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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04화 (105/120)
  • 104화

    “아아-.”

    소피의 음성을 따라 아이의 붉은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보랏빛 액체가 담긴 작은 은스푼이 입 안으로 쏙 들어가자, 귀여운 얼굴이 울상을 쓰듯 찌푸려졌다.

    “써어.”

    “먹어야 안 아파요. 루체도 약 잘 먹잖아요?”

    소피가 샤를을 달래면서 루체를 가리켰다. 그러자 루체가 보란 듯이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쓴 게 몸에 좋대요!”

    아직 볼에 멍이 남아 있는 루체가 웃자, 샤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샤를. 자, 상이야. 약 잘 먹었으니까.”

    미라벨은 샤를의 입에 사탕을 쏘옥 넣어 주었다.

    “히힛.”

    아이의 볼이 사탕의 크기만큼 볼록 튀어나오고, 조금 전까지 투정을 부리던 입에서 즐거운 흥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못 듣던 노래네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루째가 갈쳐 조써! 요기 자잔가래.”

    “그래요? 저도 가르쳐 주세요.”

    소피는 샤를을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아이는 소피의 위에 앉아 발을 바동거리며 한 음절씩 다시 노래를 반복했다.

    샤를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던 루체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우고서 엄격히 말했다.

    “그거 아니에요. 이렇게, 음음, 음. 음, 음.”

    “움움, 움. 움!”

    아이는 까르르 웃고서는 루체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미라벨은 턱을 괴고서 두 사람의 노랫소리를 멍하니 들었다.

    얼마 전 보았던 리카르도의 모습이 좀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고통에 헐떡이던 거친 숨소리, 그리고 구겨지던 아름다운 얼굴. 곁에 있는 사람마저도 숨을 멈추게 될 만큼 선명한 고통이 전해졌었다.

    ‘내상이 아니라면 뭐였을까?’

    미라벨이 아는 리카르도는 강했다. 강하고, 또한 건강했다.

    리카르도는 웬만한 고통에도 꿈쩍하지 않았고 잔병치레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힘들어한 걸 보면, 보통 통증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때도 안색이 안 좋았지.’

    미라벨은 리카르도가 샤를의 약을 내어 주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답지 않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약이라…….’

    미라벨의 시선이 문득 협탁 위에 놓인 작은 약병으로 향했다.

    리카르도가 전해 준 보라색 약은 그가 말한 대로 효험이 있었다.

    샤를은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졌다.

    리카르도가 하루가 다르게 허약해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왜 이렇게 찝찝하지?’

    약병을 응시하던 미라벨은 이내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내었다. 그녀는 눈짓으로 시녀를 불러 명했다.

    “대공을 모셔 와.”

    “예, 왕녀님.”

    “아니, 잠깐만.”

    시녀가 공손히 인사하고 방을 나서려 하자, 미라벨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내가 가는 게 낫겠어. 소피, 샤를을 부탁할게.”

    “걱정 마세요.”

    “나두, 나두 갈래!”

    미라벨이 리카르도에게 가겠다고 하자, 루체와 놀고 있던 샤를이 엄마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미라벨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오동통한 뺨을 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공 전하는 편찮으셔. 그래서 병문안 가는 거야. 샤를은 다음에 같이 가자.”

    “또 아야 해?”

    “응.”

    “삼쵼두 이거 조요.”

    샤를은 소피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보라색 약병을 챙겼다. 아이가 약병을 소중히 내밀자, 미라벨은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샤를 약이잖아. 대공 전하는 다른 약을 드실 거야.”

    “구치망…….”

    “대신에 샤를도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줄게.”

    “웅.”

    샤를은 고개를 숙이고서 주억거렸다. 미라벨은 아이를 한 번 꼬옥 안아 주고서 몸을 일으켰다.

    * * *

    “미치지 않고서야!”

    리카르도의 방 문 앞에 도착한 미라벨은 안에서 들려오는 호통에 움찔하였다. 그녀는 당황하며 자신을 뒤따라온 시녀들부터 물렸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예, 왕녀님.”

    미라벨은 시녀들을 뒤로 물리고서 잠시 망설였다.

    리카르도의 상태가 자꾸 눈에 밟혀서 오기는 했는데, 왠지 때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다음에 올까.’

    하긴, 굳이 리카르도를 만날 이윤 없다. 그가 아프면 두란테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 그것 때문에 확인이 필요할 뿐.

    미라벨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며 몸을 틀었다.

    “왕녀님?”

