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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18화 (119/120)

118화

“폐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미라벨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발레리오를 맞이했다.

한창 짐을 싸고 있던 중이라서, 방이 엉망이었다. 황제를 맞이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내칠 수는 없었다.

“우고가 왕녀님에게 물약을 준다기에요.”

“여기 있습니다, 왕녀님. 이걸 다 드시면 왕자님은 완전히 건강해지실 겁니다.”

발레리오가 말을 마치자마자 우고가 물약이 든 주머니를 건넸다. 루체가 옆에서 받아 가방에 넣으러 가자, 발레리오가 미라벨에게 상체를 기울여 속삭였다.

“떠나시기 전에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미라벨은 당황하며 그를 보았다. 황제가 따로 찾아오다니. 남은 얘기라는 게 뭘까.

그녀가 발레리오에게 물어보려는 찰나, 곁에 서 있던 우고가 먼저 입을 떼었다.

“저어, 왕녀님. 우선 물약에 대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뭔가요?”

평소 미라벨을 사무적으로만 대하던 우고가, 오늘따라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미라벨도 이 물약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싶었다. 약효만 두고 보자면 거의 기적의 물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라벨은 짐을 꾸리기 전에 우고에게 물약의 레시피를 물었다. 만에 하나, 샤를이 다시 아프게 되었을 때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고는 제조법에 대해서 함구하였다. 세골린데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가 있다고만 하며, 샤를이 완치될 수 있는 만큼의 양을 한 번에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미라벨은 우고가 물약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려는 걸 존중하였다.

아마도 물약은, 그가 의원으로서 오랜 시간 연구해 온 결실일 테니까.

그런데 우고와 발레리오의 표정을 보아 하니 단순히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미라벨은 소피에게 눈짓을 하여 자리를 피해 주길 부탁했다. 소피가 루체를 비롯한 다른 하녀들을 데리고 방을 나서자, 발레리오가 심각한 얼굴로 우고를 보았다.

우고는 바로 입을 열지 못하고서 망설이고만 있었다.

“왜 그래요? 물약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내 걱정이 된 미라벨이 묻자, 우고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일전에 왕자님의 물약을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보셨지요.”

“네, 그랬죠.”

“그게 실은…….”

우고는 미라벨을 심란한 눈으로 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고선 말을 이었다.

“왕자님의 물약은 황족 남성의 마력을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물약은 대공 전하의 마력 그 자체지요.”

“네? 무슨.”

미라벨은 우고의 답에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이해가 잘 가질 않았다. 그녀는 이마를 짚고서는 우고에게 물었다.

“잠깐만요. 리카르도의 마력은 바닥난 상태잖아요. 아직 내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걸로 아는데.”

“맞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물약을 만들었단 거예요?”

“어떻게 했겠습니까. 리카르도는 마력이 아니라 목숨을 갈아 넣었습니다. 요사이 리카르도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걸, 왕녀님도 아시겠지요. 그게 다 물약 때문입니다.”

“리카르도가 그래서…… 아픈 거라고요?”

발레리오에게 묻던 미라벨의 무릎이 휘청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미라벨은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눈에 띄게 파리해진 리카르도의 얼굴과, 거칠게 기침을 하던 그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내상 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문득 미라벨의 시야에 샤를의 약병이 들어왔다. 투명한 약병에 들어 있는 액체가 부드러운 보랏빛을 띠며 빛나고 있었다.

‘보라색.’

미라벨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보라색은 리카르도의 마력이 띠는 빛깔이다.

듣고 보니 모든 게 다 맞아떨어져 갔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게.

“왜 그렇게까지 한 거죠? 굳이 그렇게 안 해도, 샤를은 곧 나을 거였잖아요. 발열은 크면서 없어진다고 했잖아요.”

“그랬을 겁니다. 왕자님께서 제국 황족과 세골린데인의 혼혈만 아니셨다면요.”

우고는 착잡한 눈으로 미라벨을 보며 설명을 이어 갔다.

“얼마 전에 왕자님께서 각혈을 하셨다는 건 아시지요. 그 증세는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아버지와 떨어져 지냈을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입니다.”

우고의 설명에 미라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언제였던가. 리카르도가 샤를을 돌보았던 날, 아이가 피를 토했다는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보랏빛 물약만 먹으면 다 나을 거라고 했다. 그 약만 꾸준히 먹이면 샤를은 멀쩡해질 거라고…….

