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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02화 (103/120)
  • 102화

    탁탁, 하고 검은 지팡이가 카펫을 두드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다. 응접실에서 대공을 기다리던 두란테는 초조함에 한쪽 다리를 덜덜 떨었다.

    “역시 루비 핀을 샀어야 했어요.”

    그의 옆에 앉은 줄리아가 티포트에 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 보며 한가하게 쫑알대었다.

    불과 며칠 전 마담 카트린의 의상실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면서, 그곳의 루비 핀을 계속 입에 올렸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시 의상실의 단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앙카도 그랬다고요. 그게 저한테 딱이라고.”

    줄리아는 오늘의 치장을 도와준 비앙카를 언급하며 투덜거렸다. 비앙카는 그녀가 신전 미사에 데려가겠다고 한 이후로 납작 엎드리다시피 하였다. 루비가 잘 어울린다는 얘기도 줄리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을 터다.

    두란테는 철없는 딸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쏘아보며 일갈했다.

    “조용히 해라.”

    “하지만 아버지, 그게 제 눈동자 색이랑 잘 어울…….”

    “루비 핀이든 다이아몬드 핀이든 갖고 싶으면, 입 다물고 얌전히 굴어라. 대공비가 되어야 대공 전하의 지갑을 쓸 수 있을 거 아니냐.”

    “미리 받아 쓸 순 없나요? 저는 전하의 약혼녀잖아요.”

    줄리아는 천진하게 눈을 뜨며 두란테에게 물었다. 두란테는 줄리아의 입을 손으로라도 틀어막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말했다.

    “약혼식도 안 했으면서 약혼녀는.”

    “그래도…….”

    줄리아가 아랫입술을 내밀고서 웅얼거렸다. 두란테는 이마를 짚고서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

    두란테의 아내는 줄리아를 낳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 하여 그는 아이의 양육을 유모에게 일임하였다.

    두란테에게 줄리아는 돈을 퍼붓다시피 하여 키운 딸이다.

    그는 줄리아를 아낀다기보단, 그녀에게 투자했던 돈을 아꼈다. 그러니 줄리아를 시집보낼 때는 본전을 뽑을 수 있어야만 했다.

    현재로서는 리카르도가 가장 유망한 혼처다.

    비록 그가 미치광이가 되어, 다른 대체품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었다.

    “날 찾아왔다고.”

    응접실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대공이 등장했다. 자그마치 두 시간여의 기다림 끝에 겨우 성사된 만남이었다.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두란테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에게 뻣뻣하게 굴던 것과는 판이한 태도였다.

    응접실에 들어온 대공은 서늘한 눈으로 두란테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그는 두란테를 세워 둔 채로 상석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한가롭게 재킷의 소매를 정리하였다.

    두란테를 무시하는 대공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로웠다.

    고개를 들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니, 두란테는 줄리아와 함께 시선을 떨구고 기다려야만 했다.

    ‘버릇없는 새끼.’

    두란테가 뿜어내는 분노에 방 안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조차 두란테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다들 나가 있도록.”

    한참 후에야 대공이 입을 열었다. 사용인들이 우르르 응접실을 나가고 나서야, 그는 두란테에게 손짓을 해 주었다.

    겨우 자리에 앉게 된 두란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새 더 오만해졌군.’

    누구도 두란테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다만 리카르도만은 예외였다.

    황제가 서거한 지금 황태자와 대공 두 사람이 가장 강력한 권력자였다.

    황태자야 두란테가 쳐 내면 그만일 세력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대공이 황제 버금가는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분위기가 그렇게 형성되었다.

    이 모두가 두란테의 공이었다.

    하지만 권력에 관심이 없는 대공은 자신의 지위에도 무심하기만 했다. 두란테의 공을 치하하거나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두란테는 그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때때로 두란테는 대공의 오만한 태도에 목 뒤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자신이 그의 대부인데, 기본 예의는 지켜 줘도 되지 않는가.

    “건강을 회복하신 듯해 다행입니다.”

    “그래 보이나?”

    “예? 예…….”

    “아닐 텐데.”

    대공의 무심한 대꾸에 두란테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빠르게 눈을 깜박이다가 제 옆의 여식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우리 줄리아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 보시지요? 그새 숙녀가 다 되었답니다. 줄리아, 어서 전하께 인사를 올려라.”

    “안녕하세요, 대공 전하. 줄리아 아달베르토입니다.”

    두란테의 채근에 줄리아가 일어나서 곱게 인사를 했다. 한 송이 장미처럼 화사하게 꾸민 줄리아는 겉으로 보기엔 흠잡을 곳 없었다.

    줄리아는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단정히 모으고서 수줍게 말했다.

    “저어, 정말 뵙고 싶었어요.”

    “…….”

    “제가 그동안 몇 번인가 편지도 보내 드렸는데. 혹시 못 받으셨나요? 한 번도 답장이 오질 않더라고요. 레나토에 폭설이 심해서 편지가 잘 가질 않았나 봐요.”

