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밤을 맞이한 황궁은 낮의 활기가 마치 거짓인 것처럼 적막에 휩싸이곤 했다.
리카르도는 적막과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는 무장을 하고서 세골린데 왕녀의 거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미라벨이 황궁에 온 이래로 그는 자진하여 매일같이 그녀의 숙소를 지켰다. 물론 미라벨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황궁은 안전하지 않다.
나시르의 보고에 의하면 두란테는 황궁 이곳저곳에 제 사람들을 심어 놓았다.
그러니 대담하게 황태자에게 자객도 보내고, 미라벨의 하녀도 납치하는 짓거리를 벌였을 터.
발레리오가 황제가 되었지만, 아직 두란테는 살아 있다.
욕심이 꺾인 두란테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발레리오는 황태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검술 수업을 받아 왔다. 그러니 자객으로부터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다.
하지만 미라벨은 다르다.
미라벨과 샤를은 리카르도가 지켜 주어야만 했다. 에치오나 다른 기사에게 맡겨도 될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장가라…….’
미라벨이 샤를과 잠들어 있을 문 너머를 바라보며 서 있던 리카르도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검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늘 낮에 들었던 자장가가 그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다.
어렸을 적, 몇 번이나 들었을까 싶은 어머니의 자장가.
아주 흐릿한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멜로디를 들은 순간 아이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서 울컥해 버렸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이내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먹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해야 했을 만큼.
‘샤를은 행복하게 자라야 해.’
리카르도는 가슴을 쥐던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미라벨의 이별 선고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리카르도의 곁에 있어 봤자 행복해지지 않을 테니까.
리카르도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부모로서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법도 모른다.
불완전하고 서투른 사랑을 주며 아이에게 상처를 주느니, 미라벨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기를 비는 편이 낫다.
미라벨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미련 없이 그를 버린 것일 터.
‘악연은 두란테와 함께 다 끊어 내게 해 주면 돼.’
리카르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미라벨은 리카르도와의 인연을 ‘악연’이라고 하였다.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은 지독한 관계라고, 그에게는 아무 감정도 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늘 옳았으니 그녀의 결론도 옳을 것이다.
그러니 리카르도는 겸허히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비록 그 과정이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울지라도.
타악.
생각에 잠겨 있던 리카르도는 천장에서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객이다.’
어둠과 하나가 되어 복도에 몸을 숨긴 리카르도의 앞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기둥 위에서 내려온 그림자는 겁도 없이 큰 보폭으로 미라벨의 방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만.”
리카르도는 그림자가 방문에 다가가기 직전, 검을 빼 들어 자객의 목에 갖다 대었다.
대공의 등장에 당황한 자객이 뒤로 확 물러나고, 동시에 리카르도 주위로 네 명의 자객이 나타났다. 모두 천장에 잠복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만하라고 했는데.”
리카르도는 엷게 웃고서는 검을 휘둘렀다. 그는 마치 검이 펜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서 가볍게 굴린 뒤,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객들을 하나씩 처치했다.
“으악!”
가장 먼저 리카르도를 공격하던 자객이 단말마의 비명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자 남은 자객들이 일시에 공격해 왔다.
리카르도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객들을 베어 내었다. 실력을 겨룬다기보다는, 귀찮게 달려드는 이들을 가뿐히 쳐 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만큼 자객들과 그의 실력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컥……!”
마지막으로 남은 자객의 팔을 베어 낸 리카르도가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는 도려내진 오른팔을 부여잡고서 무릎을 꿇은 자객을 내려다보았다.
리카르도는 피가 묻은 검날로 자객의 복면을 가르고서 말했다.
“네 주인을 죽이고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마. 어떠냐.”
“……뭐?”
뜻밖의 회유에 당황한 자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카르도는 한쪽 눈썹을 추어올렸다가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그의 발치에는 앞서 목숨을 잃은 자객들의 시신이 쌓여 있었다. 리카르도는 짧게 혀를 차고서 말을 이었다.
“누가 보냈을지는 뻔하니까. 법정에서 증인이 되겠다고 하면 널 살려 주마.”
“퉤! 개소리!”
자객은 침을 뱉고서 몸을 일으켰다. 리카르도는 도망치려 하는 자객의 발을 걸어 그를 자빠뜨린 뒤 다시금 말했다.
“잘 생각해라.”
리카르도는 자객의 목을 틀어쥐고서 몸을 들어 올렸다. 목이 졸린 자객의 발이 허공에 들리고, 그가 검을 떨구며 캑캑대었다. 리카르도는 그가 발버둥 치는 모습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목숨을 건지고 싶다면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보단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다.”
