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발레리오는 덤덤한 얼굴로 일기장을 읽었다. 그가 선대 대공비의 일기를 읽는 동안, 집무실에는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
마지막 쪽까지 다 읽은 발레리오는 담백하게 말하며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그의 반응에 리카르도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알고 있었다고?”
“어머니의 유언이었거든. 늙은 흰 염소를 조심하라는 게.”
발레리오는 차갑게 눈을 빛냈다.
황후가 말했다는 ‘늙은 흰 염소’가 누구인지는 미라벨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얀 염소는 아달베르토가의 상징이니까.
발레리오는 두란테를 떠올리는 듯, 이를 갈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내겐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지.”
발레리오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수첩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동안은 자네를 미워하기도 했어. 내 어머니와 내가 불행한 건 다 대공가 탓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게 자객을 보내오는 것도 자네가 두란테와 함께 꾸민 짓이라고 여기기도 했지.”
“진심인가?”
리카르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태도에 발레리오가 손을 내저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라는 거 지금은 다 알아. 그렇지만 그땐 그랬어.”
발레리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던 거지.”
“탓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그렇지.”
발레리오는 턱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그는 수첩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불현듯 떠오른 듯이 미라벨을 보았다.
“왕녀님께서도 일기장의 내용을 다 아십니까?”
“모릅니다.”
미라벨은 차분히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리카르도는 일기장을 샤를이 찾아 줬으니, 발레리오에게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미라벨의 생각은 달랐다.
발레리오에게 미라벨은 단순한 외국의 귀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 잠시 두란테의 척결을 위해 손을 잡았지만 이는 철저히 서로의 이해에 따른 것일 뿐.
평화 협정까지 잘 갈무리가 되면 그걸로 끝인 관계다.
그런데 미라벨이 선대 황제와 대공비 사이의 일을 안다고 하면, 발레리오는 껄끄러울 것이다. 선대 황제의 치부이자, 현 황제도 얽힌 황실의 가족사가 아닌가.
“제국의 일은 제국의 일일 뿐, 관심 없습니다.”
미라벨이 재차 말하자, 발레리오가 깊은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리카르도에게로 시선을 옮기다가 피식 웃었다.
“이거 서운하군요. 우리는 가족이 될 수도 있었는데요.”
“가족이라니요?”
“원래대로라면 왕녀님께서 대공과 혼인하시고, 제국의 가족이 되셨을 테니까요.”
“이미 끝난 얘기입니다.”
“……그렇지요. 이미 끝난 일이긴 하지요.”
발레리오는 심히 애석하다는 듯이 말하고서는 목을 가다듬었다.
“하면 제국의 일에는 관심 없으신 왕녀님께서는 어째서 여기까지 행차하신 겁니까?”
“어제 자객이 저의 숙소를 습격하려 했습니다.”
미라벨은 말을 마치고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눈길을 주면서 말을 이었다.
“대공께서 그러시더군요. 황궁에 자객을 보낼 만한 자는 한 명뿐이라고.”
“저한테도 종종 자객을 보냈던 자가 있긴 한데.”
발레리오는 미라벨의 말을 받아서 대답하다가 일기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이 일기장에도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우리가 함께 무너뜨리기로 한 인물이기도 할 테죠.”
“맞습니다.”
발레리오는 손깍지를 끼고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미라벨을 바라보며 습 하고 숨을 들이켰다. 뭔가 깊이 고민하는 듯했다.
“흠. 하지만, 선대 대공비의 일기장은 두란테를 잡아들이기엔 약합니다.”
“자객 중 한 명을 살려 뒀어. 증인으로 나설 거다. 두란테가 세골린데의 왕족 암살을 사주했다는 증언을 할 거다.”
리카르도가 끼어들자, 발레리오가 순간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부족해. 두란테가 다 조작이라고 주장하면 그만이야. 무엇보다도 증인이 재판 때까지 멀쩡히 살아 있을 거란 보장이 없고.”
“확실한 증거와 죄명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미라벨은 두 남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에게 꽂히자, 미라벨이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뭔가 방도가 있습니까?”
“폐하의 즉위식이 끝나고 나면, 두란테도 끝날 거예요. 제가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그거야말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란테에겐 자비 비슷한 것도 베풀지 않을 거니까요.”
미라벨은 발레리오의 장담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가장 큰 걱정거리가 해결되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 * *
“그놈이 황제라니!”
두란테는 씩씩거리며 화병을 던졌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벽에 부딪힌 화병이 산산조각이 났다.
