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15화 (116/120)

115화

황제의 즉위식 이후, 아달베르토가에는 매일같이 우편물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협박과 위협, 통보를 담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거 말고, 제국은행에서 온 건 없나?”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던 두란테는 눈이 벌게져 집사에게 캐물었다.

분명 제국은행에서 추가로 6만 브라헤를 빌려주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돈이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예, 아무래도 직접 가 보심이…….”

“지금 날 놀리는 게야?”

집사의 대답에 두란테가 책상을 거세게 치며 성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 원해서 두문불출하는 게 아니었다. 저택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빚쟁이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몸을 숨기고 있는 형편이었다.

“안 되겠군. 이걸 제국은행장에게 자네가 직접 전해!”

두란테는 종이에 자금 융통을 요청하는 글을 휘갈긴 뒤 집사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나 집사는 두란테의 편지를 받고서도 가만히 서 있었다. 두란테는 속이 타 그에게 외쳤다.

“뭐 해? 당장 나가질 않고!”

“저어, 가주님. 제 봉급이 계속 밀려 있습니다. 벌써…….”

“준다고 했잖나! 준다고!”

두란테는 집사의 조심스러운 문의에 화를 버럭 냈다.

집사는 가주가 면박을 주자 못마땅한 빛을 내비치고서는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제 두란테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젠장!”

두란테는 책상 다리를 발로 차며 욕을 내뱉었다. 다들 짠 것처럼 두란테만 보면 돈을 달라고 해 대니 짜증이 일었다.

이제는 귀족회의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집 안에서 부리는 것들도 제 돈주머니를 채워 달라며 성화였다.

‘이게 다 그 계집이 물꼬를 터서 그래.’

두란테는 며칠 전 자신을 찾아온 비앙카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구근을 훔쳐 온 직후에 그녀는 기가 살아 줄리아의 명에도 잘 따르지 않았다.

이에 줄리아가 짜증을 내었으나, 두란테는 비앙카의 공을 인정해 기고만장하게 구는 것을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이후 구근이 가짜였다는 게 밝혀졌을 때 두란테는 눈이 벌게져 비앙카부터 찾았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내자 그녀는 되레 보수를 주지 않으려 거짓말을 하는 거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감히, 사용인 주제에 주인에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였다.

그러잖아도 구근 때문에 미켈레와 귀족들에게 한바탕 시달려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두란테는 그녀를 두들겨 팼다.

네년 때문에 가문이 망하게 생겼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랬다.

비앙카를 때리다가 지팡이가 두 동강이 났지만 두란테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피멍투성이가 된 비앙카를 하인들에게 시켜 골방에 가두어 놓았다.

“그년을 더 팼어야 했어.”

씩씩대던 두란테는 떡 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비앙카를 더 때린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두란테는 울화를 억누르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은행장, 아니지. 대공…… 대공부터 만나야겠어.”

아달베르토가에 독촉장이 쏟아지게 된 건, 대공이 두란테에게 채무 이행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퍼져서였다.

며칠 전, 리카르도는 독촉장을 보내 두란테에게 당장 7만 브라헤를 갚을 것을 요구하였다.

두란테가 조금만 더 시일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변제 능력이 안 된다면 차용증의 내용대로 토지를 받겠다는 답장만이 돌아왔다.

“아달베르토령만은 안 돼.”

책상을 짚은 두란테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아달베르토령의 토지 전부를 비토레가에 넘겨줘야만 했다.

제국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아달베르토령은 두란테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것만 있다면 두란테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영지가 없다면 그는 꼼짝없이 파산할 것이다.

“그래, 대공부터 만나자.”

대공의 독촉장을 처음 받은 이후로 두란테는 매일같이 그에게 절절한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는 빚쟁이 때문에 외출을 할 수 없는 그의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줄글로는 대공의 마음을 돌리기에 역부족이다. 아무래도 직접 얼굴을 보고 동정심을 애걸해야만 할 것 같았다.

“집사!”

두란테는 집사를 부르며 책상 옆의 벨을 쳤다. 마차를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벨을 아무리 쳐도 집사는 들어오지 않았다.

흥분한 그는 자신이 조금 전에 집사를 제국은행으로 보냈다는 사실도 잊고서 혀를 찼다.

“빠져 가지고는!”

결국 두란테는 직접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복도로 나온 그는 텅 빈 복도에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들 어딜 간 게야? 집사!”

콰앙!

집사를 찾아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저택의 정문이 거세게 열렸다.

“두란테 아달베르토!”

“제국은행의 채무를 이행하러 왔소!”

두란테가 어떻게 대응할 새도 없이, 제국은행의 마크가 찍힌 완장을 찬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 중 집행관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두란테에게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두란테 아달베르토 본인 맞소?”

“그, 그렇소만.”

