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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17화 (118/120)

117화

비앙카는 왕녀의 선고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국보라니요?”

“백합 구근이 들어 있는 상자를 창고에서 훔쳤지? 발뺌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목격자가 있으니까.”

미라벨이 말을 마치자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던 에치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리카르도가 고갯짓을 하자 비앙카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제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 여자는 창고를 지키고 있던 제게 다가와 미켈레 자작 부인의 시녀라며, 부인의 물건을 가지러 창고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선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죠.”

에치오의 증언에 비앙카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래서요? 없는 죄까지 덮어씌우지 마세요. 제가 가져간 건 국보가 아니잖아요? 평범한 백합의 구근이라고 해서 두란테가 절 두들겨 팼다고요!”

비앙카는 억울해하며 외쳤다. 하지만 미라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비앙카는 그녀가 동요하지 않자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애초에, 제가 도둑질을 한 것도 다 두란테가 시켜서였어요! 그러니까 저는 죄가 없어요!”

“백합 구근이 들어 있던 상자까지?”

“……예?”

미라벨의 질문에 비앙카가 멍하니 되물었다. 미라벨은 한숨을 가볍게 쉬고서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훔친 국보가 구근이라고 한 적이 없다. 다시 묻겠다. 구근이 들어 있던, 사파이어가 박힌 상자. 그것도 두란테가 훔치라고 했나?”

“그, 그건…….”

“아니요! 저는 그런 짓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왕녀님!”

두란테는 비앙카가 우물쭈물하자 신이 나서 외쳤다. 지옥에 자기 혼자만 끌려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잔뜩 기가 살아 있었다.

“그 상자는 저년이 꿀꺽했습니다! 보나 마나 어디 전당포에 팔았을 겁니다!”

“조용히.”

미라벨은 손을 들어 두란테를 저지했다. 그녀는 두란테가 입을 다물자 비앙카를 향해 말했다.

“네가 훔친 사파이어 상자는 세골린데의 소중한 재산이다. 왕실의 보물을 훔쳤으니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겠지. 폐하, 저 하녀의 처벌을 제가 정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왕녀님.”

비앙카는 미라벨이 발레리오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며 침을 삼켰다.

실은, 구근을 막 훔쳤을 때 상자가 제법 비싸 보여 따로 챙겨 두었다.

하지만 상자는 제국 기사단이 두란테의 저택을 뒤질 때 빼앗기고 말았다. 비앙카는 그걸 말하려다 입술을 잘근 물었다.

상자가 왕녀 손에 돌아갔다 해도 그걸 훔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얹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가만히 입 닫고 있는 편이 낫다.

‘그 상자가 국보였을 줄이야.’

비앙카의 속이 탔다. 보기 좋게 함정에 걸려 버렸다. 국보를 훔쳤으니 사형이 선고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심지어 아르밀라의 손에 죽는 건 더더욱 싫었다.

이윽고 미라벨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왕녀가 도도한 시선으로 비앙카를 내리깔아 보며 입을 열었다.

“세골린데의 국보 절도죄는 사형에 처하는 큰 죄이다. 따라서 네게 사형을 선고한다.”

“내가 순순히 죽어 줄 줄 알고?”

사형을 선고받은 비앙카가 쇳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무릎을 세우며 미라벨을 노려보았다.

“대단한 왕녀님이신 척하지만, 넌 아르밀라잖아! 난 다 알아, 아르밀라! 너는 대공의 침대나 데우던…… 윽!”

“거 되게 시끄럽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비앙카의 목 뒤를 손날로 친 에치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는 기절한 비앙카를 보고서는 혀를 쯧 찼다.

“벌써 미쳤나 보군.”

미라벨의 비밀을 폭로하려던 비앙카의 노력은 에치오의 말 한마디로 물거품이 되었다. 귀족들은 기사에게 잡혀 질질 끌려가는 비앙카를 흘겨보고서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르밀라라고…….”

단 한 사람, 두란테를 제외하고는.

두란테는 망연히 아르밀라의 이름을 곱씹고서는 미라벨을 보았다. 그는 비앙카가 왕녀의 정체가 아르밀라라고 주장했을 땐 무시했다.

하지만 비앙카가 죽음을 선고받는 순간까지도 그 주장을 굽히지 않는 걸 보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붉은 머리의 천한 계집이 무려 세골린데의 왕녀라는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여겼는데.

다시금 왕녀의 얼굴을 살펴보니, 대공을 홀렸던 그 계집과 똑같았다.

‘제기랄!’

두란테는 미라벨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통탄했다.

따지고 보면 왕녀가 두란테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데에 가장 지대한 역할을 했다.

리카르도가 두란테에게 돈을 빌려주고 말도 안 되는 조항이 들어 있는 차용증을 쓰도록 한 것도.

아달베르토령의 곡식을 빌미로 리카르도를 협박하려는 두란테의 시도를 허사로 만든 것도.

그리고 발레리오를 공식 석상에서 처음으로 ‘황제’라고 부른 것도 전부 다 왕녀였다.

도대체 두란테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딴 방해를 하는 건가 했는데.

그녀가 ‘아르밀라’라면, 이 모든 행동이 설명이 된다.

두란테는 아르밀라를 천대하고 그녀의 뺨을 갈기고 무시하며, 대공의 정부로 만들려 했으니까.

“너!”

두란테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얼얼함을 느끼며 외쳤다. 그러곤 왕녀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날 부른 건가, 두란테?”

두란테의 시선을 받은 왕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여유로운 표정에 두란테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너!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년이!”

짜악!

