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두란테를 보내자마자 리카르도에게 온 미라벨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샤를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를 봐 줘서 고마워요.”
“언제든지.”
리카르도는 짤막하게 대답하곤 미라벨의 곁에 섰다. 그는 침대 옆의 협탁에 손을 짚고서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폐를 쥐어짜 호흡하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던 그가 태연한 음성을 지어내었다.
“샤를이 아팠어.”
“또요?”
무심코 리카르도를 올려다보던 미라벨이 흠칫하였다. 방에 들어설 때부터 파리해 보이던 그의 얼굴이 이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요? 아직 회복이 덜 돼서 그런 건가요?”
“이걸…… 이 약을, 샤를에게 먹이도록 해.”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 바지의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투명한 약병에는 보라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액체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 탓에 단순한 물약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게 뭐죠?”
“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리카르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서는 무너지듯이 옆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도록 힘겹게 숨을 쉬었다.
리카르도의 상태는 심히 좋지 않았다. 아팠다고 한 건 샤를인데, 겉으로 보기에 의원이 필요한 건 샤를이 아니라 그 같았다.
“대공?”
“……라고.”
“네?”
“리카르도라고, 해 줘.”
리카르도의 요청을 들은 미라벨은 오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고작 이름으로 불리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토록 간절히 말하는 걸까.
지금 리카르도는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하고 난 사람처럼 기진맥진해 있었다. 미라벨은 인상을 쓰며 그를 살폈다.
‘내상이 다시 도졌나?’
그나마 최근에는 제법 나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사이에 증상이 악화된 모양이었다.
미라벨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리카르도. 우선 우고를 부를게요. 눈 좀 붙이고 있어요.”
리카르도를 바라보던 미라벨이 설렁줄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가 줄을 잡아당기려 하자, 축 늘어져 있던 리카르도가 앓는 소리를 내고서 몸을 일으켰다.
“부를 거 없어.”
“여기엔 샤를 약밖에 없잖아요. 당신도 약을 먹어야죠.”
“나는 곧 괜찮아질 거야.”
리카르도는 소파의 손잡이를 힘주어 쥐었다. 그러곤 한 단어씩 꾹꾹 누르듯이 말했다.
“점점, 익숙해질, 거야.”
“익숙해지다뇨? 뭐가요?”
낮게 침잠해있던 리카르도의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반사하는 눈동자는 미라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처음이라 그래.”
“뭐가 처음인데요?”
미라벨은 약병을 꼬옥 쥐며 말했다. 아까부터 리카르도가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 가질 않았다.
그녀는 리카르도의 눈동자를 녹여 낸 것 같은 보라색 액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약은 또 뭐고…….”
“매일 한 방울씩 샤를에게 먹여. 아침이 좋겠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방울씩 꼭 먹여. 절대 잊으면 안 돼.”
“알았어요.”
미라벨은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리카르도는 샤를을 아낀다. 그는 아이가 아팠을 때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의 약을 챙기는 데에 그가 이렇게까지 열성을 보이는 게 왠지 이상했다. 이 약이 뭐길래, 몇 번씩 강조하는 걸까.
“우고의 처방인가요?”
“……그래.”
리카르도는 미라벨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러고서는 아주 길고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미라벨은 리카르도가 천천히 제 호흡을 찾아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햇살 속에서 흩어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뭐지?’
리카르도를 바라보던 미라벨이 약병을 쥔 채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미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약병을 두근거리는 가슴에 대자, 잔잔하던 불안감이 거세게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하지만 미라벨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불안함이 무엇 때문인지조차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실은 아까, 샤를이 피를 토했어.”
“뭐라고요?”
리카르도의 말에 미라벨의 심장이 덜컹였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샤를을 살폈다.
“왜 날 바로 부르지 않았어요? 우고는 뭐라고 했나요? 바로 치료는 한 거예요?”
“우고를 불렀고, 약도 먹였어. 앞으로 그 약만 꾸준히 먹이면 괜찮아질 거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건강해질 거야.”
