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리카르도는 심각한 얼굴로 진찰을 받는 샤를을 살폈다.
침대에 앉은 그의 넓은 품 안에는 작은 체구의 아이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걱정스레 샤를을 보던 리카르도의 보랏빛 눈동자가 우고에게로 향했다.
“무슨 병인지 알겠…….”
“켈록!”
우고에게 질문을 하려던 리카르도는 신속하게 아이의 입가에 하얀 거즈를 갖다 대었다. 하얀 천이 빠른 속도로 붉게 물들자, 리카르도는 크게 가슴을 들썩였다.
“무슨 병인지 알겠나?”
“짐작 가는 것은 있습니다.”
리카르도의 호출을 받고 온 우고는 주름이 깊게 팬 눈가를 문질렀다.
환자 앞에서는 항상 확신을 담고 있던 음성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참으로 이상해요. 왕자님께서 그 병에 걸리셨을 리가 없는데.”
“무슨 병이길래 그러지?”
“그게…….”
리카르도의 초조한 질문에 대답하려던 우고가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조수를 밖으로 내보내고서 한숨을 쉬었다.
“진단을 하기 전에 우선 왕녀님께 확인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확인이라니?”
“만약…….”
우고는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만약 왕자님의 병이 제가 짐작하는 게 맞는다면, 불치병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고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리카르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잠든 아이를 꼬옥 껴안으며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불치병이라니.”
리카르도는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일시적인 증상일 수도 있잖나. 그렇지? 그래서 자네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리카르도의 추궁에 우고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샤를의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리카르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적어도 일시적인 증상은 아닙니다. 왕자님의 핏줄 때문일 테니까요.”
“핏줄이라니? 그럼 유전적인 문제란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리카르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가 목소리를 키우자 우고가 조심스레 말했다.
“전하,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추측입니다. 확실한 건 왕녀님께 얘기를 들어 봐야…….”
“왕녀는 내게 왕자를 돌봐 달라 부탁했다. 그녀에게 아들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얘기만 불쑥 할 순 없어.”
“하지만, 전하.”
“말해. 이 아이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리카르도의 단호한 태도에 우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공에게 샤를 왕자가 각별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장담할 정도로 깊이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우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는, 아마도, 제국 황족의 핏줄을 이어받으신 것 같습니다. 각혈은 그 때문인 것 같고요.”
우고의 대답에 리카르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충격받았다기보다는 의아해한다는 것에 더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는 턱을 가만히 쓸다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게 왜?”
“놀랍지 않으십니까?”
“그딴 것보단, 그게 어째서 샤를이 각혈한 이유가 되는 건지가 궁금한데. 황족이 피를 토하는 불치병을 앓는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부터도 그런 적이 없고.”
“그야 전하께서는 선대 대공 각하의 곁에서 자라셨으니까요.”
리카르도는 우고의 설명에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그가 마저 말하라는 듯이 손짓하자, 우고가 말을 이었다.
“황족은 마력이 안정화되도록 태어났을 때부터 유년기까지 꾸준히 부계의 마력 영향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몸 안에서 마력이 날뛰게 되지요. 각혈은 초기 증상입니다.”
“황족의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자라야만 한다는 건가.”
“예, 황족의 아이가 아버지를 따르는 건 생존 본능이지요. 전하께서 어린 시절, 선대 대공 전하를 유난히 따르셨던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니라면?”
“예?”
“아니. 아버지가 아닌 자의 마력도 안정화에 도움이 될 수 있나?”
“그렇긴 합니다. 성인 남성의 마력이 아이의 마력이 폭주하는 걸 눌러 주는 원리라서요.”
리카르도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우고는 그의 반응을 살피다가 이어서 설명했다.
“왕자님께선 황족 남성의 마력에 노출되지 못한 채로 성장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몸에서 마력이 마구 날뛰는 것이겠지요. 각혈은 그 증상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게 더 심해진다면…….”
“그렇다면?”
우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죽음.
아버지의 곁에서 자라지 못한 황족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다.
그게,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의 최후였다.
‘그렇게 둘 순 없어.’
리카르도는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
그가 미라벨에게 버림받고서도 꾸역꾸역 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샤를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신 때문에 죽게 된다니.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샤를은 이미, 리카르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탄생을 축복받아야 마땅한 사랑스러운 아이는 잉태되었을 순간부터 시련을 겪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어머니의 몸에서 그를 떼어 내려 하였으니까.
