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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06화 (107/120)
  • 106화

    신전의 지하, 미사를 위해 개방된 기도실.

    미라벨은 하얀색으로 칠해진 공간에 흰 드레스를 입고 들어갔다.

    장례식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미사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는 게 제국의 법도이기 때문이었다.

    기도실의 제단 옆에서는 성가대의 어린 소년들이 미성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라벨은 성스럽게 느껴지는 노래를 들으며 기다란 기도용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하자, 앞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틀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리카르도와 눈이 마주친 미라벨은 그대로 멈칫하였다.

    리카르도는 하얀 실로 보일 듯 말 듯 한 자수가 놓인 새하얀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미라벨은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받았다.

    한때 미라벨은 항상 검은 정복만을 입는 리카르도가 하얀 옷을 입는다면, 그건 결혼식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르밀라를 아내로 맞이하는 자리에서 그녀와 함께 맞춘 하얀 정복을 입게 될 거라고.

    ‘다 옛일이지.’

    미라벨은 생각을 싹둑 잘라 내며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소피가 챙겨 온 기도용 베일을 쓰고 두 손을 모았다.

    이내 황태자의 도착으로 귀빈들이 모두 모이자, 사제가 들어와 미사를 시작했다.

    미라벨은 두란테가 미사에 왔는지를 곁눈으로 확인하고서 기도를 올렸다.

    ‘오랜만이네, 아르밀라.’

    차분히 기도를 하고 있는 미라벨에게 한 하녀의 시선이 꽂혔다.

    줄리아에게 내내 비굴하게 굴어 겨우 기도실에 오게 된 비앙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미라벨을 노려보았다.

    미라벨은, 아르밀라는 레나토에서 자신을 알아본 비앙카를 미친 사람 취급 하여 쫓아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이가 갈렸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르밀라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식겁할 일이건만, 무려 왕녀였다니.

    그녀의 정체에 놀랄 새도 없이 저택에서 쫓겨나 얼마나 황망했던지.

    ‘날 잘 치워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비앙카는 입술 한쪽을 실룩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르밀라를 다시 바닥까지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지금이야 우아한 척하고 있지만 아르밀라는 비앙카와 다를 바 없다. 아니, 비앙카보다 못하다.

    레나토에선 더럽게 몸을 굴려 놓고선 왕녀 행세를 하다니. 왕녀의 과거를 알면 다들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게 해 주겠어.’

    두란테는 왕녀에게 백합 구근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돌려 말하면, 구근 말고는 왕녀에게 별 볼 일이 없다는 뜻일 터.

    그 뒤에 왕녀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을 테니, 그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란테는 남이 망하는 것을 재미있는 관전거리로 여기곤 했으니까.

    “뭐 해, 비앙카. 안 따라와?”

    “저는 백작님을 모실게요.”

    어느덧 기도가 끝나고, 리카르도에게 접근하려던 줄리아는 비앙카의 대꾸에 인상을 썼다. 비앙카에게 짜증을 내던 줄리아는 리카르도가 기도실 밖으로 나가자 몸을 홱 틀었다.

    “전하, 대공 전하!”

    비앙카는 리카르도의 뒤를 쫄쫄 따라가는 줄리아를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한때 비앙카도 리카르도에게 붙어 팔자를 필 꿈을 꾸었다. 늠름하고 말쑥한 권력자의 여인이 되어, 그의 모든 것을 제 것으로 삼고 싶었더랬다.

    하지만 리카르도 비토레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는 원래 여자를 돌처럼 보았다. 사람을 무시하는 건 예사고, 몸을 들이대면 경멸하며 내쳤다.

    그랬던 대공이 아르밀라를 잃고 완전히 미쳐 버렸다. 여자에게 관심 하나 없더니, 아르밀라에게 푹 빠져서는 아예 허우적거렸다.

    대공은 아르밀라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도 제정신을 못 차렸다.

    미친놈에게는 다가가지 않는 게 목숨을 보전하는 법이다. 아르밀라가 사라진 이후 비앙카가 죽은 듯 엎드려 살았던 것도 다 그래서였다.

    비앙카가 줄리아라면, 리카르도에게 접근하지 않고 적당한 귀족 사내와 혼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철부지 줄리아는 리카르도의 껍데기와 지위에 홀딱 반해 있었다. 그녀가 리카르도에게 어떤 굴욕을 당하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비앙카는 뻔하디뻔한 촌극을 보느니, 두란테에게 달라붙는 것을 택했다.

    줄리아가 망신을 당하는 걸 구경하는 것보단 왕녀인 척 고상 떠는 아르밀라를 잔뜩 봐 두고 싶었다.

    그래야, 아르밀라를 망가뜨렸을 때의 희열이 더 클 테니까.

    * * *

    “소피, 구근 상자를 가져와.”

    미사가 끝나고서 두란테를 부른 미라벨은 소피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자 응접실에 앉아 한쪽 다리를 달달 떨던 두란테가 목을 길게 빼었다.

    “구근이 있습니까? 안 가져오신 줄 알았습니다만.”

