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우아한 걸음걸이로 응접실에 들어선 이는 미라벨 왕녀였다. 두란테는 반색을 하며 왕녀를 맞이했다.
“왕녀님! 여기서 뵙는군요!”
“대공과 의논할 게 있어 찾아왔어요. 그런데 손님이 계시니, 저는 다음에 오겠습니다.”
두란테에게 눈인사를 해 준 왕녀가 대공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녀가 미련 없이 자리를 뜨려 하자, 시종일관 느긋하게 굴던 대공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
대공은 성큼성큼 걸어가 왕녀를 붙잡았다. 그는 왕녀에게 절절매며 말했다.
“여기 있어요, 백작은 곧 갈 겁니다.”
“그런가요?”
대공의 설명에 왕녀가 두란테에게 눈길을 돌렸다.
“백작?”
리카르도의 그답지 않은 행동에 당황하던 두란테는 그녀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 예, 전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금방 끝날 얘기이지요.”
“허락이라니요?”
“그것이…….”
두란테는 양손을 비볐다. 보아하니, 대공은 왕녀에게만은 저자세로 나오는 듯했다. 조금 전 줄리아에게 보였던 것과는 판이한 태도가 그 증거였다.
‘왕녀를 이용하면 돈을 빌릴 수 있겠어.’
두란테는 때마침 나타나 준 왕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마침 얼마 전 그녀의 하녀가 손버릇 나쁘게 군 걸 두란테가 너그러이 이해해 주지 않았던가.
그때부터 왕녀는 두란테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간절히 부탁을 하면, 그를 위해 말 몇 마디 거들어 줄 수는 있을 터다.
“그것이, 제가 전하께 돈을 좀 융통해 주십사 요청을 드렸습니다.”
“빌려주지 그러세요?”
왕녀는 금액조차 묻지 않고 대공에게 말했다. 그녀의 행동에 대공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묻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왕녀는 대공을 설득할 생각조차 없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달베르토 백작은 귀족회의 원로이자 대공의 대부라면서요.”
“예, 예. 그렇습니다.”
두란테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왕녀는 말이 통했다. 그녀가 지금 나타나 주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신용이 있는 분이시니 돈을 빌려주는 건 별문제가 안 될 것 같은데요.”
“왕녀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대공도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면서도 왕녀의 말에 거절을 하지 못했다. 두란테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7만 브라헤라. 우선 3만 정도만 이자를 갚는 데 쓰고 나머지는 투자해야겠군!’
어느새 이자를 모두 갚아야겠다는 생각은 뒤로 밀려나 있었다. 당장 급한 것만 갚고, 나머지는 백합 투기에 퍼부을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투자를 해서 더 큰 돈을 벌어들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다만, 차용증은 써야겠지요?”
“당연하지요.”
왕녀의 질문에 두란테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말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새로 벌어들일 돈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대공, 보좌관에게 일러 차용증을 준비해 주세요. 나시르라면 오늘 내에도 가능하겠지요?”
“그럴 겁니다.”
“감사합니다, 왕녀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두란테는 감격하며 왕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왕녀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너무 고마워할 것 없어요, 백작.”
“하하. 예, 하면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두 분이서 편히 대화 나누시지요. 왕녀님, 나중에 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두란테는 왕녀에게 무릎을 깊이 굽혀 예를 표했다. 백합 구근을 빼먹는 데에만 써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도움을 주다니, 몹시 흡족했다. 역시 모든 건 그를 위해서만 굴러가고 있었다. 두란테는 경쾌한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 * *
“왜 빌려주라고 한 거지?”
두란테가 응접실을 나서자, 리카르도가 참고 있던 질문을 미라벨에게 던졌다. 그녀는 두란테가 앉아 있던 자리를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보고서 말했다.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미라벨은 주저 없이 대답하고서 소파에 앉았다.
두란테가 앉아 있던 자리와 동떨어진, 건너편의 소파에 앉은 그녀가 이어 말했다.
“아달베르토 백작이, 그러니까 두란테가 당신을 찾아왔다기에 온 거예요. 제 용건은 처음부터 이거였어요.”
“내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할 줄 알고 있었다고?”
“지금 파산 직전일 테니까요. 창고가 비어 가는데 여유롭게 당신한테 자기 딸을 인사시키려고 왔을 린 없잖아요.”