    대공은 조잘거리는 줄리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급한 용건이 이것이었나?”

    대공은 툭 내던지듯 말했다. 졸지에 ‘이것’이 된 줄리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 전하. 줄리아는 전하를 뵈려고…….”

    “미사 때 보지.”

    “전하!”

    대공이 몸을 일으키며 대화를 잘라 내자, 줄리아가 그에게 달려갔다. 가냘픈 몸으로 저보다 한참은 큰 사내에게 달려든 줄리아가 그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이대로 가시게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치워.”

    음산하고 오싹한 음성에 리카르도에게 매달리던 줄리아가 흠칫하였다. 그녀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자, 그 꼴을 내내 지켜보던 두란테가 한숨을 쉬었다.

    ‘글렀군.’

    혹여나 미인계가 통하지 않을까 싶어 데려왔건만.

    줄리아의 외모는 리카르도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제 딸의 행동거지에서 줄줄 새어 나오는 경박함도 한몫한 듯했지만, 두란테는 그 부분은 애써 외면했다.

    “줄리아,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있거라.”

    “하지만 아버지. 전 이제 막 전하를 뵈었는걸요.”

    “인사드렸으니 됐잖니. 가 있어.”

    두란테가 혀를 차며 말하자 줄리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대공과 두란테에게 인사를 하고선 응접실을 나섰다.

    줄리아가 나간 응접실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적막이 감돌았다.

    두란테는 괜히 그녀를 데려왔다는 생각을 하며 침을 삼켰다.

    “용건이 끝난 게 아니었나.”

    리카르도가 먼저 침묵을 깨자, 두란테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안도의 숨을 쉬며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줄리아를 내치기 위해 일어서 있던 대공이 한 손으로 소파를 짚고 있었다.

    “줄리아가 아직 어려 철이 없습니다. 전하를 연모하는 마음이 앞서 무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

    “그게 다라면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

    대공이 대화를 뚝 잘라 내고 등을 보였다. 이대로 만남이 종료되려는 것 같아, 두란테는 조바심을 내며 외쳤다.

    “기사를 다시 안 보내셨지 않습니까!”

    “……뭐?”

    두란테의 외침에 응접실의 문으로 걸어가던 대공이 천천히 몸을 틀었다. 그의 서슬 퍼런 시선에 두란테가 숨을 들이켰다.

    “기사라니?”

    “아달베르토령를 지키던 레나토의 기사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이는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약속입니다.”

    “레나토에서 기사를 보내지 않았으니, 아달베르토에서는 곡물을 보내 주지 않겠다는 건가.”

    “그, 그게 약속이니까요.”

    두란테는 쿵쾅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그가 오늘 대공을 만나러 온 건 줄리아를 선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장 막혀 있는 자금줄을 어떻게든 풀어내기 위해서였다.

    장기적으로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요정의 숨결’ 백합 구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얻어 내기 위해선 왕녀를 구슬려야 한다.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언제 성공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두란테는 구근을 얻어 내기 전에, 당장 내야 할 이자부터 수습해야 했다.

    그는 백합에 투자를 하면서 상당한 금액의 대출을 받았다. 그 이자는 점점 감당하기 어렵게 불어나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값나가는 물건을 은밀히 내다 팔고, 사치를 줄여 돈이 새어 나가는 구멍을 막았는데도 쉽지 않았다.

    한 달을 겨우 버텨 냈다 싶으면 다음 변제일이 무섭도록 빨리 돌아왔다.

    두란테가 필요한 금액은 웬만한 귀족이 선뜻 내어 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대공 정도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전하, 전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어도 곡물은 보내 드릴 겁니다. 전하께서 약간의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요.”

    “호의?”

    두란테의 이야기에 대공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심중을 파헤치려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에 두란테의 손바닥에 땀이 뱄다.

    “전하, 혹시, 제게 7만 브라헤를 빌려주실 수 없는지요?”

    “7만 브라헤라고? 백작, 어디 나라라도 세우려는 건가?”

    대공은 두란테가 제시한 금액에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브라헤는 제국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 1브라헤로 1킬로그램의 황금을 살 수 있었다. 그러니 7만 브라헤는 그만큼의 황금을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두란테도 처음부터 이렇게 감당 안 되는 채무를 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건 모두 자고 일어날 때마다 이자가 무섭게 불어난 탓이었다.

    아달베르토령에 폭설이 내려 백합 농사가 망하지만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었겠지만.

    운이 지독히도 따라 주지 않았으니, 어쩌겠는가.

    “예, 부디…….”

    “그건 어렵겠는데. 그 돈으로 곡물을 사고 말지.”

    역시나 대공은 일언지하에 두란테의 청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순순히 물러날 순 없었다.

    두란테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설득할 말들을 쥐어짜려 했다.

    “전하, 빌려만 주신다면…….”

    “아달베르토 백작이 와 있었군요.”

    두란테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두란테는 응접실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구세주를 만난 양 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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