    “대외적으론 그렇지. 백작에게만 특별히 보여 주는 거요.”

    미라벨의 웃음 섞은 대답에 두란테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영광입니다, 왕녀님.”

    두란테는 소피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백합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미라벨은 그의 노골적인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고서 미소를 지었다.

    “백작은 ‘요정의 숨결’ 구근을 본 적이 없소?”

    “예, 아직.”

    “막상 보면 실망하실지도 모르겠군.”

    “실망이라니요!”

    두란테는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발갛게 상기된 중년 남성의 얼굴을 지그시 보던 미라벨은 소피의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아르밀라 앞에서는 거만하기 짝이 없던 인간이 수줍어하는 꼬락서니에 구역질이 날 것 같던 참이었다.

    “왕녀님, 가져왔습니다.”

    소피는 미라벨과 두란테 사이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두 개의 상자를 가지고 와서 자신의 옆에 내려놓았다. 각각 사파이어와 에메랄드로 장식된 상자였다.

    상석에 앉은 미라벨이 손짓하자, 소피가 조심스럽게 사파이어 상자를 꺼내 걸쇠를 풀었다.

    “오오, 이것이…….”

    두란테는 반사적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상자 안에는 작은 양파처럼 생긴 구근 다섯 개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이것이, ‘요정의 숨결’의 구근입니까?”

    구근을 본 두란테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겉보기에는 여느 백합 구근과 다를 바 없는 모양에 내심 당황한 듯했다.

    “실망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구근을 땅에 심고, 개화해야 그 진가를 알게 되지.”

    “그렇군요.”

    미라벨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두란테를 유심히 살폈다.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구근의 평범함에 혹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미라벨은 동요하지 않고 소피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의 신호에 소피가 구근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에메랄드 상자를 열었다.

    상자가 열리자마자 진하고 달콤한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졌다.

    다디달지만, 전혀 독하지 않고 황홀해지는 향기였다. 향기를 맡은 순간 긴장하고 있던 온몸의 근육이 나른하게 풀리고 몸이 구름 위로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두란테는 몽롱한 얼굴로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새하얀 백합 한 송이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요정의 숨결’이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세골린데에서 가져온 것이라네. 시들지 않도록 특수 방부 처리를 하였지. 원래는 황제 폐하께 진상하려 챙겨 온 것이었는데, 이젠 폐하의 무덤에 바치게 되었군.”

    미라벨은 다소 씁쓸해하며 설명했다. 그러나 두란테는 그녀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꽃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까 그 구근을 심으면, 이게 핀다는 말씀이시지요?”

    두란테는 군침까지 삼키며 말했다. 미라벨은 그의 눈에 일렁이는 탐욕을 읽고서 상자를 닫았다.

    “그래.”

    “부디 제게, 이 구근을 넘겨주십시오. 값은 부르시는 대로 치르겠습니다.”

    “10만 브라헤.”

    “그거면 됩니까?”

    “그래, 구근 한 개에 10만 브라헤면 되네.”

    “예? 한 개에요?”

    미라벨이 부른 가격에 두란테가 기함하였다. 구근 한 개에 10만 브라헤라면, 다섯 개를 모두 사면 50만 브라헤를 내야 한다.

    두란테가 리카르도에게 빌린 돈과 은행에서 빌린 돈을 박박 긁어모아야 겨우 작은 구근 하나를 살 수 있다.

    두란테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그것은…… 조금 과한…….”

    “과하다고? 내가 백작에게 바가지라도 씌운단 말인가?”

    두란테가 협상을 하려 들자 미라벨이 미간을 좁혔다. 왕녀가 언짢은 기색을 비치자 두란테가 두 손을 모으며 황급히 말했다.

    “그럴 리가요! ‘요정의 숨결’ 아닙니까! 제게 구근을 살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왕녀님, 제 형편에는 조금 벅찬 듯하여…….”

    “나는 장사치가 아니네.”

    미라벨은 딱 잘라 말했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소피가 상자 두 개를 들고서 뒤로 물러났다. 미라벨은 미련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상자를 보는 두란테에게 못을 박았다.

    “협상은 없어. 10만 브라헤도 세골린데로서는 큰 부담을 감수하는 가격일세. ‘요정의 숨결’의 구근을 외부에 돌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나 아는가?”

    “알지요, 잘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다니 실망스럽군. 백작이 내게 호의를 보여 주었으니, 나도 그 보답으로 호의를 베푼 것이거늘.”

    “예, 하지만 그…… 가격이…….”

    “싸구려 백합 구근을 사고 싶거든 다른 상단에 가서 알아보게나.”

    미라벨은 말을 마치고서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왕녀의 단호한 태도에 두란테는 우물쭈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라벨은 마지막까지 왕녀에게 말을 걸 것처럼 미적거리는 두란테를 보고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차가 식었군.”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윽고 두란테가 인사를 하고서 사라지자 미라벨은 소피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소피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미라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대는 준비되었다.

    이제 달콤함에 취한 자의 몰락을 구경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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