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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14화 (115/120)
  • 114화

    두란테는 미켈레의 대답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썩은 내가 나는 구근을 바라보았다.

    “이게…… ‘요정의 숨결’이라고……?”

    “아니! 네놈이 판 불량품이지! 이따위 걸 ‘요정의 숨결’이라고 속여서 팔아? 내 돈 내놔! 내놓으라고!”

    미켈레는 망연자실한 두란테의 멱살을 잡고서 그를 흔들었다. 중년의 사내는 청년에게 잡혀 힘없이 흔들리면서 중얼거렸다.

    “그건 진짜였는데…….”

    “진짜 같은 소리 하네!”

    미켈레는 소리를 지르며 두란테를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그와 함께 온 다른 귀족들도 각자 가져온 썩은 구근을 두란테에게 던졌다.

    “아달베르토 상단에서 산 구근은 전부 다 환불 요청할 거니까 그리 아시오!”

    “내가 투자했던 돈도 뱉어 내!”

    “앞으로 우리 상단에서 백합은 절대 취급 안 할 거요!”

    귀족들이 쏟아 내는 말에 두란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일이라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다. 두란테는 일단 상황을 수습하고자 마른침을 삼켰다.

    “지, 진정들 하시오. ‘요정의 숨결’이 이럴 리가 없소. 내가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것도 다 확인했단 말이오. 왕녀가 황제에게 바친 걸 봤을 거 아니오?”

    “아, 봤지. 선대 황제 폐하께 미처 못 바쳤다며 오늘 황제 폐하께 즉위 축하 선물로 주시더군.”

    “우린 백작과 달리 즉위식에 참여했거든.”

    미켈레가 대답하자 그의 옆에 서 있던 지아코베 남작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왕녀님께 여쭈었지. 그런데 말이야, 왕녀님께선 당신한테 구근을 준 적이 없다고 하셨소. 아예 세골린데 밖으로 가지고 나오질 않으셨다고 하시던데!”

    “그건 대외적으론 비밀이라서요!”

    “비이밀?”

    두란테가 황급히 대꾸하자, 미켈레가 헛웃음을 쳤다.

    “하, 비밀 같은 소리 하네! 네놈이 사기꾼이라는 게 비밀이겠지! 왕녀님께 구근에 대해서 여쭤봤다가 얼마나 망신을 당한 줄이나 알아?”

    미켈레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처음엔 단순히 우리가 구근을 잘못 관리한 건 줄 알았지. 그런데 역시나, 구근에 수분 공급을 안 하면 썩어 버린다며 놀라시더군. 왜 건조한 곳에 보관을 했느냐고 말이야.”

    미켈레는 제 발치에 구르고 있는 구근을 밟아 으깨고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게 애초에 ‘요정의 숨결’ 구근도 아니라며? 왕녀님의 시녀가 직접 확인해 줬지. 이건 흔하디흔한 일반 백합 구근이라고!”

    “미켈레 자작, 됐소. 더 말할 거 없어! 두란테 백작, 내 돈 내놓으시오!”

    지아코베가 미켈레의 말을 자르며 외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귀족들도 아우성을 쳤다.

    쉴 새 없이 쪼아 대는 귀족들의 추궁에 두란테는 머리를 감싸 쥐다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 주면 될 거 아니오!”

    두란테의 성난 외침에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미심쩍다는 눈으로 두란테를 보며 물었다.

    “줄 돈은 있고?”

    “제국은행에서 6만 브라헤를 빌려주기로 했소. 다음 주에 들어올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정말이오?”

    “그래! 그리고 주말에 이번 달 치 백합 대금이 들어올 거요. 그것까지 합하면 돈 주고도 남을 테니 행패는 작작 부리시오!”

    “지켜보겠소.”

    지아코베는 여전히 두란테를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는 두란테가 도망칠지도 모른다면서 자신이 데리고 온 하인들을 두고 가겠다고 하였다. 귀족들에게 시달린 두란테는 알아서 하라고 하였으나, 곧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이번 주가 채 다 가기도 전에, 야반도주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 * *

    응접실에서 샤를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던 미라벨은 아이에게 물약을 먹였다. 샤를은 이제 물약을 먹는 걸 일과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 머거써!”

    “착하다, 우리 샤를.”

    미라벨은 연보랏빛의 물약을 말끔히 마신 샤를에게 초콜릿 쿠키를 주었다.

    아이는 두 손으로 쿠키를 쥐고서 냠냠 먹었다. 쿠키를 먹는 샤를의 입가를 닦아 주던 미라벨에게 소피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알았어. 지금 대공한테 가자.”

    미라벨은 소피의 보고를 받자마자 샤를을 루체에게 넘겨주었다. 샤를은 눈을 말똥말똥 뜨곤 미라벨을 붙잡았다.

    “어마, 어디 가?”

    “엄마 금방 올게. 루체랑 에치오랑 놀고 있어. 샤를을 부탁해요, 에치오.”

    “네, 다녀오십시오.”

