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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11화 (112/120)

111화

리카르도의 마력에 반응한 수첩의 겉면에는 ‘줄리에타 세클라’라는 이름이 드러나 있었다.

미라벨은 동글동글하고 단정한 필체로 적힌 이름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줄리에타 세클라’가, 당신 어머니의 처녀 적 이름인가요?”

리카르도는 대답 대신 날카로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의 괴로운 표정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리카르도에게 있어서 어머니가 어떠한 존재인지, 미라벨은 안다.

그의 어머니는 리카르도의 유년기를 어두운 절망으로 칠하였다.

리카르도의 어머니이자, 선대 대공의 아내이며, 죽은 황제의 연인이었던 그녀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아픔으로 남았다.

미라벨은 숨이 막힐 것처럼 무거운 침묵 속에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돼요.”

“……늘 원망했어.”

미라벨이 수첩을 가져가려 하자, 리카르도가 손에 힘을 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손아귀에서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린 수첩이 짓이겨졌다.

“왜 날 낳았는지, 아버지와 결혼했으면서 왜 황제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왜…….”

리카르도는 말을 멈추고서 크게 숨을 쉬었다. 넓은 가슴이 호흡을 따라 팽창하였다가 조여들었다.

“왜 목숨을 끊었는지. 묻고 싶었다.”

리카르도는 힘겹게 말을 마치고서 수첩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어루만졌다.

“이걸 읽으면,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자리를 피해 줄게요. 샤를은 깊게 잠들었으니, 여기 있어요.”

“아니.”

미라벨이 리카르도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뱉자, 그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미라벨의 소매를 붙잡은 그가 눈가에 힘을 주며 말했다.

“곁에 있어 줘.”

미라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침대 옆 소파에 앉은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수첩의 첫 장을 활짝 펼쳤다. 수첩을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라벨은 일기장에서 재빨리 눈을 돌렸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녀가 같이 읽을 때까지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미라벨은 고개를 돌려 일기장을 보았다.

주세페 632년 2월 여덟째 날.

오늘도 아버님이 혼담을 가져오셨다. 하지만 내겐 아르만도가 있는걸. 유모는 우리가 안 될 사이라고 하지만, 난 아르만도를 믿어.

일기가 시작되는 주세페 632년의 선대 대공비 줄리에타는 아직 미혼으로, 대공과 연애 중인 듯했다. 일기장은 줄리에타와 아르만도의 핑크빛 연애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일기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미라벨이 문득 눈썹을 모았다.

‘가만, 아르만도 주세페? 그건 선대 대공의 이름이 아닌데. 그건…….’

깨달음을 얻은 미라벨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아르만도 주세페.

이는 그녀가 오늘 장례식장에서 본 황제, 주세페 3세의 이름이었다. 미라벨은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깜박였다.

‘선대 대공비는 원래 황제와 사귀었던 건가? 그럼 왜 황제가 아니라 대공과 결혼을 한 거지?’

미라벨은 의문을 일단 묻어 놓고서 일기를 마저 읽기로 했다.

줄리에타는 일기를 매일 쓰지 않았다. 그녀는 몹시 행복하거나 불행할 때만 글을 썼는데, 그래서인지 감정의 굴곡이 엄청나 보였다.

한동안 아르만도와의 행복한 연애 얘기로 도배되었던 일기는, 일기장 속 세상의 황제가 서거하자 급격히 우울해졌다.

난 아르만도가 황제가 안 됐으면 좋겠어.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는 화를 내겠지. 동생에게 지는 걸 싫어하니까.

역시 아르만도는 황제의 이름이 맞았다. 미라벨은 집중하며 다음 내용으로 옮겨 갔다. 일기장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 이전 내용에서 몇 달이 흘러 있었다.

아르만도가 이해 안 가. 날 사랑한다면서 자기 동생이랑 결혼을 해 달라니. 왜 그래야 하는 거야?

미라벨은 안쓰러운 마음에 얼굴을 찌푸렸다.

줄리에타의 연인인 아르만도는 그녀처럼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기적이며, 냉정하고, 또한 탐욕스러웠다.

황위에 대한 욕망 앞에서 아르만도는 사랑을 가볍게 저버렸다.

그는 줄리에타에게 자신의 동생과 결혼해 달라고 강요하며 그래도 사랑은 변치 않는다는 소리를 했다.

줄리에타는 이 문제로 아르만도와 수없이 다투며 괴로워하였다.

둘이 황위를 두고 어떤 거래를 했든 나와는 상관없잖아. 게다가 아달베르토 자작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세르지오와 결혼을 해야 아르만도가 황제가 된다니? 아르만도가 황제가 못 되면, 내 탓이라니? 싫어. 다 싫어.

이 다음 페이지를 넘겨서 보던 미라벨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세 페이지가 온통 ‘죽고 싶어’라는 문장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보는 사람이 다 오싹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일기장의 공백이 이어졌다. 리카르도가 떨리는 손으로 빈 페이지를 계속 넘기자, 다시금 일기가 시작되었다.

