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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05화 (106/120)
  • 105화

    “생각보다 빠르군요.”

    미라벨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리카르도는 그녀의 반응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는다 싶을 때, 그가 돌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어깨를 들썩이더니 거센 기침을 하였다.

    “쿨럭……!”

    기침을 하던 리카르도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샜다. 그의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본 미라벨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리카르도!”

    놀란 미라벨이 다가가려 하자, 리카르도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하였다. 그에게 거부당한 미라벨은 당황하여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리카르도가 그녀를 밀어 내다니.

    “전하, 어서 물약을!”

    “이봐 리카르도! 괜찮나?”

    우고의 다급한 음성과 발레리오의 외침이 미라벨의 귓전에서 웅웅 울렸다. 미라벨은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하고 리카르도를 지켜보았다.

    리카르도의 두꺼운 흉곽이 고통으로 꿈틀거리고 거친 숨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가 통증을 참지 못하고서 내는 신음에 미라벨의 등줄기가 저릿해져 왔다.

    ‘뭐지?’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아주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해.’

    리카르도를 빤히 보던 미라벨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의술에 대해 아는 바 없지만, 그의 상태가 범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리카르도를 위시한 모두가 그녀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다.

    아까 발레리오가 리카르도에게 화를 냈던 것도, 필시 그의 상태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큭!”

    생각에 잠겨 있는 미라벨의 시야 속에서 리카르도가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그것을 보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회복 중이라고? 이게?”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우고는 평이한 어조로 대꾸하며 리카르도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말마따나, 리카르도의 안색이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나아졌다.

    하지만 미라벨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불안의 파도가 치고 있었다.

    “대공은 대체 무슨 병에 걸린 거죠? 낫기는 하는 건가요?”

    “……미사 말인데.”

    평정심을 찾은 리카르도가 미라벨의 질문을 못 들은 척 흘려 넘겼다. 그에게 다시금 추궁하려던 미라벨은 볼 안쪽 살을 잘근 씹었다.

    리카르도가 선을 긋는다.

    그에게 다가가려는 미라벨을 저지하고, 그의 상태를 알려 주려 하지 않는다.

    이건 모두 미라벨이 원하는 바였다. 그러니, 왜 내게 거리를 두느냐고 무어라 할 순 없다.

    미라벨은 이 거리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에게로 향하려는 눈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래요, 미사 얘길 하던 중이었죠. 그럼 당장은 미사와 장례식만 하게 되는 건가요?”

    미라벨은 발레리오에게 질문을 던졌다. 굳은 얼굴로 리카르도를 보고 있던 황태자는 미라벨의 시선이 꽂히자 그녀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네, 그렇게 될 겁니다. 귀족회의 뜻이라지만, 두란테의 뜻일 테지요.”

    “백작의 권력이 크다 해도 황제의 즉위식을 무작정 미룰 순 없을 텐데요. 이유가 뭐라던가요?”

    “황태자의 자질이 의심된다더군요.”

    “근거는요?”

    “근거라고 할 것도 딱히 없어요. 우습지만, 두란테가 운을 떼기만 해도 귀족회가 움직이니까요.”

    발레리오는 씁쓸히 말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대로는 왕녀님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는 날이 늦춰질 것 같군요. 어쩌면 못 지킬 수도 있겠습니다.”

    “약한 소리를 하시기엔 일러요. 전하의 지지 세력은 없나요? 황후 폐하의 친정이라든가.”

    “아달베르토가가 이미 작업을 끝냈어.”

    발레리오와 미라벨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우고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들 대부분은 황후 폐하가 돌아가신 이후로 줄곧 촌구석에 처박혀 있지. 수도 근처에 얼씬도 못 하고 있으니 지지 세력을 일굴 수 있을 리가.”

    “그럼 제국에는 아달베르토가를 이길 가문이 없다는 건가요?”

    “비토레가를 제외하곤, 그렇지.”

    미라벨은 팔짱을 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팔을 천천히 두드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비토레가가 움직이면 되겠네요.”

    “그래.”

    리카르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언제 아팠었냐는 듯, 곧은 시선으로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움직여 줬으면 좋겠어?”

    미라벨은 팔짱을 풀고서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을 때, 미라벨이 미소를 지었다.

    모든 패가 미라벨의 손에 있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두란테의 파멸을 위해 패를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두란테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 * *

    두란테는 오만한 얼굴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빚을 진 것은 두란테이지만, 태도로만 보면 사내가 채무가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백작님.”

    사내는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제국은행장이라는 명패를 가진 뒤로, 두란테 아달베르토만큼 그를 난감케 하는 손님도 없었다.

