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07화 (108/120)
  • 107화

    “악!”

    비앙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황궁 복도에서 두란테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에게 벼락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두란테는 응접실을 나오자마자 비앙카에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비앙카가 머리를 감싸자 그녀의 다리와 허리를 마구 후려쳤다.

    “조용히 해!”

    두란테는 비앙카의 비명에 짜증을 내며 더욱 매섭게 매질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던 비앙카는 입술을 악물고서 비명을 삼켰다.

    복도의 시녀들은 백작이 제 하녀에게 분풀이하는 걸 무표정하게 보았다.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라는 태도였다.

    “젠장!”

    한참 동안 지팡이를 휘두르던 두란테가 씩씩대며 욕을 내뱉었다. 그는 웅크리고 있는 비앙카를 뒤로하고서 복도를 척척 걸어갔다.

    “10만 브라헤? 그게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내? 팔기 싫으면 그렇다고 하든가!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지!”

    절뚝거리며 뒤늦게 두란테를 졸졸 따라가던 비앙카는 그의 혼잣말에 눈을 깜박였다. 비앙카는 얼얼한 허리를 주무르며 두란테에게 물었다.

    “왕녀가 10만 브라헤를 내놓으라고 했나요?”

    “손바닥보다도 작은 구근 하나에 10만이란다! 다섯 개를 다 사려면 50만을 내라는데! 젠장, 구근 하나에 10만이라니!”

    “……그게 꼭 필요하신 거죠?”

    “그걸 말이라고!”

    비앙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두란테가 몸을 홱 돌렸다. 그가 지팡이를 허공으로 치켜들자, 비앙카가 몸을 숙이고서 재빨리 말했다.

    “꼭 안 사셔도 되잖아요!”

    “뭐?”

    비앙카의 외침에 두란테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지팡이를 내리며 비앙카에게 다가갔다.

    “안 사면?”

    “왜 귀족 나리들은 모든 걸 제값 주고 사려 하세요? 어떻게든 손에 넣기만 하면 되면 그만이잖아요.”

    비앙카는 두란테가 다시 매질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그럼 반드시 구해다 드릴게요.”

    “됐다. 널 또 믿느니 줄리아를 시키고 말지.”

    “믿지 않으셔도 돼요. 시간만 주세요.”

    비앙카의 필사적인 말에 두란테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비앙카는 그에게 살짝 다가가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복도 끝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그림자가 조용히 기둥 뒤로 사라졌다.

    * * *

    구근 상자를 품에 안은 소피는 종종걸음을 치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상자 안에는 두란테에게 선보였던 구근이 들어 있었다.

    사실, 미라벨이 ‘요정의 숨결’이라고 하며 선보인 구근은 일반 품종의 구근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국보인 ‘요정의 숨결’의 구근을 국외로 가지고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정의 숨결’을 본 적도 없는 자들은 구근의 겉모습만으로 진위를 알 도리가 없다.

    특히 두란테처럼 백합을 투기 목적으로만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더더욱.

    하여 미라벨은 루체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품질이 안 좋은 구근을 상자에 담았다.

    두란테는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왕녀가 내놓은 구근에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미라벨은 그가 겉모습에만 치중하는 자이니, 그럴 거라곤 했지만 소피는 내심 놀랐다.

    게다가 미라벨이 진짜 ‘요정의 숨결’까지 보여 주니 두란테는 홀랑 넘어가 버렸다.

    ‘그런데 정말로 비앙카가 와 있을 줄이야.’

    소피는 조금 전 복도에서 목격하였던 광경을 회상하였다.

    미라벨이 비앙카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소피는 그녀가 두란테를 따라 황궁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다.

    미라벨은 마치 전부터 비앙카를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몇 번 스치듯 본 게 전부일 텐데 비앙카가 어떤 성격이고, 어떻게 행동할지까지 잘 파악한 게 놀라웠다.

    여하간 지금까지는 모두 미라벨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두란테가 미라벨의 구근을 보고 혹하였고, 비앙카가 그를 위해 움직이겠다고 나섰다.

    제값을 치를 수 없으나 구근을 갖고 싶은 욕망도 포기하지 못할 터이니, 두란테는 비앙카를 시켜 구근을 훔치게 할 것이다. 이게 미라벨의 예상이었다.

    ‘두란테 백작은 내 하녀가 도둑질을 했댔지. 조만간 그의 하녀가 도둑질을 하게 될 거야.’

    비앙카가 도둑질을 하게 만들려면, 그러니까 이 구근 상자를 훔치게 만들려면 어디에 두어야 자연스러울까.

    마구간에 도착한 소피는 고민에 빠졌다. 마구간 옆에 있는 창고에 넣어 두려고 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어디에 둔들 어색할 것 같았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상자를 들고서 망설이던 소피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몸을 돌렸다. 양피지를 한 손에 들고 있는 나시르가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길을 잃으셨습니까?”

    “아뇨.”

