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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10화 (111/120)

110화

대공의 검이 두란테의 목에 닿자, 장내가 일시에 고요해졌다. 서로의 멱살을 잡고 언성을 높이던 귀족들은 그대로 굳어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도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였어도 그는 여전히 제국의 대공이다.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귀족의 으뜸. 어두운 밤과 차가운 검의 지배자이자, 레나토의 주인.

황태자마저 자리를 뜬 지금은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자가 없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미라벨 왕녀가 대공의 어깨에 손을 얹기 전까지는.

“그쯤 해요.”

차분한 음성에 대공이 말끔히 검을 거두었다. 언짢은 기색 한 톨 없이 왕녀의 말에 따르는 그의 행동에 귀족들은 당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곧이어 이어진 왕녀의 말에 더욱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당신의 검에 이자의 피를 묻히는 건 아까워.”

경멸에 찬 음성.

왕녀는 싸늘하게 말하고서 두란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서 말을 이었다.

“백작은 세골린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나 보군. 내 아들 샤를 에티에네트는 사생아 따위가 아니오. 왕녀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세골린데 왕국의 왕위 계승 서열 3위, 그게 그 아이의 지위이지.”

왕녀는 샤를 왕자의 신분에 대하여 읊으며 두란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기에 눌린 두란테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제단의 계단을 헛디뎌 뒤로 나뒹굴었다.

“으악!”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엎어진 두란테를 부축해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연극을 보듯이 구경하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때마침 귀빈을 배웅하고 돌아온 발레리오가 두란테의 꼴을 보고서 황당해했다.

“그러게요, 이 무슨 소란인지.”

미라벨은 천연덕스레 대꾸하며 형편없는 꼴로 고꾸라진 두란테를 한심하게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서 서늘히 말했다.

“평화 협정 외에도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어난 듯합니다. 제국의 귀족이 감히 세골린데의 왕족을 능멸했으니.”

미라벨은 두란테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 아들을 모욕한 죄의 처분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와 논의하겠소.”

“……황제 폐하라고?”

왕녀의 발언에 장례식장의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녀가 발레리오를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 폐하라고 칭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즉, 세골린데가 발레리오 황태자를 황제로 인정하였음을 뜻한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글쎄, 왕녀님께서 황제 폐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나…….”

“황태자 전하를 황제 폐하로?”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하며 눈빛을 교환하였다.

장례식장에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대공파였다. 하지만 대공이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 지금, 이들은 더 이상 대공파라고 나설 순 없었다.

그랬다간 차기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 역성혁명을 도모하였다는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대공을 내세우려 했던 이유는 권력욕이었다. 그러나 이젠 대공을, 보다 정확히 말해 두란테를 계속 지지해 봤자 권력을 얻기는커녕 잃게 된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란테를 버려야 한다.

어렵지 않게 난 결론에, 서로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중얼거림이 점차 웅성거림으로, 이윽고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재빠르게 배를 갈아탄 귀족들의 연호에 발레리오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황제의 화답에 귀족들은 더욱 목청을 높였다.

“황제 폐하, 만세!”

미라벨은 뒤로 물러서서 귀족들의 환호를 받는 발레리오를 지켜보았다.

결국 황태자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즉위하게 되었다.

즉, 두란테가 멋대로 조정한 즉위식 일정은 흐지부지된 셈이다. 이와 동시에 그가 꿈꿨던 제국의 미래는 사라졌다.

‘아직 멀었어.’

황제가 된 발레리오를 보는 미라벨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돌았다.

그녀의 복수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두란테의 미래가 없어질 때, 그때 비로소 그녀의 복수가 완성될 것이다.

“젠장!”

환호성 사이로 들려오는 욕설에 미라벨이 눈을 돌렸다. 그녀의 시야에 썩은 표정으로 발레리오를 노려보는 두란테가 들어왔다.

그는 초라하게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의 꿈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같이 절망하는 그를 보던 미라벨이 냉정히 몸을 틀었다.

“왕녀, 조심하시오.”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제단에서 내려오려 하자,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에서 손을 놓지 않고서 경계하였다.

혹여라도 두란테의 수족이 미라벨에게 위해를 가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미라벨은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리카르도를 곁눈질로 힐끗 보았다. 그러나 굳이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신전을 나섰다.

“두고 봐, 왕녀! 난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요!”

미라벨의 훼방으로 대공을 협박할 카드를 빼앗긴 두란테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미라벨은 그의 증오를 가볍게 무시했다.

두란테는 그녀의 과거를 비참함으로 얼룩지게 한 데 일조했다.

