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어떡해, 루체. 어떡하면 좋아.”
소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루체의 손을 답삭 잡았다. 샤를의 인형을 안고 복도를 걸어가던 루체는 소피의 행동에 놀라며 되물었다.
“왜 그래요?”
“‘요정의 숨결’ 구근이 없어졌어!”
“헉 진짜요?”
루체의 외침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주변의 시녀들이 깜짝 놀라다가, 소리를 지른 사람을 알아보고서는 가던 길을 걸었다. 소피는 시녀들의 이목을 한 번 끌었음을 확인하고서 말했다.
“응. 어떡해?”
소피가 입술을 축이고서 묻자, 루체가 인형을 꼬옥 끌어안고서 말했다.
“그러게요. 어떡해. 그런데 그거 아무렇게나 두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소피는 복도에 다 울리도록 소리를 높였다. 황궁의 복도를 오가던 시녀들의 시선이 다시금 쏠리자, 소피가 다 들으란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요정의 숨결’ 구근은 다른 백합이랑 다르게 물기 하나 없는 곳에 보관해야 하잖아. 안 그러면 곰팡이가 펴서 죄다 못 쓰게 되어 버리는데.”
“으아, 그러면 안 되는데. 큰일 났다.”
“조금 더 찾아봐야겠어. 루체도 같이 찾아 줘.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네!”
루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소피와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러고서 만나는 시녀마다 사파이어가 박힌 상자에 대해서, 구근의 취급 방법에 대해서 말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것처럼.
* * *
백합 구근이 사라진 다음 날, 수도에는 두란테가 ‘요정의 숨결’을 구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세골린데의 왕녀가 두란테에게 내어 준 것이라 추정되었다.
이에 제국의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아달베르토가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 귀하다는 백합의 구근을 사겠다고 나섰다.
두란테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귀족들에게 백합 구근을 판매하기로 하였다. 구근을 심어 번식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두란테는 왕녀가 사라진 구근의 행방을 묻기 전에 모두 팔아 치워 버릴 작정이었다. 당장 내야 할 이자를 생각하면, 어차피 그래야만 했다.
이에 아달베르토가에서는 때아닌 구근 경매가 열렸다.
오늘은 마지막 남은 구근이 팔리는 날이자, 황제의 장례식 전날이었다.
“축하하네, 미켈레 자작.”
마지막 구근을 판 두란테는 최고가를 부른 미켈레 자작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는 구근을 팔면서 몇 번이고 해 온 당부를 반복하였다.
“구근은 반드시, 건조한 곳에 보관해야 하네. 안 그러면 곰팡이가 핀다네.”
“알겠습니다. 한데, 이대로 장례식이 열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두란테에게 백합 구근을 산 미켈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흥분은 ‘요정의 숨결’ 구근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내일, 황제의 장례식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두란테는 내일의 장례식에서 차기 황위에 대해 중요한 선언을 하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귀족회의 귀족들은 두란테가 드디어 대공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미켈레는 구근이 담긴 상자를 소중하게 껴안고서 말했다.
“이제 우리 대공파가 밀어붙일 때이지요?”
“그래, 그렇지.”
두란테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미켈레가 불안해하며 강조하였다.
“반드시 대공 전하를 황위에 올려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켈레가 대공에게 집착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두란테는 모르고 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다음 황위를 두고 내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합 투기에 미친 자들은 또 다른 투기판에 쉽사리 휩쓸렸고, 그 결과 차기 황위까지 내기 소재로 삼게 된 것이다.
“대공 전하께서 황제가 되실 게 맞지요?”
물론 미켈레는 대공 쪽에 걸었다. 경매가 끝났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두란테에게 집요하게 묻는 건 그래서였다.
전 재산을 대공 쪽에 건 미켈레에게 황위는 제국의 미래가 아니라 그의 미래가 달린 문제였다.
미켈레처럼 내기판에 재산을 건 귀족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두란테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대공 전하가 아니라 다른 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대공 전하께서 그럴 여력이 안 되신다면…….”
“절대 안 됩니다! 반드시 대공 전하여야만 해요!”
미켈레는 희게 질려 외쳤다. 그가 언성을 높이자 구근 경매를 하려고 온 다른 귀족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암요, 대공 전하이셔야 해요!”
“대공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실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백작님만 믿으면 된다고, 힘을 보태 달라고 하셨잖아요!”
“차기 황제는 대공 전하여야만 합니다!”
