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큭…….”
커다란 손이 침대 시트를 짚었다. 푹신한 시트를 움켜쥔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리카르도는 피를 토하며 거대한 몸을 웅크렸다.
“허억, 하아…….”
한 번에 대량의 물약을 만드느라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썼다.
그리고 지금 그의 몸은 고갈된 마력을 빨리 채워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이 떨어진 만큼, 체력도 저하되었다.
리카르도에게는 마력을 복구할 힘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우고가 준 진통제를 씹으며 마력을 끌어 쓴 부작용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만 했다.
“컥!”
다시금 리카르도의 넓은 어깨가 들썩이고, 새하얀 이불에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리카르도는 가쁘게 숨을 쉬며 입가의 피를 닦았다.
처음 피를 토하였을 땐 오장육부가 도려내지는 것 같은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여러 번 반복되니, 나름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후으…….”
물론, 익숙해진다는 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리카르도는 길게 숨을 쉬며 호흡을 골랐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두어 시간 뒤에는 미라벨과 샤를이 세골린데로 떠난다. 그때까지만,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어야 했다.
미라벨에게 이렇게나 엉망인 마지막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는 정신을 잃지 않고 버텨야만 했다.
‘미라벨…….’
리카르도는 가물가물해지는 시야 속에서 아른거리는 형체를 멍하니 보았다. 꽃병이 있는 자리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꽃병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이제 영영 그의 곁에 있지 않을 한 사람을 그렸다.
그와는 모든 인연을 끊고서 떠날 사람. 그리고 그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사람.
그의 아내, 그의 사랑을.
“쿨럭!”
미라벨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짓던 리카르도의 몸이 경련하였다. 또다시 피를 토했지만, 그는 입가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닦아 봤자 또 토할 테니까.
게다가 어차피 미라벨이 떠나고 나면 끊어질 목숨이다.
마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미라벨이 없는 세상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에, 리카르도는 그녀를 배웅한 뒤에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날 생각이었다.
‘많이 보고 싶겠지.’
리카르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죽은 다음에도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녀를 그리워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쓰리라. 그녀의 행복을 빌고, 그녀를 지켜보는 데에 모든 시간을 허비하리라.
“……르도. 리카르도!”
눈을 감고 있던 리카르도는 아득히 들려오는 음성에 미간을 좁혔다.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절대로 그를 다신 부르지 않을 사람이, 그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꿈인가.
그렇다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리카르도가 눈을 질끈 감으려는 때, 입가에 따스한 온기가 와 닿았다.
“리카르도, 정신을 차려 봐요!”
꿈이 아니야.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손길에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밝은 빛이 쏟아져 눈을 찡그리는데, 미라벨의 울음소리가 귀에 박혀 들어왔다.
“흐윽, 왜, 혼자……. 흑,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미라…… 벨?”
리카르도는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열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피투성이가 된 침대 위에 올라온 미라벨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이러다 정말 죽어 버리면 어쩌려고!”
리카르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미라벨에게 안겼다. 아직도 꿈과 현실이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현실적인 꿈이 있던가.
아니면 드디어 완전히 미쳐 버린 건가.
리카르도가 인상을 쓰며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미라벨이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와 우고에게 다 들었어요. 당신이 샤를의 물약을 만들었다면서요. 마력을 다 갈아 넣어서 만들고, 그 부작용을 떠안고 있다면서요.”
미라벨은 손수건으로 리카르도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녀는 눈물로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랬어요. 왜…….”
“아냐. 그런 게 아니야.”
“거짓말 마요.”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단호한 대꾸에 당황하였다. 그는 그녀에게서 엉거주춤 벗어나며 고개를 틀었다.
“발레리오가 과장을 했나 보군. 이건, 내가 피를 토한 건 내상 때문이야. 샤를의 물약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날 똑바로 보고 말해요.”
“그냥 떠나 줘.”
리카르도는 참담한 심정으로 말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미라벨에게 들킬 예정도, 그녀에게 모든 내막을 알려 줄 작정도 아니었다.
‘젠장, 발레리오.’
리카르도는 애꿎은 발레리오를 탓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고개를 돌린 채로 버티자, 미라벨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녀는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리카르도를 지켜보았다.
그는 빨리 그녀를 내쫓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지만 미라벨은 리카르도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이끌어 갈 것이다. 리카르도가 원하는 대로 그를 떠나고, 그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 오라버니가 세골린데의 마탑주예요. 오라버니에게 부탁하면 마력은 금방 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고집 좀 부리지 마요.”
미라벨은 갑갑해하며 리카르도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몸을 틀어,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난 당신이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 * *
이 고집쟁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오라버니, 아실은 마력을 빠르게 재생시켜 줄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 함께 세골린데로 가요. 가는 길에 아달베르토령에 들러서 새 주인으로서 얼굴도 비치고.”