그가 원한대로 일이 성사되었다면 아르밀라는 리카르도의 정부로서 평생을 그림자처럼 숨어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용서 못 할 자이건만, 두란테는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제 탐욕을 위해 루체를, 미라벨의 소중한 사람을 납치하고 고문하였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망해 버렸으니 분할 테지.’

장례식장을 나선 미라벨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리카르도를 황제로 내세워 제국을 제 입맛대로 가지고 놀려던 두란테의 계획은 무너졌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그의 모든 계획은 하나둘씩 깨질 것이다.

“응접실로 데려다줄까?”

“아뇨, 샤를을 보러 갈래요. 침실에 있을 거예요.”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질문에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답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고선 방향을 틀었다.

두 사람은 ‘황제 폐하 만세’라는 함성을 뒤로하고서, 고요한 별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루체와 함께 색칠 놀이를 하던 샤를은 곤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

미라벨은 주먹을 쥐고서 쌔근쌔근 자는 아이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루체는 가서 쉬어. 샤를은 내가 살필게.”

“네.”

샤를의 색연필을 정리하던 루체가 미라벨의 명에 일어섰다. 그녀는 미라벨의 뒤를 지키고 있는 리카르도의 기세에 눌린 듯 어깨를 움츠리다가, 이내 방을 나섰다.

“샤를, 편하게 자야지.”

미라벨은 침대 위에 책을 펼쳐 놓고서 엎드린 샤를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아이의 몸을 들어 밑에 깔린 책을 빼 주려 했으나, 샤를은 잠투정을 부릴 따름이었다.

“우웅.”

미라벨은 한숨을 쉬고서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녀 혼자서는 자고 있는 아이를 안아 올리기가 쉽지 않다.

미라벨은 하는 수 없이 리카르도에게 도움을 청했다. 리카르도는 그녀의 시선에 기다렸다는 듯 침대로 다가왔다.

“자, 샤를.”

리카르도는 아이를 부드러운 어조로 부르며 가뿐히 안아 들었다. 샤를을 소중히 안아 든 그에게선 조금 전 두란테에게 내뿜었던 살기가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랬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미라벨은 샤를이 유리 세공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레 안아 든 리카르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그것을 쏙 빼닮은 샤를의 검은 머릿결. 그리고 아이를 향한 애정이 담뿍 담긴 리카르도의 따뜻한 시선.

이렇게 보고 있자니, 두 사람의 피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미라벨, 책.”

“아, 네.”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낮은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서 침대 위의 책과 색연필을 치웠다.

“이게 뭐지?”

리카르도가 침대 위에 샤를을 다시 눕혔을 때, 미라벨은 아이가 깔고 있던 책을 보고서 미간을 좁혔다.

처음엔 당연히 그림책이나 동화책이겠거니 하였다. 하지만 막상 꺼내고 보니 이건 책이 아니었다.

샤를이 품고 있던 건 하드커버의 수첩이었는데, 사람의 손때가 탄 건지 상당히 낡아 보였다.

‘이런 게 어디서 났지?’

미라벨은 빠르게 수첩의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하지만 누렇게 변한 내지에는 별다른 게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샤를의 흔적인 듯한, 색연필 낙서가 조금 끄적여져 있을 따름이었다.

‘누가 버리고 간 건가?’

미라벨은 수첩을 닫고서 표지를 살폈다. 하지만 수첩 어디에도 주인의 이름은 없었다.

“왜 그래?”

미라벨이 수첩을 이리저리 살피자, 샤를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던 리카르도가 다가와 물었다. 미라벨은 미간을 모으고서 답했다.

“못 보던 거라서요.”

“줘 봐.”

리카르도의 손이 닿자, 수첩이 연한 보랏빛을 발하였다. 그리고 펜촉이 종이에 닿는 소리가 빠르게 나며 수첩의 백지가 순식간에 검은 글씨로 채워졌다.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마력에 공명하는 수첩을 보며 물었다.

“리카르도 건가요?”

“……아니.”

리카르도는 수첩을 쥐고서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갑자기 고통스러운 기억을 소환당한 표정이었다.

“리카르도? 왜 그래요?”

미라벨이 어리둥절하여 물어보자, 리카르도가 샤를을 보았다. 당혹감과 괴로움, 그리고 반가움이 섞인 복잡한 시선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어떤 눈길을 받는지도 모르고 푹 잠들어 있었다. 리카르도는 목울대를 위아래로 움직이고는 미라벨에게 물었다.

“혹시, 샤를이 붉은 방에 간 적이 있나?”

“……그건, 네. 있어요.”

당황하며 대답하던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질문에 눈매를 좁혔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왜냐면 이건.”

리카르도는 수첩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는 얇은 수첩을 비틀어 짜듯 쥐고서는, 짓씹듯이 말했다.

“내 어머니의 일기장이거든.”

리카르도의 설명에 미라벨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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