“제국은행에 진 채무를 이행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바, 담보로 잡힌 부동산과 상단, 그리고 컨트리 하우스를 압류하겠습니다. 시행해!”

사내는 두란테에게 빠르게 퍼붓듯 말하고서 자신의 직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직원들은 통보 절차가 끝나자마자 빨간색 경매 딱지를 저택 이곳저곳에 붙이기 시작했다.

“이 무슨…….”

두란테는 집 안의 물건들에 죄다 빨간 딱지가 붙는 걸 아연실색하여 보았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제국은행장의 날인이 찍힌 종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두란테가 통보서를 읽으려는 때, 집행관이 다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

“이보시오, 아달베르토! 백작위 증서는 어디에 있소?”

“……뭐?”

“백작위 증서 말이오. 당신이 6만 브라헤를 추가로 빌리면서 내놓은 것 말하는 거요!”

집행관의 퉁명스러운 요구에 두란테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종이를 구기며 외쳤다.

“그건 못 줘! 6만 브라헤는 받지도 못했어! 받지도 못한 돈의 담보를 내놓으라니!”

“당신은 못 받았겠지. 당신의 채무자들이 은행에서 받아 갔으니까.”

집행관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서는 직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로비를 샅샅이 뒤지던 직원 몇몇이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찾았습니다!”

“수거해.”

집무실에서 들려오는 은행 직원의 외침에 두란테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인생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두란테는 패닉에 빠져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나 그가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또 몇몇 무리의 사람들이 저택으로 들이닥쳤다.

두란테에게 투자를 하였던 귀족들의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빨간 딱지가 붙은 저택을 둘러보고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런, 한발 늦었군. 경매에 넘어가지 않은 것부터 찾아!”

“예!”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두란테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움직였다. 집기가 쓰러지고, 누군가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로 저택이 시끌시끌해졌다.

“어! 잠깐만, 이거 보석 아냐?”

누군가 바닥에 앉아 있는 두란테의 멱살을 홱 잡았다. 놀란 두란테가 고개를 들었지만, 그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크라바트를 고정하고 있던 브로치가 뜯겨 나갔다.

“꼴에 온몸에 보석을 두르고 계시네.”

하인은 휘파람을 불며 두란테를 내려다보았다.

“어이! 여기 좀 와 봐! 이 인간이 걸치고 있는 것만 해도 제법 되겠어!”

하인이 외치자 다른 사내들이 두란테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두란테가 입고 있는 옷에 박혀 있는 보석을 거칠게 뜯어냈다.

두란테가 저항하며 발버둥 쳤지만, 하인들은 그를 가축 취급 하며 짓밟기까지 했다.

“네놈들! 날 이렇게 대하면 무사하지 못할 거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옷이 죄다 뜯긴 두란테가 헐떡이며 협박했다.

하지만 보석을 뜯어낸 하인들은 그의 위협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저 저택에서 더 뜯어낼 게 없는지 뿔뿔이 흩어져 버릴 뿐이었다.

“이, 감히…….”

은행 직원들과 귀족의 하인들은 저마다 용무를 마치고서 저택을 나섰다.

두란테는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이 되어 휑한 로비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빨간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허망하게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지금 그는 천한 하인보다도 못한 신세였다.

“하…….”

두란테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권세가 황제보다 드높았던 때에는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았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은 두란테가 말을 걸어 주는 걸 대단한 명예로 여기며 감격하였다.

황제의 벗, 대공의 지지자.

그것이 두란테 아달베르토의 지위였고, 그의 영광은 영원할 것이었다.

그럴 것이었는데.

두란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던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저택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

위층에서 들려오는 줄리아의 목소리에 두란테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줄리아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두란테에게 달려왔다.

“웬 놈들이 들이닥쳐선 제 드레스에 죄다 빨간 딱지를 붙였어요. 이제 그게 다 제 게 아니래요!”

두란테는 딸의 징징거림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줄리아는 아버지의 몰골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그를 붙잡고서 칭얼거렸다.

“아직 다음 시즌에 입을 드레스를 사지도 못했는데!”

“……입 다물거라.”

“아버지! 저 이제 새 드레스 못 입는 거예요? 아니죠? 네?”

“닥치래도!”

인내심이 바닥난 두란테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의 태도에 놀란 줄리아가 뒷걸음질을 치며 울먹였다.

“왜, 왜 그러세요…….”

“철딱서니 없는 것 같으니! 네가 대공의 마음만 사로잡았어도 이 사달은 안 났을 거다! 밥값도 못 한 주제에!”

“아, 아버지, 저는…….”

“두란테 아달베르토!”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줄리아를 쏘아보던 때였다. 누군가가 저택에 들어서며 두란테의 이름을 불렀다.

저택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호명에 고개를 돌린 두란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제국 기사단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