    두란테는 국가 예산에 맞먹는 빚을 지고서 이자를 기한에 아슬아슬하게 내었다.

    심지어 지난주에는 이자를 다 내지 못했다. 독촉장도 전부 무시하여 은행 직원들이 아달베르토가의 컨트리 하우스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보통 이 경우, 저택의 물건에 붉은 딱지를 붙이고 경매에 올리는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두란테는 은행 직원들에게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 어디 감히 아달베르토가의 재산에 손을 대려 하느냐며, 화를 내었다.

    일반적인 귀족이 이렇게 행패를 부렸다면 바로 제국은행의 감옥으로 압송한다.

    그러나 제국은행은 그럴 수 없었다.

    두란테 아달베르토는 귀족회를 휘어잡는 제국 제일의 세력가이니까.

    은행장과 약속을 잡지도 않고서 마구잡이로 찾아와, 호통을 칠 만큼의.

    “아니! 은행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소. 제국은행의 제복을 입은 놈들이 내 집에 쳐들어왔단 말이오. 이 두란테의 집에!”

    “아이고, 백작님.”

    은행장은 땀을 닦던 손수건을 내려놓고서 친절한 미소를 지어내었다.

    “저희 입장도 이해를 해 주십시오. 그게, 아달베르토가의 변제일이 지났기에 통상적인 절차를 따른 것인데…….”

    “통상적인 절차?”

    두란테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거만하게 몸을 뒤로 젖히며 말을 이었다.

    “내게 ‘통상적인’ 절차를 적용한 건가? 귀족회의 상단들을 죄다 제국은행으로 데려와 준 내게?”

    “물론 그것은 참으로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사업이 바쁘다 보면 이자 몇 푼 내는 것 정도는 깜박할 수도 있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몇 푼이 아니다.

    이미 채무가 밀릴 대로 밀려 있는 상황이다.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두란테는 생떼를 쓰고 있었다.

    은행장은 그를 당장에 내쫓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차기 황위가 두란테의 손에 달려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두란테는 황태자가 순탄하게 즉위하지 못하도록 즉위식을 일주일씩이나 미뤘다고 한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제 뜻대로 한 걸 보면, 돈은 없을지 몰라도 권력만은 확실히 쥐고 있다는 뜻이다. 은행장은 곤란해하며 입술을 축였다. 그가 별 대꾸를 하지 못하자, 두란테가 가슴을 부풀리며 외쳤다.

    “이까짓 거! 내면 될 거 아니오!”

    두란테가 호통을 치자 그를 따라온 하인이 비단 주머니를 은행장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주머니를 열어 본 은행장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번졌다.

    “백작님, 이건…….”

    “3만 브라헤요.”

    두란테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는 다리를 꼬아 소파에 몸을 파묻고서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아달베르토가에 쾌척하셨다오. 우리 상단의 투자 가치를 알아보신 게지.”

    “그러셨군요! 경하드립니다!”

    은행장이 반색하자, 두란테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지팡이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대출은 좀 더 받아야겠소. 6만 브라헤 정도?”

    “예?”

    두란테가 내세운 액수에 은행장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이미 아달베르토가가 진 빚이 13만 브라헤에 달한다.

    지금 3만을 갚았어도, 아달베르토가에는 10만 브라헤라는 빚이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다 6만의 대출을 더 받겠다니.

    “그건 곤란합니다. 더는 담보로 하실 것도 없잖습니까. 컨트리 하우스도, 부동산과 상단도 다 잡히셨으니까요.”

    “담보?”

    잘라 말하는 은행장의 거절에 두란테가 팍 인상을 썼다.

    “그게 뭐 중요하다고. 은행장이 정 그리 말한다면 백작위를 담보로 내놓겠소. 그거면 되겠나?”

    “그, 그러신다면야. 한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소. 즉위식이 열리고 나면 백작위는 아쉽지 않게 될 테니.”

    두란테는 싱긋 웃었다.

    세골린데의 왕녀가 그의 편이니, 왕녀에게 꼼짝 못 하는 대공 또한 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7만 브라헤라는 거금을 덥석 빌려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왕녀에게 ‘요정의 숨결’을 받고, 그녀를 이용해 대공을 제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만 되면, 그렇게 하여 대공을 황위에 올리면.

    나머지는 제국을 손에 넣는 것뿐이다.

    대공에게 진 빚이나 은행에서 받은 대출 같은 자잘한 문제는 더는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을 터.

    ‘인생이 이리도 쉬울 수가 있나.’

    두란테의 가슴이 미래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리할 것이라고, 두란테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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