“큭, 누, 누가!”
“죽고 싶지 않잖아? 살고 싶으니 혀 밑의 독도 삼키지 못한 거겠지.”
리카르도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의 지적에 자객이 할 말을 잃고서 허우적거렸다.
리카르도는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자객의 얼굴을 관망하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죽든지, 아니면 살지 정해. 다만, 네가 충성한들 두란테는 급해지면 꼬리부터 잘라 내려 할 거다. 그 꼬리가 누구일지는 말 안 해도 되겠지.”
“……할, 켁, 하겠, 습니다, 큭!”
“그래.”
리카르도는 자객이 항복하자 손에 힘을 쭉 풀었다. 바닥에 철퍼덕 떨궈진 자객이 목을 감싸고서 헐떡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에는 온정 한 점 없었다.
“일단은…….”
“전하?”
자객에게 명을 내리려던 리카르도가 문 열리는 소리에 흠칫하였다. 그가 어떻게 대응을 하기도 전에 소피가 안에서 나오며 입을 틀어막았다.
소피는 리카르도가 미라벨의 방을 지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밖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나왔다가 뜻밖의 상황을 목격하고 말았다.
피에 물든 검을 든 리카르도와 그의 주위에 널브러진 시신을 본 소피가 비명을 겨우 삼켰다. 리카르도가 긴장을 풀려는 찰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소피. 뭔…….”
소피의 입단속을 하려던 리카르도는 방 안에서 나온 미라벨을 보고서 입술을 사리물었다. 미라벨은 복도의 상황을 둘러보고서 소피에게 방에 들어가 있도록 명했다.
혹여나 샤를이 깨어 나오지 못하게끔 신신당부한 미라벨은 가운을 여미고서 문을 닫았다.
“자객인가요?”
미라벨의 침착한 질문에 리카르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전부 죽이진 않았어. 증인으로 둘 자를 살려 놨고.”
“네 주인이 정확히 누굴 죽이라고 했지?”
미라벨의 등장에 당황하던 자객은 그녀가 질문을 던지자 눈을 굴렸다. 미라벨은 자객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쏘아붙였다.
“간단한 대답도 못 하면서 증인으로 나서겠다고?”
“……세, 세골린데의 왕녀와 왕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샤를까지? 아직 아이인데. 그 어린 애를 죽이라고 했단 말이지.”
자객의 대답에 미라벨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자객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크게 숨을 쉬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황제 폐하를 뵙겠어요.”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통보하듯이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그를 등지고서 방으로 들어가려던 미라벨이 움칠하고서 고개를 슬며시 틀었다.
“지켜 줘서 고마워요.”
미라벨은 짧게 인사를 하고서 방 안으로 사라졌다. 리카르도는 그녀가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며 검을 다잡았다.
* * *
선대 황제의 장례식이 엉망으로 끝났기 때문에, 발레리오는 사흘 뒤에 제대로 된 즉위식을 열기로 하였다.
장례식장에서 귀족들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명실공히 황제의 위에는 올랐지만, 즉위식은 형식의 문제였다.
다소 급하게 잡힌 일정이었지만 큰 혼잡은 없었다. 어차피 일주일 뒤에 열릴 행사를 살짝 앞으로 당긴 것이기 때문이다. 두란테가 준비했던 즉위식에서 주인공만 바뀐 셈이었다.
다만 조금 빡빡하게 일정이 진행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발레리오는 지금 산더미 같은 문서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만나야 하는 손님은 있다.
발레리오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대공과 세골린데의 왕녀가 그 주인공이었다.
“즉위를 경하드립니다, 폐하.”
“인사는 내가 해야죠.”
씨익 웃은 발레리오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서류의 산을 뒤로하고서 왕녀를 맞이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요?”
리카르도와 함께 황제의 집무실을 찾은 미라벨은 서류들을 흘끔 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우선은 대공의 용건부터 들어 주시지요.”
“다들 나가 있도록.”
황제의 명에 집무실에 있던 보좌관들과 시종들이 일제히 방을 나갔다. 번잡했던 방 안이 조용해지자, 발레리오가 리카르도에게 손짓을 했다.
리카르도는 발레리오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품 안의 수첩을 꺼냈다. 그는 모서리가 새까맣게 탄 수첩을 내밀며 말했다.
“이걸 자네도 봐야 할 것 같아서.”
“이게 뭔데?”
수첩을 내려다본 발레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라벨은 숨을 죽이고 그가 일기장을 집는 모습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