    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등을 보이려는 찰나, 안에서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며 나타났다.

    “왜 안 들어오십니까.”

    조금 전 방 안에서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던 자의 음성이 이어 들려왔다. 미라벨은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였다.

    “황태자 전하셨군요.”

    “아, 혹시 들으셨습니까.”

    발레리오는 민망해하며 턱을 쓸었다. 그는 눈을 굴리다가 미라벨을 방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시지요. 리카르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를요?”

    발레리오에게 질문을 하는 미라벨의 앞에 방 안의 풍경이 펼쳐졌다. 리카르도는 창백한 낯으로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으며, 그 옆에는 우고가 앉아 있었다.

    “왕녀님.”

    우고는 미라벨이 등장하자마자 재깍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침실로 들어오던 미라벨은 치맛자락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그녀는 리카르도에게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우고에게로 틀었다.

    “……고생이 많아요.”

    “아닙니다.”

    우고는 왕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서는 침대로 몸을 돌렸다. 진료가 끝났는지, 분주하게 약병을 챙기는 그를 보던 미라벨이 입을 열었다.

    “마침 잘됐네요. 우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는데.”

    “하문하십시오.”

    “우선은, 샤를의 약 말이에요. 보라색 물약. 그건 무슨 약이죠? 일단 우고가 처방했대서 먹이곤 있는데.”

    미라벨이 물약 얘기를 꺼내자 우고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혹시 거부 반응이라도 나타났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효과가 좋달까.”

    긴장한 얼굴로 미라벨에게 물어보던 우고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럴 겁니다. 약이 떨어지거든 제게 또 언질을 주십시오.”

    “그래요…….”

    우고에게 대답을 하던 미라벨은 그가 비로소 자신과 눈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우고는 아르밀라의 얼굴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와 똑같이 생긴 왕녀를 보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긴, 두란테도 그랬지.’

    미라벨은 두란테를 떠올리며 의문을 곧 지워 내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을 얼굴보다도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과 지위로 기억한다. 우고도 두란테와 비슷한 방식으로 상대를 기억하는 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고, 혹시 황실 주치의를 잘 아나요? 마지막까지 황제 폐하를 살폈던 의원이요.”

    미라벨은 괜한 우려를 지워 내고서 우고에게 하려던 질문을 꺼냈다. 그는 느리게 눈을 끔벅이다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한때 같은 스승 아래에서 수학했었지요.”

    “잘됐네요.”

    미라벨은 상큼하게 웃고서 발레리오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과 우고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를 향해 말했다.

    “전하께선 황실 주치의의 신병부터 확보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장례식이 치러지고 나면 늦을 테니까요.”

    “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발레리오는 미라벨의 조언에 감탄하며 대답했다.

    황제가 독살당했다면, 그의 주치의부터 보호해야 한다. 그가 두란테의 사주를 받아 독살을 했건, 그게 아니건.

    의원만큼 진실에 가까운 자는 없으니까.

    “우고의 동기라니 설득하긴 한결 수월하겠어요.”

    미라벨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녀는 리카르도에게로 시선을 돌리고서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공, 아달베르토 백작에게서 차용증은 받았…….”

    덤덤하게 말을 하던 미라벨의 목소리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자신을 주시하는 리카르도의 깊은 눈빛, 그리고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수척해진 얼굴을 보던 미라벨의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왕녀가 하던 말을 멈추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발레리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왕녀님? 왜 그러십니까?”

    “내상 때문이 아니라면서요.”

    미라벨은 차마 리카르도에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우고에게 물어보았다. 질책과도 같은 질문에 우고가 난감한 듯 눈썹을 모았다.

    “회복 중이십니다.”

    “무슨 병인데요? 왜 이렇게 회복이 더딘가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미라벨은 턱을 당겨 물었다. 궁금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데, 신경이 쓰였다.

    ‘그래, 내가 알 바 아니잖아.’

    미라벨은 한숨을 쉬고서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걱정 말아요, 왕녀. 내가 아파도 당신의 계획에는 지장이 가지 않을 겁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미라벨의 귀에 꽂혔다. 리카르도였다. 미라벨이 인상을 쓰자, 그가 가슴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미사에도 참석할 거고.”

    “미사라니요?”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귀족회의 주장으로 즉위식이 일주일 뒤로 연기되었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장례식만 열릴 겁니다.”

    “그렇다면…….”

    “두란테가 움직였습니다.”

    발레리오가 전해 준 소식에 미라벨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초췌한 리카르도를 응시하였다.

    깊은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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