상대가 갑자기 문제를 던졌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은 순순히 답을 꺼냈다.

“황제 폐하…… 시겠죠.”

그녀의 답은 별달리 유추의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황궁 안에 존재하는 것은 굴러다니는 돌이라도 기본적으로 황제의 소유라는 대전제에 따라 토해낸 답변일 뿐이다.

이곳을 황제에게 따로 하사받은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메일이 당연히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궁 안에 있으니 황제의 것이겠지.

그래서?

메일은 의아해졌다. 그게 딱히 그렇게나 중요한 사실인가 싶었다. 자기가 발을 들인 곳이 침실이나 보물 창고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정원이었다. 그것도 바람이 통하는 야외에 조성되어 있다.

입구에 경비를 세워둔 것도 아니었으니 고작 허락 없이 입실했다는 이유로 경을 치기에는 터무니없는 감이 있는 것이다. 막말로 아무나 밟고 다니는 궁의 복도도 소유권을 따지자면 황제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른 목적이 없었다고?”

“……네? 아니, 왜 자꾸 대화가 그렇게 흘러가죠? 폐하의 정원이면 출입 목적에 구경 말고 다른 불순한 뭔가가 자동으로 생성되는 건가요? 저 정말 상상이 안 돼서 그렇거든요. 처소나 집무실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설마 폐하께서 굳이 정원을 자주 찾으실 리도 없을…….”

답답함에 열변을 토하던 메일이 문득 말끝을 흐렸다. 어? 왠지 흥분해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댄 말에 정답이 있는 것 같았다. 혹시.

“그러니까 설마 폐하께서 이 정원을 자주 방문하실 리가…….”

“…….”

“있나?”

“잘 아는군.”

뭐라고!

메일이 깜짝 놀라 토끼 눈을 떴다. 여길 자주 찾는다고? 황제가? 몸소? 메일의 기분이 묘하게 복잡해졌다.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녀는 오늘 이곳에서 우연찮게 황제를 만났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황제라는 게 원래 그렇게 만나기 쉬운 사람이었나?

“못 믿겠는데요.”

그럴 리가. 메일은 도리어 상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형세가 이상하게 반전되었다. 그녀의 반응이 예상외였는지 남자는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뭐?”

“아니, 제가 비록 제국행은 처음이지만 기본적으로 알 건 알거든요. 이 커다란 국토를 다스리려면 정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것이 뻔한데 이리 구석탱이에 조성된 정원을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자주 찾으신다? 마음만 먹으면 집무실 옆방에라도 실내 정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

뭐 하러?

“이유가 없잖아요. 설마하니 이곳이 폐하께서 손수 애정을 들여 가꾸신 곳이라서? 하하, 그거야말로 판타지.”

메일은 소리 내 웃었다. 자기가 입에 올린 가정이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발에 채일 정도로 고용할 수 있는 솜씨 좋은 정원사를 놔두고 직접 정원을 돌본다?

그것도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잠이 들기 직전까지 바쁜 사람이?

그런 건 정원 덕후라고 불릴 정도로 정원에 어마어마한 애정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얘기였다.

헬베른 제국의 황제가 정원 덕후라고? 허헛, 메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꿈의 군주가 어딨어.

“아무리 초행이라도 그런 거엔 안 속아요.”

그렇게 말한 메일이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신성한 정원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사람이 구라쟁이라는 것은 슬펐지만, 속아 넘어가지 않았으니 괜찮았다. 이런 것도 원래 속는 사람이나 속는 법이다.

가령 누군가였다면 듣자마자 홀랑 넘어갔겠지. 리엘라라든가, 리엘라이거나, 리엘라 같은.

“이번에는 아쉽게 되었지만 다음 사람은 꼭 속일 수 있길 바랄게요. 파이팅!”

“……진심이군.”

“뭐가요?”

“정말로 믿지 않는군.”

“그야 당연하죠. 애초에 길 잃고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정원이 알고 보니 폐하께서 자주 찾는 장소였다는 것부터가 좀…….”

메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요새는 로맨스 소설에서도 그만한 우연성은 작위적이라고 욕먹는다. 뒷동네에 마실 나갔다가 소꿉친구 만나듯 마주치기엔 황제라는 신분은 너무 높았다.

뭐, 양보해서 일없고 한가한 황제의 멀고 먼 방계 쪽 친척 정도라고 했으면 믿었을지도 모르지. 아마 얘 신분이 그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가면의 남자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신기해. 이렇게 반응하는 건 처음 보는데.”

“저도 이런 낚시를 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정말로 순수하게 구경이 목적이었다니.”

“처음부터 그렇다고 했잖아요. 아, 그리고 덧붙이자면 낚시의 떡밥 자체가 좀 한정적이에요. 폐하께서 여길 자주 오신다거나 하는 건, 폐하께 개인적인 용무가 있거나 용안을 반드시 뵙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나 유혹적인 주제 아닐까요? 세상에는 황제 폐하를 뵙는 것보다 새싹에 물 주는 것을 더 소중한 기회로 여기는 사람도 있답니다.”

설마 이런 걸로 황족 모독죄가 어쩌고 하지는 않겠지? 메일은 정원 덕후로서의 진심을 일말 내비치는 것으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정원을 조금밖에 둘러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돌아오기 시작한 이성으로 판단하건대 이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가지고 나온 사명을 반이라도 이행하려면 지금 당장 연회 홀로 뛰어가야 한다.

메일은 들어온 길을 고스란히 되짚어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참, 혹시 중앙 연회 홀이 어디쯤 있는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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