아르만도는 황제가, 세르지오는 대공이 되고, 두란테 아달베르토 자작은 백작이 되었어. 그리고 나는 레나토에 갇혔지. 나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나만 다 잃었어.

결혼 후 다시 쓰기 시작한 듯한 일기는, 처녀 시절과 비교하면 글씨체가 현저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줄리에타의 정신 상태가 위태롭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괜찮아. 아르만도는 날 사랑한다고 했어. 이 아이가 있는 한, 우리 사랑은 변치 않아. 사랑해, 사랑해요, 아르만도.

제대로 된 문장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에는 간헐적으로 끄적인 듯한 짧은 문장들이 있었는데, 글씨체가 너무 엉망이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리카르도는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넘기다가 이내 모든 페이지가 다 넘겨지자 수첩을 닫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수첩을 쥔 채 침묵하였다.

미라벨은 리카르도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리카르도가 알았던 것과 달리, 선대 대공비는 황제와 단순한 불륜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연인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혼인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독한 우울증에 걸렸다.

선대 대공비가 황제와의 아이를 가지고 출산을 한 건 발악이었을 것이다.

황제가 자신을 아직도 사랑한다는 믿음을 가지기 위한, 그리고 제정신으로 세상을 살기 위한 발악.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에도 그녀의 불행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여 한때 연인과의 달콤한 미래를 꿈꾸었던 여인은 제 목을 맨 것이다.

비참한 현실을 모두 끊어 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비극의 중심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두란테 백작.

줄리에타의 일기에 의하면, 두란테가 선대 황제와 대공 사이를 오가며 거래를 조율한 듯했다. 그리고 줄리에타에게 선대 대공과 혼인하라고 강요까지 한 모양이었다.

‘몹쓸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미라벨이 입술을 말아 물고서 인상을 찡그렸을 때였다. 일기장을 쥐고 있던 리카르도의 손에서 짙은 보랏빛이 뿜어져 나왔다.

강렬하고 선명한 보라색 빛이 일기장을 감싼다 싶더니, 수첩을 태우기 시작했다.

미라벨은 씁쓸한 표정으로 수첩의 모서리가 타들어 가는 광경을 보았다. 그러다 곁에서 들려온 거친 숨소리에 깜짝 놀랐다.

“리카르도?”

“큭…….”

일기장을 태우던 리카르도가 갑자기 상체를 숙이고 소파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는 수첩의 모서리를 태우다 말고서 헐떡였다.

심지어 간단한 마법이었는데도 엄청난 마력을 소비한 것처럼,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거예요?”

미라벨이 묻자 리카르도가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는 그녀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손으로 가리기까지 하고서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것도…… 아냐.”

미라벨은 크게 흔들리는 리카르도의 상체가 힘겹게 제 호흡을 찾는 것을 심란한 눈으로 보았다.

제삼자인 미라벨에게도 놀라운 내용이었으니, 리카르도에게는 훨씬 더 충격적이었을 터다. 지금 평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정신력을 높이 살 만했다.

“두란테가 생각보다 더, 악질이었네요.”

“……네가 바라는 일이라서, 그래서 두란테를 망가뜨리려 했는데.”

미라벨의 감상에 리카르도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돌아왔다. 그는 어느덧 평소와 같은 매서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젠 내게도 그자를 없애야만 할 이유가 생겼군. 그자가 죽어야 모든 게 완전히 정리되겠지.”

미라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생겼으니까.

그러면 훗날 그를 떠나고서 남을 미련도 전부 다 지워 낼 수 있을 터.

“느때 삼쵼……?”

마치 물속인 듯 고요하던 분위기가 아이의 웅얼거림에 깨졌다.

미라벨과 리카르도가 침대로 눈길을 주자, 샤를이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느때 삼쵸온…… 샤를, 삼쵼한떼 짜근 책 조야 해.”

“작은 책? 수첩 말이니?”

미라벨은 아이의 이야기에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가 샤를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삼촌이 잘 받았어. 고맙다. 그런데 샤를, 그게 어디서 났지?”

“빨간 데에서 가져와써.”

샤를은 하품을 크게 하고서는 리카르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카르도가 다가와서 침대에 걸터앉자, 샤를이 그의 손을 꼬옥 잡고서는 헤실 웃었다.

“삼쵸온, 샤를이랑 가치 자.”

샤를은 리카르도를 살짝 잡아당겼다.

“요기 와.”

“아니, 난…….”

“우웅. 가치 자쟈. 샤를이 자잔가 불러 주께.”

이내, 리카르도를 잡아당기던 아이의 입에서 작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움움, 움, 움, 움-.”

언젠가 루체가 샤를에게 가르쳐 주었던 아르칸젤로 제국의 자장가였다.

자장가를 듣는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는 아이의 자장가를 들으며, 말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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