두란테가 왕녀에게 욕설을 퍼부었을 때 그녀의 매서운 손길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동시에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뺨을 맞아 고개가 돌아간 두란테는 굴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천하게 여겼던 계집에게 뺨을 맞다니. 이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고 보니, 두란테의 왕족 모욕죄에 대한 처분은 아직이지요.”

미라벨은 두란테의 뺨을 때린 손을 털며 발레리오에게 말했다. 그녀의 행동에 놀라 입을 작게 벌리고 있던 그가 헛기침을 하고서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으시겠습니까?”

“이미 어마어마한 죄를 지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니, 그보다 더한 고통을 줘야겠죠. 편하게 죽지 못하게 해 주세요.”

“저도 부탁드립니다, 폐하.”

발레리오의 옆에 앉아 있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공이 발언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어 들어 보였다.

“이건 내 어머니의 일기장이다.”

선대 대공비의 일기장이라는 얘기에 미라벨을 노려보던 두란테가 철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쳤다.

대체 일기장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기에, 대공이 저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일까.

‘괜찮아, 침착하자.’

두란테는 냉정하려 애썼다. 대공이 단순히 으름장을 놓는 것일 공산이 크다.

그러니 여기서 넘어가면 안 된다. 그럼 정말 모든 게 끝나 버린다. 두란테는 공연히 가슴을 부풀리며 큰소리를 내었다.

“그, 그게 뭐 어떻다는 거요! 그깟 일기장이 뭐라고!”

“매우 중요한 증거지. 네가 어떻게 자작에서 백작이 되었는지, 덕분에 알게 되었거든.”

리카르도의 의미심장한 말에 두란테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퍼졌다. 그가 백작위를 얻은 과정이라는 게, 뭘 뜻하겠는가.

대공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끝났구나.’

두란테는 절망하며 입을 다물었다.

리카르도는 일그러져 가는 두란테의 표정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감히 선대 대공 부처를 농락한 죄. 단순한 사형으로는 씻을 수 없다.”

“……전하, 저는. 저는.”

“죄를 더하고 싶지 않다면 닥쳐.”

대공의 살벌한 명에 겁을 집어먹은 두란테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떨며 딸꾹거리는 그를 응시하던 리카르도가 눈매를 좁혔다.

“어떻게 죽어야 가장 고통스러울까.”

“내 처분은 사형이오. 그 외에는 대공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

황제가 대공에게 재량권을 넘기자, 두란테가 무릎으로 기어서 리카르도에게 다가갔다.

“히끅! 제, 제발, 끅! 자비를!”

기사들에게 저지당한 두란테는 딸꾹질을 하면서도 간절히 빌었다.

리카르도는 두란테의 청을 무시하고서 미라벨에게 손짓을 했다. 미라벨이 제 자리로 돌아와 앉자, 그녀와 신중히 논의를 했다.

이윽고, 미라벨이 자세를 바로 하여 두란테를 응시하였다.

“우선은 감옥에 가두되, 물을 포함하여 먹을 것을 일절 주지 않도록 한다. 언제 처형될지는 처형되기 직전에서야 알게 될 것이다. 매일매일, 오늘이 죽게 되는 날인지 몰라 두려움에 떨면서 지내도록 하라.”

미라벨은 말을 마치고서 발레리오에게 시선을 주었다. 발레리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줄리아 아달베르토는 두란테와 떨어진 곳에 하옥한다.”

“그럼 저는 언제 풀려나나요?”

내내 뒤에 숨어 숨죽이고 있던 줄리아는 제 이름이 호명되자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발레리오는 희망에 찬 그녀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보고서는 말했다.

“반역은 삼대를 멸하는 죄다. 너는 네 아비가 죽는 날 함께 죽게 될 것이다. 하옥해.”

“싫어!”

줄리아는 기사들에게 끌려가면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바로 입이 틀어막혀 몸을 뒤트는 소리만을 남기게 되었다.

딸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던 두란테가 앉은 자리에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그는 자신이 지렸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서 리카르도에게 연신 빌었다.

“전하, 제발. 제발…….”

“레나토의 주인은 은혜와 원수는 잊지 않지.”

리카르도는 서늘한 음성으로 자비를 구하는 원수에게 말했다.

그걸로 답은 끝이었다.

선대 황제와 대공 부처를 농락하여 비극을 만들었으니, 두란테도 비극을 맞이해야만 한다.

그것이 리카르도의 결론이었다.

결국 두란테는 비앙카와 줄리아처럼, 초라한 모습을 한 채 알현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황제를 조종해 제 사욕을 채웠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 두란테 아달베르토는 그렇게 제국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 * *

모든 것이 정리되자, 미라벨은 소피, 루체와 함께 짐을 꾸렸다. 두란테의 끝을 보았으니 더 이상 제국에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샤를은 황궁을 떠나기 아쉬워했다. 하지만 미라벨이 나중에 또 늑대 삼촌을 보러 오자고 타이르자 순순히 따랐다.

“왕녀님,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세골린데에 놀러 와, 루체. 넌 언제든 환영이야.”

미라벨은 시무룩한 루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루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서 샤를의 짐을 마저 챙겼다. 손바닥만 한 면양말을 돌돌 말아서 짐 가방 안에 넣던 루체가 눈을 깜박이고서는 말했다.

“그런데, 약은요? 왕자님 약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우고한테 부탁했어.”

미라벨은 루체의 걱정에 생긋 웃으며 답했다. 샤를의 건강은 이제 염려할 필요 없이 좋아졌다. 이 모든 게 우고의 물약 덕분이었다.

똑똑.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루체는 우고가 온 것 같다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우고와 함께 나타난 인물은 뜻밖의 손님이었다.

“황제 폐하?”

미라벨과 눈이 마주친 발레리오가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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