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리카르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미라벨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으나, 그는 손등에 핏줄이 돋도록 세게 힘을 주었다.
미라벨은 그를 힐끗 보고서 소파에 앉았다.
“장례식 전에 정리해 둬야 할 게 있어서요.”
리카르도는 말없이 미라벨을 바라보기만 했다. 미라벨은 그의 뜨거운 시선에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게 곧 당신이 원하는 거라고 했죠.”
“그래.”
“황위가 탐나진 않나요?”
“황위?”
미라벨의 질문에 리카르도가 눈썹을 움칠했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어.”
“그럼 다행이네요.”
미라벨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티가 나게 안도하며 이마에 손을 짚자, 리카르도가 다가왔다.
“그게 걱정이 되었어?”
“당신도 황태자 전하처럼 황위를 원하는데, 나 때문에 물러나게 되는 거라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미라벨.”
리카르도는 한결 긴장이 풀린 얼굴로 미라벨을 불렀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말했잖아. 내가 원하는 건…….”
부드럽게 말하던 리카르도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래 보이네요.”
“너는…… 어때? 샤를에게 제국의 황위 계승권을 물려주고 싶어? 내가 그 아이에게 그걸 주지 못해도 괜찮겠어?”
“황위요? 샤를에게 말이에요?”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리카르도의 질문에 미라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이내 연한 미소를 지었다.
“샤를은 세골린데의 왕좌에 오를 거예요. 제국의 자리는 그 아이에게 필요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리카르도는 안도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미라벨의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나는 구두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난 샤를에게 비토레의 성(姓)도, 황위 계승권도 주지 못하니까. 내가 그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비루한 것뿐이라 미안할 따름이야.”
“샤를은 당신을 많이 따라요. 그걸 두고 비루하다고 할 수야 없죠.”
미라벨은 덤덤히 대답했다. 황궁에 머무르는 동안 리카르도는 최대한 시간을 짜내어 샤를과 어울렸다.
몸이 성치 않은데도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애쓴다는 건, 미라벨도 잘 알고 있었다.
리카르도에게 애정이나 증오가 없다고 해서 아이를 향한 그의 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 둘의 인연은 여기까지인데, 굳이 갈라놓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차용증을 봐서 알겠지만, 두란테에게 빚 대신에 아달베르토령을 받을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면 레나토의 기사들을 아달베르토령으로 보내 주지 않아도 되겠죠. 곡식 걱정도 안 해도 될 거고. 대단친 않지만 황위를 포기한 위자료로 여겨 줘요.”
“네게 줄게.”
“당신 거예요.”
미라벨은 토지를 주겠다는 리카르도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더 이상 그에게 무언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미라벨은 불현듯 뭔가를 떠올리곤 물었다.
“아니면 혹시, 토지 말고 달리 원하는 게 있나요?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줄게요.”
“없어.”
리카르도는 의외로 담백하게 말했다. 그의 태도에 짐짓 놀란 미라벨은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가요.”
미라벨은 허리를 펴고서 리카르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킨 리카르도는 가녀린 손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무척이나 희미한 미소였다.
* * *
“나 리카르도 비토레는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 앞으로도 비토레가는 황위를 잇지 아니하며, 황가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식이 시작되기 직전, 폭탄선언이 터졌다.
황위 계승권을 영원히 포기하겠다는 대공의 발언에 장례식을 위해 모였던 귀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잊고서 비명을 질렀다.
“어, 어째서!”
“전하!”
“해, 해명을 해 주십시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귀족들의 절규에도 리카르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진정되질 않았다. 도리어 충격이 점점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전하! 부디 해명을!”
이대로는 장례식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리카르도는 하는 수 없이 자신에게 매달리는 귀족들에게 대꾸했다.
“해명이라. 왜 그런 걸 해야 하지? 황위 계승 서열 1위인 황태자 전하께서 굳건하신데. 내가 계승을 포기하든 말든, 그게 중요한가.”
물론 차기 황제 후보가 있으니, 리카르도의 선언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귀족들 대부분이 대공에게 패를 던지기 전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한, 귀족들이 대공에게 올인하게끔 두란테가 판을 짜기 전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두란테는 산 채로 매장당할 거라는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누가 그의 목에 검을 갖다 댄다 해도 그토록 놀라진 않을 터였다.