샤를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 힘겹게 자라나, 겨우 태어났다.
그리고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성인도 감내하기 힘든 고열에 시달렸다고 했다. 때로는 그보다도 더 자주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을 터.
아이에게 그런 고난을 겪게 한 것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이건만.
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의 곁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이유로 단명하게 될 거라니.
이건 불공평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리카르도는 목이 졸린 음성으로 말했다.
죽어 마땅한 건 자신이건만, 샤를에게 죽음의 문이 열려 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리카르도는 절박한 표정으로 우고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샤를을 구할 수 있지? 방법이, 방법은 없는 건가?”
리카르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거대한 몸이 공포에 휩싸여 떨려 왔다.
“샤를을 죽게 둘 순 없다. 이 아이는 살아야 해. 살아서, 행복해져야만 해.”
“만약 왕자님께서 정말로 황족의 핏줄이시라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다만, 그건 전하께 커다란 부담이 될 겁니다. 그러니 사실상 방법은 없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니, 난 뭐든 할 거다.”
리카르도는 주저하는 우고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보라색 눈동자를 불태우며 입을 열었다.
“샤를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
* * *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에 붉은색 치마가 홱 날아올랐다. 붕 떠올랐던 치마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치마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거리는 레이스 바지와 속치마까지 휙휙 내던져졌다.
회색 머리의 시녀는 여기저기에 흩어진 옷을 바쁘게 주웠다.
“짜증 나! 입고 갈 게 하나도 없잖아!”
방 주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속치마를 줍던 비앙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줄리아의 투정은 한두 번 들은 게 아닌데도, 영 적응이 안 됐다. 그녀는 애써 살갑게 웃으며 침대 위에 펼쳐진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이건 어떠세요? 아가씨의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해 줄 거예요.”
“이런 후진 디자인을 황궁에 입고 가라고? 대공 전하께서 날 뭐로 보시겠어!”
줄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비앙카가 건넨 드레스를 집어 던졌다. 비앙카는 내동댕이쳐진 코랄 드레스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유행이 하루 만에 갔다는 거야?’
줄리아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 드레스를 사야만 숨통이 트일 것 같다고 앓는 소리를 해 댔다. 그런데 손에 넣자마자 촌스럽다고 하다니.
비앙카는 짜증이 이는 것을 꾹 누르고서 다른 드레스를 골라 보였다.
“그럼 이건요? 진주 장식이 우아해서 아가씨의 미모를 한결…….”
“그런 걸 입고 가느니 차라리 죽겠어!”
줄리아는 비앙카가 내민 드레스를 밀치며 날카롭게 외쳤다. 거친 손길에 비앙카의 뺨에 손톱자국이 남았다.
“아!”
비앙카가 뺨을 감쌌지만 줄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비앙카를 노려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엄살 피우지 마. 조금 긁힌 거 가지고. 뺨은 퉁퉁 부어서 와 놓곤 왜 나한테 와서 엄살이람?”
줄리아의 말마따나 비앙카의 양 볼은 발갛게 부어 있었다. 비앙카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뺨을 매만지자, 줄리아가 투덜대었다.
“아휴, 아버진 왜 얠 신전에 데려가라고 하시는 거야? 이 꼴로 데리고 가면 내가 하녀를 팬다는 소문이나 날 텐데.”
“절대 고개를 들지 않을게요. 그러니 데려가 주세요. 네?”
비앙카는 마음을 졸이며 말했다.
루체를 납치한 게 허사로 끝나, 두란테에게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맞았다.
황궁에서 돌아온 두란테는 비앙카를 두들겨 패고서 저택 밖으로 쫓아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비앙카는 눈물로 호소하며 두란테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그러면 백작님께서 원하시는 걸 손에 넣게 해 드리겠다고 하여 겨우 저택에 남았다.
그러니 신전에는 꼭 따라가야 한다. 가서, 어떻게든 아르밀라를 끌어내릴 빌미를 찾아내야만 했다.
비앙카는 줄리아의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필사적인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데려가 주신다면 아가씨께서 시키시는 건 다 할게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비앙카의 행동에 움찔하던 줄리아가 순종적인 말에 우쭐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하녀의 눈빛에 충심 따윈 없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