    “왕녀님 외출하십니다.”

    소피가 문을 열자, 문 양옆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엑스 자로 막아 놓았던 창을 치웠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함께 방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미라벨의 옆에 붙었다. 소피는 익숙하게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대공께 가실 겁니다.”

    “모시겠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서는 앞장섰다. 미라벨의 숙소에 두란테가 자객을 보낸 후로, 황궁의 경비가 한층 삼엄해졌다.

    황제, 발레리오는 즉위하자마자 황실 곳곳에 심어진 두란테의 사람들을 색출해 냈다. 이 과정에서 황궁 일손의 절반 이상이 물갈이되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안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발레리오는 황태자 시절부터 자신을 따른 기사단의 기사에게 미라벨의 호위를 맡겼다.

    미라벨은 다소 과한 보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레리오와 리카르도는 당연한 처사라고 입을 모았다.

    샤를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샤를 얘기가 나온 이상 미라벨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조금 갑갑한 것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전하, 왕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느덧 미라벨을 리카르도의 방까지 인도한 기사가 정중히 문을 두드렸다.

    굳게 닫힌 방문이 열리자, 미라벨은 기사와 소피에게 눈길을 주었다.

    대공과 왕녀가 대화를 나눌 때는 자리를 비우고 다른 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킨다.

    이는 황제가 왕녀를 모시는 모든 자에게 내린 명이었다. 그렇기에 기사는 자연스럽게 물러나 문 앞을 지켰다.

    * * *

    “나를 부르지. 그러면 내가 갈 텐데.”

    미라벨을 맞이한 리카르도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가던 미라벨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그녀로서는 최선의 표정이었다.

    리카르도의 모습에 마음이 무겁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오가 즉위하고 두란테의 몰락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미라벨은 갑갑하기만 했다. 리카르도의 상태가 그 이유였다.

    리카르도는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갔다. 아르밀라를 잃고서 한동안 아팠다더니, 그때도 이랬을까 싶게 몸이 안 좋아 보였다.

    건장한 몸에는 지방이 전부 다 빠져 근육밖에 남지 않았고, 때때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기침을 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미라벨이 보는 앞에서 혼절한 적도 있었다.

    우고에게 진찰을 받으라고 했지만, 리카르도는 고개만 저었다. 아무렇지 않다, 괜찮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미라벨은 나시르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나시르조차도 리카르도와 똑같은 대답만 해 주었다.

    리카르도의 건강에 누구보다 예민할 나시르가 그리 답하니, 미라벨도 더는 나서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곧 떠날 것이니까.

    사실은 그래서 더, 홀로 남을 리카르도가 신경이 쓰였다.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 텐데.

    미라벨을 비롯한 악연은 다 끊어 내고, 아픈 과거 따윈 다 잊고서 살아야 할 텐데.

    어째서 나날이 허약해져 가는 것만 같을까.

    “왜 그렇게 보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리카르도는 자신에게 박히는 미라벨의 시선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쓸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쓰다듬는 턱 선이 예리하게 벼려진 것을 보던 미라벨이 고개를 돌렸다.

    “밤을 새웠나 봐요? 아니면 끼니를 굶었든가.”

    “잘 잤고, 잘 먹고 있어.”

    거짓말.

    미라벨은 태연히 대꾸하는 리카르도를 냉정한 눈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더 추궁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즉위식도 무사히 끝났으니, 당신이 움직일 때예요. 내일 두란테에게 통보를 하면 될 것 같아요.”

    “드디어 내일인가.”

    리카르도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두란테에게 7만 브라헤를 빌려주었을 때 썼던 차용증이었다.

    미라벨은 차용증을 건네받아 훑어보았다. 역시 나시르는 빈틈없이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 어디에도 두란테가 도망칠 수 있는 허점은 없었다. 다만, 리카르도에게만 유리한 조항이 심어져 있었다.

    “제3조 2항. 두란테 아달베르토는 리카르도 비토레가 채무 변제를 요구한 즉시 이행해야 한다. 불이행할 시, 그 금액에 상응하는 아달베르토령의 토지를 비토레가에 귀속한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해당 조항을 읽어 내린 미라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7만 브라헤를 다 갚으려면 두란테는 아달베르토령을 전부 리카르도에게 넘겨야 한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채무 계약 체결 당시, 두란테는 이 조항에 대하여 걱정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적을 거라고 과신했다.

    리카르도가 하루아침에 변제를 요구할 리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두란테의 수중에 있는 백합을 죄다 팔면 그 정도 자금은 충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맞는 계산이었다.

    두란테가 파는 구근이 불량품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백합값만 폭락하지 않았다면.

    두란테가 경매까지 열어서 판매한 ‘요정의 숨결’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구근이 처음부터 다른 품종이었고, 심지어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는 불량품이라는 얘기는 백합 시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여 백합의 값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누구도 백합을 원하지 않았다.

    이는 곧 두란테의 자금줄이 완전히 끊겼음을 의미했다.

    몰락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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