귀족들의 광기 어린 아우성에 두란테의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단순한 지지 세력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들은, 어느새 빚쟁이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두란테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귀족들을 달래 주었다.
“허허, 내 농을 한 걸세.”
두란테는 진땀을 빼며 말했다.
“나만 믿게나. 자네들이 바라는 대로 될 거야.”
“정말이시지요? 약속하신 겁니다?”
“그럼! 내가 한다고 해 놓고 못 한 일이 있나? ‘요정의 숨결’ 구근도 결국 구하지 않았나!”
두란테는 호언장담을 하며 씨익 웃었다. 귀족들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짓고서 하나둘 저택을 떠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두란테의 가슴이 불길한 예감에 서늘해져 왔다.
‘대공 전하와 대화를 나눠 봐야겠군.’
두란테는 원래, 장례식장에서 대공을 차기 황제 후보로 선언할 생각이었다.
여기에 대공과의 협의는 전혀 없었다.
일단 언급이 되고 나면 대공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황위 경쟁에 휘말리게 되기 때문이다.
귀족회는 완전히 대공파가 되어 있다. 그러니 대공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판은 대공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고독을 벗으로 여기는 대공에게 그런 상황은 벗어나고 싶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
두란테는 대공에게 상황을 정리해 주는 대신에 황위에만 올라 달라고 청할 생각이었다.
일단 황제만 되면 나머지는 두란테가 다 알아서 하겠노라고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몸이 달아 있으니 단순한 선언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러니 대공 쪽에서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
‘내일 장례식을 가기 전에 만나는 걸로 할까.’
두란테는 미켈레가 구근값으로 두고 간 금화 주머니를 응시하였다. 지금 당장은 이자부터 갚아야 했다.
아직 내일이 오려면 멀었다. 어차피 모든 일은 여태껏 그랬던 대로, 그의 뜻대로 굴러갈 터.
두란테는 그렇게 느긋이 생각하였다.
* * *
검은 정복을 입은 리카르도는 굳은 얼굴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뒤에 열릴 황제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었다.
시중을 들겠다는 하인들을 전부 내친 뒤, 혼자서 천천히 옷을 갈아입던 그의 시야에 문득 거울이 들어왔다.
리카르도는 그대로 거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요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얼굴이 해쓱해진 것 같았다. 리카르도는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미라벨이 보기 싫어할까.’
리카르도는 야윈 제 얼굴을 쓰다듬다가 설핏 인상을 썼다. 눈매를 가늘게 좁히자, 가뜩이나 서늘한 인상이 마치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이건 샤를도 싫어하겠는데.’
리카르도는 표정을 풀고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정복의 단추를 목까지 전부 빈틈없이 채운 뒤, 늑대의 옆모습이 새겨진 비토레가의 문장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달았다.
‘이것도 샤를에게 어울리지 않지.’
기다란 손가락이 브로치의 늑대 문양을 느릿하게 더듬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독기를 품은 가문의 문장.
햇살을 닮은 미소를 짓는 샤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리카르도는 늑대 브로치를 움켜쥐었다.
어차피, 모든 건 끝나 간다.
장례식이 끝나고, 미라벨이 원하는 대로 두란테가 몰락하게 되면. 그러면 리카르도의 모든 것은 끝난다.
“리카르도?”
멍하니 거울을 응시하던 리카르도는 눈을 깜박였다. 미라벨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또 환청인가?’
눈을 두어 번 깜박하는 동안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자, 리카르도는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미라벨의 환청이 들리고, 그녀의 환각이 보이지 않은 지는 제법 되었는데. 다시 그 증상이 도지다니.
미라벨과 헤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잘 받아들이는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보다.
“리카르도, 있어요?”
“미라벨?”
한숨을 쉬던 리카르도는 다시금 들려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자, 밖에서 부스럭하고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미라벨의 음성이 들려왔다.
“할 말이 있어요. 바쁘면 나중에…….”
“아니.”
리카르도는 황급히 말하며 문을 열었다. 소피와 하녀들을 거느리고 온 미라벨은 문이 열리자 소피에게 눈짓을 하였다.
소피가 하녀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자, 미라벨이 고개를 들어 리카르도를 보았다.
“들어가도 될까요?”
리카르도는 말없이 미라벨을 보았다. 그러다, 제 얼굴 꼴을 떠올린 그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요, 왕녀.”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방에 들어섰다. 미라벨은 소피에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고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