“이러시려고 나를 피하셨던 겁니까?”
“용건은 장례식이 끝난 후에 말하라고 한 게, 피한 게 되나.”
리카르도는 사색이 된 두란테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다들 참 유난이로군. 아니 그러한가, 대부?”
“전하!”
두란테는 핏발이 선 눈으로 외쳤다. 그의 비명을 시작으로 엄숙해야 마땅할 황제의 장례식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귀족들이 소리를 지르다가 집기를 부수고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내기를 무르겠다는 자와, 판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버티는 자들의 실랑이가 벌어지며 장내가 혼잡해졌다.
리카르도는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귀족들을 둘러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볼 만하군.”
사제가 정숙을 외쳤으나,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황제의 장례식은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돼 버렸다.
마지막 미사까지 가지도 못하고, 황급히 졸속으로 장례식을 치러야만 했다.
“이 무슨 난리람.”
장례식에 참석했던 외부 귀빈들은 제국의 황위 싸움에 치를 떨며 자리를 떴다.
장례식이 미뤄진 탓에, 귀빈 대부분이 본국으로 귀환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발레리오는 귀빈들이 사라진 쪽으로 급하게 모습을 감췄다. 차기 황제로서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인사를 하려는 것일 터였다.
“자작님! 남작님! 제발 체통을 지키십시오!”
“체통? 지금 전 재산이 날아갔는데 체통?”
사제의 간청에 귀족들은 눈에 불을 켜며 외쳤다. 리카르도는 한가하게 그 모양을 지켜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고인에게 어울리는 장례식이야.”
리카르도의 혼잣말을 들은 미라벨은 흠칫하며 그를 보았다.
리카르도는 고인을 모독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딘지 후련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미라벨은 눈썹을 추어올렸다.
‘하긴, 황제가 밉겠지.’
리카르도와 황제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니 황제의 장례식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은 리카르도의 작은 복수라 할 수도 있었다.
“전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상석에 앉은 리카르도에게 두란테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씩씩거리며 항의했다.
“당장 발언을 취하하십시오! 어서요!”
리카르도는 두란테의 청을 듣고도 듣지 않은 척 무시했다. 그러자 그가 거칠게 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당장, 발언을 취하하세요! 안 그러면 레나토에 곡식 공급을 영원히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럴 곡식은 있고?”
내내 고요하게 두란테를 응시하던 리카르도의 질문에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다가 호통을 쳤다.
“다, 당연하지요! 아달베르토령에는 늘 곡식이 넘칩니다!”
“폭설이 내리기 전까지는 그랬겠지.”
리카르도는 의자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백합을 키운답시고 멀쩡한 밭도 다 갈아엎었는데, 하필 폭설이 내려서 유감이야, 백작.”
“어떻게 그걸…….”
“날 협박할 여유가 있다니 놀랍군. 7만 브라헤를 어떻게 갚을지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그, 그건…….”
이제 두란테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그를 옆에서 구경하던 미라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얹었다.
“레나토의 곡식 문제라면 걱정 말아요. 세골린데에서 공급해 주면 되니까.”
미라벨의 상냥한 음성에 두란테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콧김을 내뿜으며 왕녀에게 외쳤다.
“세골린데가 낄 자리가 아닙니다!”
“일개 백작이 왕녀에게 언성을 높여도 될 자리도 아니지.”
미라벨은 싸늘하게 말하며 두란테를 노려보았다. 왕녀의 위엄 어린 시선에 두란테가 움찔하다가 웅얼거렸다.
“그래 봤자 사생아나 낳은 주제에…….”
두란테의 발언에 미라벨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백합 구근을 훔쳤으니 두란테로서는 더는 왕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재산이 전부 몰수당하고, 귀족으로서의 입지가 무너지게 된 마당에 눈이 뒤집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해도 될 말과 안 될 말은 가려야지.’
미라벨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두란테를 차갑게 쏘아보며 입을 연 찰나.
“여길 자네의 장례식장으로 만들어 줄까.”
리카르도의 서늘한 음성과 함께 푸른 검날이 두란테의 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