“내게 채무를 만들어 놓게 하려던 거였군.”
미라벨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일진 모르겠지만, 당신에게 부탁할 정도면 분명 엄청난 금액일 테죠. 두란테가 궁지에 몰렸을 때 변제를 청구하면 완전히 몰락할 만큼요.”
“확실히.”
리카르도는 수긍했다. 두란테는 제국 곳곳에 손을 뻗고 있다. 그가 당장 이자를 갚지 못한다면 망신을 당하긴 하겠지만, 그게 완전한 파멸로 이어지진 않을 터다.
하지만 대공에게 어마어마한 금액을 빚진 데다가 그걸 갚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게 널리 알려진다면.
두란테의 권력을 지지해 주던 대공가라는 날개가 찢기는 것일 테니, 그는 무너질 것이다.
“그렇지만 두란테에게 들어갈 돈이 아깝기는 하네요. 빌려주지 말라고 할 걸 그랬을까요?”
“당신이 원하는 걸 이루는 데 쓸 돈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리카르도는 피식 웃었다. 한 나라의 왕녀이기까지 한 그녀가, 그의 창고 걱정을 해 준다는 게 즐거웠다.
미라벨과 대화를 나누고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리카르도는 7만 브라헤가 아깝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돈은 별 의미가 없었다.
죽을 때까지 써도, 그리고 그의 후대의 후대까지 써도 닳지 않을 만큼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밖에 없었다.
당장 레나토만 해도 그랬다.
리카르도가 아달베르토령에 굳이 기사를 보내고 곡식을 공급받는 건, 폭설과 그로 인한 피해를 달리 해결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는 한겨울에 레나토까지 곡식을 유통할 길이 없었으니까.
수만 브라헤를 낸다 해도 폭설을 멈추게 하고 눈을 헤쳐 곡식을 레나토까지 조달할 순 없었다.
또한 얼마를 낸다 해도 미라벨의 마음도 돌릴 수 없다.
“고마워요.”
그러니 고작 7만 브라헤에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비록 그녀의 안중에 그가 없다 해도 리카르도는 만족했다.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걸 허락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행복이었으니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미라벨에게 대답을 해 주던 리카르도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는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하고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헉…….”
“리카르도?”
두란테의 최후를 그리며 옅은 미소를 짓던 미라벨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편안해 보이던 리카르도가, 돌연 창백하게 질려 갔다.
“왜 그래요!”
“우고, 우고를…….”
“알았어요.”
미라벨은 속삭이듯 말하는 리카르도의 요청에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줄에서 손을 놓기가 무섭게, 리카르도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쳤다. 그의 커다란 상체가 동그랗게 말리고, 고통을 참으려는 듯이 몸이 들썩였다.
“헉, 허억…….”
리카르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자, 미라벨이 그의 손을 잡았다. 바닥을 짚고 있는 그의 손등에 두꺼운 핏줄이 돋아 있었다.
“왜 그래요. 어떻게, 치유 마법을 걸어 줄까요?”
“소용없…….”
“전하!”
리카르도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는 때, 우고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는 리카르도의 상태를 보자마자 진료 가방에서 물약병을 몇 개 꺼내어 약을 조합했다.
“적어도 사흘간은 절대로 움직이시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우고는 환자를 책망하듯이 말하고서는 약병을 흔들었다. 그러곤 리카르도의 턱을 잡고 그의 입을 벌렸다.
“전부 넘기세요. 다 삼키셔야 합니다.”
“큭…….”
리카르도는 사지를 벌벌 떨면서 우고의 약을 받아먹었다. 마치 금방 죽어 가는 맹수와도 같은 그의 모습에 미라벨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서, 어서 침실로 모셔요!”
미라벨이 넋을 잃은 사이에 경비병들이 나타나 리카르도를 부축했다. 커다란 체구의 사내를 감당하기 위해 경비병 여럿이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이동했다. 미라벨은 응급 처치를 한 우고에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다 나은 게 아니었나요? 분명…… 조금만 몸을 사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우고는 왕녀가 제게 말을 걸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고선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환자가 원하지 않으니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날 구하다가 다쳤는데도요?”
“그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럼.”
우고는 미라벨이 더 질문을 할세라 재빨리 진료 가방을 챙겼다.
홀로 응접실에 남은 미라벨은 황망한 눈으로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