    소피는 주변을 곁눈으로 살피며 답했다. 그녀는 나시르 외의 다른 사용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속삭였다.

    “왕녀님의 심부름을 하고 있어요.”

    “도와드릴까요?”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곤란해 보이시는데요.”

    나시르의 지적에 소피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곧 있으면 두란테가 마차를 호출할 것이다. 그리고 비앙카가 구근을 살피기 위해 소피의 동태를 살필 것이고. 그 전에 어딘가에 구근을 숨겨 놓아야 하는데.

    “저어, 보좌관님은 입이 무거우신가요?”

    “풉, 하하.”

    나시르는 소피의 질문에 어깨를 가볍게 떨며 웃었다. 그는 외알 안경을 슥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거짓말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런 순진한 질문을 하십니까?”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나시르의 지적에 소피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마음이 급해 아무 질문이나 한다는 게, 바보 같은 말을 던져 버렸다. 소피가 나시르를 피해 다른 쪽으로 가려 하자, 그가 불쑥 말했다.

    “백합 구근을 숨기려면 창고에 두는 것보단, 기사에게 지키게 하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제 주인의 신임을 받는 편이라서요.”

    나시르는 눈썹을 추어올리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로는 에치오를 추천하겠습니다. 에치오도, 흠. 입이 무겁거든요. 그렇지?”

    “영애를 놀리는 게 재밌나?”

    나시르의 부름에 마구간 뒤편에서 나타난 에치오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소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자, 에치오가 콧잔등을 쓸고서 말했다.

    “주군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녀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척해서, 잘 도둑맞을 테니.”

    “믿어도 되나요?”

    “나시르는 몰라도 저는 됩니다.”

    에치오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왕녀의 시녀가 성 안에서만 곱게 자란 아가씨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냥 해맑은 사고방식에는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왕녀를 향한 충성심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마수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도, 자기는 안 구해 줘도 되니 왕녀를 보호해 달라고 사정했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에치오는 무뚝뚝하게, 그러나 믿음직스럽게 말하며 소피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창고에 상자를 넣고서 문 앞에 기대어 섰다.

    “그럼…….”

    “저희는 미라벨 왕녀님께 빚이 있습니다. 대공 전하의 명이 아니라 해도, 왕녀님의 청이라면 기꺼이 할 터이니 염려 놓으세요.”

    소피가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자 나시르가 에치오를 거들어 말했다. 소피는 나시르와 에치오를 번갈아 보고서야 마구간을 떠났다.

    * * *

    비앙카는 두란테를 태운 마차가 떠나자 황궁을 돌아다녔다. 두란테가 그녀에게 준 시간은 황제의 장례식 때까지였다.

    그때까지는 두란테를 대신하여 황제의 명복을 빈다는 핑계로 황궁에, 보다 정확히는 황궁 내의 신전에 머물 수 있다.

    그러니 비앙카는 그때까지 왕녀의 백합 구근을 훔쳐 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두란테는 그녀를 버리겠노라고 하였다.

    ‘상자 하나 훔치는 건 뭐, 껌이지.’

    비앙카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지켜본바, 왕녀의 시녀는 마구간으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빈손으로 나타났다.

    왕녀가 갑자기 말을 탈 리는 없으니 시녀는 마구간이 아니라 창고에 들렀을 것이다. 비앙카는 나름의 추론을 끝내고서 창고로 향했다.

    ‘역시.’

    보통 때였다면 황실 경비병이 지키고 있을 창고에 레나토의 기사단장이 있었다.

    “하암.”

    에치오는 불량하게 창고 문에 기대어 있었다. 졸음이 한가득 쏟아지는 사람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하기도 하고,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비앙카는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에치오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네요, 기사단장님.”

    에치오는 살갑게 인사하는 비앙카를 보며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를 못 알아보는 게 역력한 반응에, 비앙카는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저 모르세요?”

    “네가 뭔데.”

    에치오는 퉁명스레 물었다. 억지로 끌어 올린 비앙카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그래도 레나토에서는 나름 하녀들의 우두머리였는데. 기억조차 못 하다니.

    “저 비앙카예요. 레나토에서 함께 대공 전하를 모셨는데. 그새 잊으셨어요?”

    “아, 그래. 그랬던 것도 같네. 근데 여긴 왜 왔어? 옷차림을 보아 하니 황궁에서 일하는 건 아니고.”

    “저 지금 미켈레 자작 부인의 시녀로 일해요. 부인께서 창고에 두고 온 게 있다고 하셔서요.”

    “나중에 찾으러 와. 주군께서 보물을 지키라고 하셔서 지금은 안 돼.”

    “옛정을 생각해서 잠시만 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금방 나올게요.”

    에치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옛정을 생각해서.”

    “감사합니다.”

    비앙카는 쾌재를 부르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차하면 육탄전이라도 벌여야 하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비앙카는 상기된 얼굴로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물건이 가지런히 정리된 사이에서 사파이어 상자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 환희의 빛이 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