“……고마워요.”
미라벨은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리카르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인사에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리카르도의 미소를 본 미라벨의 눈가가 움칠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
미라벨은 불쑥 찾아온 손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질문에 갑자기 나타난 손님인 발레리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귀빈이 어디에 계시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럼 제가 아달베르토 백작을 불렀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예, 실은 그래서 왔습니다.”
문가에 서 있던 발레리오가 본론을 꺼내려 미라벨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두 사람의 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발레리오가 미라벨에게 손을 내밀려 하자, 그녀의 곁에 있던 리카르도가 매섭게 말했다.
“거기까지 해.”
리카르도의 저지에 발레리오가 손을 내리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왕녀님께 위해라도 가할까 봐 그러나?”
“위해는 가하지 않겠지. 하지만 위험한 제안은 했잖나.”
“그랬지.”
발레리오는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리카르도에게 두란테의 음모에 관하여 말했다. 그리고 미라벨 왕녀에게 도움을 청했다고도 했다.
그러자, 그동안 잠잠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리카르도가 불같이 화를 냈다.
도움이 필요하거든 제게 말하지 그랬냐며, 왜 왕녀를 끌어들이냐며 성화였다.
왕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도움을 받겠다고 했는데도 그는 잔뜩 날을 세웠다.
리카르도가 선명하게 거부감을 드러냈기에 발레리오도 그녀를 더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왕녀가 두란테의 컨트리 하우스를 불시에 방문하고 급기야 그를 황궁에 초대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쯤 되니 발레리오는 마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장례식이 코앞이다.
체면치레나 하며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 대답을 들으러 오신 거로군요.”
미라벨은 두 남자를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그녀는 깊이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고서는 생각에 잠겼다.
보아하니, 황태자와 리카르도는 격의 없는 사이 같았다.
애초에 미라벨의 대답을 들으려고 리카르도의 방으로 찾아온 걸 보면, 둘 사이에 비밀도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나도 굳이 돌려 말할 필욘 없겠지.’
미라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두란테를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도 찾아뵈려던 참이었어요. 대공께도 제 결심을 말씀드리려 했는데, 마침 잘되었네요.”
미라벨의 조곤조곤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던 리카르도가 인상을 썼다. 그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황태자의 제안이라고 해서 꼭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닙니다, 왕녀.”
“제가 원하는 거예요.”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염려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게 마침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는 것이기도 해서요.”
“그럼…….”
발레리오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미라벨은 그에게 시선을 돌리고서 말했다.
“아달베르토 백작이 제가 아끼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했습니다. 그래 놓고 발뺌을 했죠.”
미라벨은 서늘하게 웃었다. 루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던 두란테를 떠올린 그녀의 표정이 겨울 호수처럼 차갑게 굳었다.
“그가 안하무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선을 넘었어요. 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미라벨은 샤를에게서 몸을 틀었다. 그녀는 곧은 자세로 서서 선언하듯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저는 전하의 편에 서겠습니다. 다만…….”
미라벨은 느리게 숨을 골랐다. 그녀는 황태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신다는 조건하에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뭘 원하십니까?”
“두란테 아달베르토의 완전한 몰락.”
미라벨의 푸른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녀는 서늘한 어조로 말을 마쳤다.
“저는 그가 완전히 무너지길 원합니다.”
왕녀의 요구를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던 발레리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저도 원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같은 배를 탄 거로군요.”
황태자와의 대화에 점을 찍은 미라벨이 리카르도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대공께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리카르도는 지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발레리오와 미라벨을 번갈아 보고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난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뭘 하든, 아무 관심도 없어요.”
리카르도를 바라보던 미라벨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리카르도에게 정쟁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체념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왕녀는 내가 함께하길 원합니까? 두란테의 몰락에 내가 함께했으면 해요?”
리카르도의 질문에 미라벨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그녀는 주먹을 틀어쥐고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해요.”
“그럼 나도 원해.”
리카르도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미라벨을 뚫을 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나도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