화병 조각이 떨어진 바닥은 먼지와 구겨진 서류가 한데 엉켜 엉망이었다.
그의 집무실은 위세 등등한 백작가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버려진 창고에 가까운 상태였다.
아침저녁으로 집무실을 청소해야 마땅할 하인들이 죄다 도망간 탓이었다.
“젠장!”
두란테는 더러운 집무실의 광경에 욕을 내뱉었다. 며칠째 감지 못한 머리에서 기름이 줄줄 흐르고, 옷깃에는 땀자국이 누렇게 떴지만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오늘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발레리오가 아르칸젤로 제국의 황제로서 즉위하는 날이다.
두란테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발레리오가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어젯밤부터 전야제랍시고 불꽃놀이를 요란하게 하였고, 오늘 아침에는 시가지 행사까지 열렸으니까.
두란테의 계획대로라면 오늘이 아니라 3일 뒤, 리카르도가 황제위에 올랐어야 했다.
그리고 두란테는 리카르도에게 줄리아를 황후로 넘겨주고 국구로서 떵떵거려야 했는데.
똑똑.
“가주님…….”
“나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분해하던 두란테는 집사가 문을 빼꼼 열고 머리를 들이밀자 표독스레 외쳤다. 하지만 집사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서 말했다.
“소,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두란테는 핏발이 선 눈으로 집사를 보았다. 집사는 빠르게 눈을 깜박이고서 말했다.
“미켈레 자작님과 파트리지오 남작님, 칼비노 후작님, 지아코베 남작님, 그리고 베니아 자작님이십니다.”
“없다고 해.”
“예?”
“없다고 하라고!”
“아, 알겠습니다.”
집사를 내쫓은 두란테는 문이 닫히자마자 소파를 끌어 문을 막았다. 문을 꽉 닫은 그는 재빨리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전부 쳤다.
“안 계신다니?”
“황제 폐하의 즉위식에도 안 오더니, 클럽에도 안 보이고, 그럼 여기 말고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성이 잔뜩 난 귀족들의 목소리에 두란테가 인상을 썼다.
‘왜 저놈들이 난리야?’
대공이 황위 계승권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대공파로서 두란테를 지지하던 이들은 완전히 돌아섰다.
그리고 제국은행을 필두로 두란테의 명성 하나만을 보고서 그에게 거금을 빌려주었던 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저택을 찾아왔다.
하지만 오늘 두란테를 찾아온 귀족들은 ‘요정의 숨결’을 산 자들이었다. 그러니 눈치 볼 건 딱히 없다.
‘쯧, 바빠 죽겠는데.’
두란테는 점차 언성을 높이는 귀족들을 무시하고서 귀족 연감을 펼쳤다.
두란테는 대공이 계승권 포기 선언을 한 이후로, 그를 대신하여 내세울 만한 대체제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으면서 권력욕은 없는, 멍청한 놈은 좀처럼 찾기가 힘들었다.
두란테가 귀족 연감에 파묻혀 있는 사이, 저택 밖에서 나던 소리가 가까워졌다.
“당장 나오라고 하거라!”
어느새 귀족들은 저택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만류하는 집사를 밀치고서 집무실 앞까지 쳐들어와 문을 마구 두들겨 댔다.
“백작! 두란테 아달베르토 백작!”
“여기 있는 거 다 압니다! 나와요!”
“나와, 이 사기꾼아!”
귀족들의 재촉을 한 귀로 흘리고 있던 두란테는 사기꾼이라는 호칭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가 사기꾼이란 말인가. 귀족들이 차기 황제가 누가 될지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건 그도 몰랐던 일이다.
두란테가 전 재산을 걸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에게 성을 낸단 말인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언짢아진 두란테가 연감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우지끈 부서지고, 도끼를 든 하인들 사이로 잔뜩 화가 난 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두란테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이 뒤집혀 부서진 문 틈 사이로 돌진했다.
‘왜들 저래?’
놀란 두란테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상황 파악을 하는 동안, 미켈레가 가장 먼저 달려와 무언가를 던졌다.
“악!”
“이거 어쩔 거야, 사기꾼 새끼야!”
이마를 맞은 두란테가 황당해하며 제게 던져진 것을 보았다. 아기 주먹만 한 새까만 돌덩이 같은 물체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게 썩은 양파 같기도 했다.
“이게 대체 뭔데 그러는 거요!”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두란테가 눈에 불을 켜고 언성을 높인 때였다. 미켈레가 씩씩거리며 그에게 외쳤다.
“네가 판 것도 못 알아보냐? ‘요정의 숨결’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