“그래서 샤를에게 아버지의 마력을 넣은 물약을 먹였다는 건가요?”

미라벨의 질문에 우고와 발레리오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우고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조심스레 대답했다.

“꼭 아버지의 마력이 아니어도 됩니다. 황족의 마력이면 되지요. 대공 전하께서 나서셨을 뿐입니다.”

“그 물약을 안 먹으면 샤를은 어떻게 되나요?”

“황족의 아이가 성인 남성과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면 체내의 마력이 폭주하게 됩니다. 불안정한 마력을 눌러 주는 힘이 없으면, 그게, 송구하지만 샤를 왕자님은…….”

“알겠어요.”

미라벨은 우고가 말꼬리를 흐리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침착히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가슴이 울렁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 때문이네요.”

미라벨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맑은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던 목소리가 산산이 깨어졌다.

“나 때문에…….”

치맛자락을 짚고 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미라벨이 자책하며 시선을 떨구자, 발레리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 안 하셨으면 합니다. 리카르도는 왕녀님께서 편히 지내시길 원하니까요.”

“다 아시는군요.”

미라벨은 발레리오의 위로에 서글피 웃었다. 그녀는 그와 우고를 번갈아 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다들 알고 있었어.”

미라벨이 리카르도의 아내였다는 것.

리카르도의 ‘아르밀라’였다는 것.

그래서, 샤를이 그들의 자식이라는 걸,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발레리오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리카르도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어요.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미라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설마, 리카르도가 목숨을 갈아 넣어서 물약을 만들었다는 게…….”

우고는 미라벨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은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나?’

리카르도는 두란테의 처벌이 끝난 후, 미라벨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라벨은 그의 태도를 단순히 그녀에게 거리를 두려는 노력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리카르도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긁어모아 샤를을 위한 물약을 만들고, 그 고통에 스러져 가는 자신을 숨기려 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서툴러.”

미라벨의 목에서 리카르도를 탓하는 음성이 비어져 나왔다.

리카르도가 안타까웠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서투른 건지. 왜 그리 요령이 없어서,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몰래 앓는 것인지.

“난 그 사람이…….”

미라벨은 발레리오를 올려다보며 헐떡였다. 그녀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에 눈물방울이 맺힐 때쯤, 붉게 물든 입술이 열렸다.

“난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했어요. 다 잊고. 나도 샤를도 다 잊고, 예전처럼 살았으면 했어요.”

“리카르도도 당신의 행복을 원합니다. 그걸 위해 제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간절히.”

발레리오는 안쓰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에게 이걸 밝혔다는 걸 알면 절 죽이려 들 겁니다. 하지만 당신 없이는 어차피 행복할 수 없다면서, 당신의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바보를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미라벨은 눈물을 흘리며 볼 안쪽의 살을 잘근 씹었다.

리카르도에게 더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불쑥불쑥, 그에 대한 연민이나 걱정이 고개를 치켜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미라벨은 애써 그 감정을 무시했다.

리카르도와 더 얽히기 싫었으니까.

이미 잘라 낸 인연이니, 더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게.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미라벨은 몰랐다.

리카르도가 홀로 괴로워하고, 홀로 죽어 간다는데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도 그녀 때문에 죽는다는데.

그런데도 그와의 인연을 끊어 내겠다고, 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서투른 건 나야.’

미라벨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리카르도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싫다. 그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게 싫다.

그녀는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 사랑을 몰랐으니 이제라도 사랑하며 살았으면 했다. 미라벨과 그의 인생이 서로 다른 길을 가더라도.

하지만 그의 인생은 미라벨 없이는 의미가 없다.

깨달음이 늦어 후회를 하였으나 미라벨에게는 그의 후회가 필요 없었다. 그렇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헛헛해졌다.

홀로 있을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가여운 그를, 외로운 그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요령 없이 서툰 사랑만 하는 바보 같은 사람을.

‘나는 당신을 버릴 수 없구나.’

미라벨은 결국 제 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를 위해 기꺼이 모든 걸 버리는 리카르도를, 미라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도는 지금, 어디에 있죠?”

미라벨은 눈물을 닦으며 발레리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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