미라벨의 얘기에 리카르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신경전 아닌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싶을 때, 갑자기 리카르도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럭! 큭, 쿨럭!”
“리카르도!”
미라벨은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는 리카르도의 모습에 대경실색했다. 그녀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그가 주저하다가 받았다. 그러고서는 미라벨을 부드럽게 밀어 내었다.
“못 본 셈 쳐 줘. 그리고 떠나. 원래 그럴 생각이었잖아.”
“봤는데 어떻게 못 본 척해요?”
기침을 가라앉힌 리카르도가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가는 듯싶더니, 이내 손을 거두고서 말했다.
“생각해 봐. 네가 나를 영영 떠나는 것과 내가 너 없는 곳에서 죽는 게 뭐가 다르지?”
“무슨 소리예요?”
“어느 쪽이든 우리가 앞으로 영원히 못 만나는 건 똑같다는 소리야.”
리카르도는 미라벨에게 뻗으려던 손으로 주먹을 쥐고서 씁쓸히 말했다.
그의 대답에 미라벨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 거였구나.
당신은 내가 없는 곳에서 죽으려는 거였구나.
왜 삶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고통 속에 자신을 방치하는가 했는데.
왜 무모하게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짓을 하나 싶었는데.
그래서였어.
“……어느 쪽이 되었든.”
미라벨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뜨거운 숨을 삼키고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당신을 영영 떠나는 것도, 당신이 나 없는 곳에서 죽는 것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요.”
“날 떠나지 않겠다고?”
리카르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미라벨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호수에 빠진 달처럼 일렁였다.
미라벨은 기쁨과 혼란에 휩싸인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툴러서, 몰라서, 두려워서 벌인 잘못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일일 것이다.
심지어 그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면, 더욱.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미라벨을 계속 사랑하였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걸 정도로.
게다가 그는 그녀 없는 세상마저 떠나려 하였다.
맹목적이고 요령 없는 리카르도의 사랑에 미라벨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악연으로 정의하기엔 가슴 아픈 인연이었다.
그렇기에 미라벨은 덮어 두었던 감정을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리카르도를 받아들이고, 그를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을 내보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요. 당신이 이 기회를 잡는다면 떠나지 않을게요.”
“정말이야?”
리카르도의 억센 손이 미라벨을 붙잡았다. 더없이 간절한 손길이었다.
“잡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어떻게 하면 되지?”
미라벨은 그가 자신의 손을 잡은 채로 기도하듯이 양손을 모은 것을 보며 말했다.
“날 사랑한다고 해요.”
“그건…….”
미라벨의 명령에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를 올곧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욕심을 내요. 당신답게 이기적으로 구세요. 뻔뻔하게, 리카르도 비토레답게요.”
“미라벨, 난…….”
“어서요. 날 원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사랑한다고 해요.”
미라벨의 요구를 들은 리카르도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곤 애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랑해.”
“가지 말라고 하세요.”
“가지 마.”
“곁에 있어 달라고…….”
“떠나지 마. 곁에 있어 줘. 내 삶의 이유가 되어 줘.”
리카르도는 허겁지겁 말했다. 그는 미라벨의 손에 입을 맞추며 절절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맞아. 난 이기적이고 못난 인간이야. 그렇지만 기회를 준다면, 평생 사랑하며 네게 지은 죄를 갚을게.”
리카르도는 죄책감에 짓눌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 내지 못한 사랑을 미라벨에게 토해 내었다.
“나의 후회는 필요 없다 할지라도, 나의 사랑은 받아 주었으면 해. 사랑해, 미라벨.”
리카르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를 아끼고 사랑할 기회를 부디 내게 줘.”
“좋아요.”
미라벨은 순순히 대답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어요.”
미라벨은 미소를 짓고서 리카르도와 입술을 겹쳤다. 그가 놀라며 숨을 들이켰지만, 이내 그녀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 빈틈 하나 없을 만큼 거센 포옹이었다.
미라벨을 껴안은 리카르도가 그녀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미라벨, 사랑, 해. 사랑해…….”
리카르도는 눈물을 흘리며 미라벨에게 고백하였다. 키스 사이사이에 애절한 사랑이 흘러내렸다. 갈 곳 잃은 사랑이 아닌, 미라벨에게 오롯이 전해지는 사랑이었다.
미라벨은 가만히 손을 들어 리카르도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품, 흔들림 없는 사랑이 그녀를 감쌌다.
미라벨은 자신의 얼굴 이곳저곳에 짧은 입맞춤을 하는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의 후회와 사랑을 받아 줄게요.”
당신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당신을 용서할게요.”
이것이, 미라벨이 그에게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두 사람이 새롭게 시작할 출발점에서.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