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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99화 (100/120)

99화

미라벨은 응접실에 들어서는 두란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소 한 손에 늘 들고 다니던 지팡이도 없이 나타난 걸 보니, 어지간히 급히 온 모양이었다.

“부르셨다기에 왔습니다.”

왕녀의 시선을 느낀 두란테가 공손히 예를 표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미라벨은 사납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급히 불렀는데 와 줘서 고맙네. 앉지.”

“예, 왕녀님.”

두란테는 쭈뼛거리며 미라벨이 권한 대로 소파에 앉았다.

차가 준비되는 동안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왕녀가 크게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는데, 태연하게 구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미라벨은 그를 관찰하다가 능청스레 물었다.

“왜 그러지? 어디가 불편한가?”

“아, 아닙니다.”

두란테는 왕녀의 질문에 퍼뜩 고개를 들고서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라벨이 차를 마시자 그도 그녀를 따라서 찻잔을 들었다.

“오늘 백작을 부른 건 사과를 하기 위함이네.”

“……예?”

마시던 차를 대충 목울대로 넘기던 두란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왕녀가 살가운 미소를 짓자 사레가 들어 캑캑대었다.

왕녀는 두란테가 가쁘게 숨을 쉬는데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예의상 건네는 걱정의 말 같은 건 일절 하지 않았다.

도리어 두란테의 행동이 언짢은 것처럼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눈치를 본 그가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를 닦았다. 기름진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두란테는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한데 제게 뭘…… 사과하시겠다는 건지.”

“아까 내가 아달베르토가의 컨트리 하우스에 갔거든. 백작에게 초대받은 게 생각이 나서 말이야.”

“집사에게 들었습니다.”

“백작이 하도 권했기에, 잠시 짬을 내어 간 것이었는데. 내가 언질도 없이 간 탓에 빈집을 방문한 셈이 되어 버렸지 뭔가.”

“아……. 괜찮습니다. 그러실 수도 있지요.”

두란테는 왕녀의 용건을 듣고서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라벨은 인자한 척 구는 그를 힐끗 보고서는 찻잔을 스푼으로 휘저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이상한 것을 보았어.”

미라벨은 여상하게 말하고서 두란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동공이 요동치는 것을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하녀가 거기 있더군. 그것도 채찍질을 당한 몰골로.”

“하녀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내 시녀가 백작의 저택에서 그 하녀를 발견해 데려왔네. 한데 백작은 모른다는 겐가? 자기 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왕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두란테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시녀들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긴밀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라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피를 비롯한 응접실의 시녀들이 밖으로 나갔다. 두란테는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실은, 이것 참. 남사스러운 일입니다만.”

미라벨은 고요한 눈으로 두란테를 보았다. 그가 어떻게 뱀 같은 혀를 놀리는지 지켜볼 셈이었다.

두란테가 무슨 말을 하든, 미라벨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환궁하자마자 루체를 우고에게 맡기고 두란테를 호출했다.

그를 불러들인 건 왕녀가 백작의 저택을 기별도 없이 방문하고 집을 뒤진 것을 무마시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두란테가 한 짓에 비하면야 대단치 않은 결례다. 하지만 그에게 트집 잡힐 요만큼의 틈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또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자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아르밀라에게는 대번에 드러내었던 더러운 민낯을, 과연 일국의 왕녀에게는 언제쯤 드러낼까도 싶었고.

“말해 보게.”

“예, 그것이. 그 하녀가 제 브로치를 훔쳤지 뭡니까. 그래서 조용히 불러내어 따끔하게 혼을 내었는데. 마무리가 깔끔치 못해 왕녀님께 심려를 끼쳐 드린 듯합니다.”

“…….”

“왕녀님?”

“그렇군. 브로치라.”

미라벨은 무표정한 얼굴로 두란테의 변명을 곱씹었다. 속은 용암이 들이찬 듯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래서 그건 찾았고?”

“예.”

“내가 참…….”

찻잔을 잡은 미라벨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이를 세게 물었다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참 면목이 없게 되었어. 내 하녀가 그런 짓을 벌였다니.”

“아랫것들이야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물건도 되찾았으니 괜찮습니다.”

“백작은 참으로 너그럽군. 다시 보았네.”

미라벨은 따뜻하게 말하고서 두란테에게 차를 권했다.

봄볕 같은 왕녀의 태도에 그는 안심하고서 차를 마셨다. 미라벨은 잔잔한 미소를 띠고서 두란테를 바라보았다.

씹어 먹어도 부족할 작자 같으니.

감히 루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루체에게 들은 바로는, 그는 그녀에게 아르밀라와 왕녀가 동일인이냐고 다그쳤다고 했다.

곁에는 비앙카가 있었다고 했으니 그 출처는 더 알아볼 것도 없었다.

그들이 그 사실을 확인하려는 이유야 빤했다.

두란테는 ‘요정의 숨결’ 구근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왕녀의 발을 핥는 것도 불사할 터. 그런 자이니 황궁에서 납치 사건을 벌이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미라벨은 어째서 두란테가 그렇게 눈이 벌게져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기도실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감을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직접 컨트리 하우스에 방문하고 나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파산 직전인 거겠지.’

미라벨은 아달베르토가의 컨트리 하우스를 떠올렸다.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였지만, 곧 있으면 무너질 가문이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는 게 훤히 보였다.

창가의 고급스러운 커튼은 올이 나가 있었고, 아름다운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던 자국이 곳곳에 나 있었다.

집을 보수할 여력도 안 되고, 그림도 내다 팔아야 할 만큼 재정이 안 좋다는 뜻이다.

또한 시중인들의 옷도 너덜너덜한 것이, 봉급도 꽤 오래 밀린 듯했다.

원래 미라벨은 황태자의 요청을 거절할 셈이었다.

하지만 두란테는 그녀의 사람을 건드렸다. 그것도 소중한 루체를.

그럼 얘기는 달라진다.

미라벨은 그를 무너뜨리는 데에 이제부터 적극 참여할 생각이었다.

이 길이 리카르도에게 도움이 된다니 더욱 기꺼웠다.

그가 예전의 빛나는 모습을 잃게 한 데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삼아도 좋으리라.

어찌 되었든 미라벨은 두란테가 발밑에 엎드려 비는 꼴을 보고야 말 것이다.

아르밀라에게 저질렀던 방자한 짓거리까지 모두 포함해, 자신의 죄를 진실로 뉘우치는 꼴을.

“백작이 이런 호인이라니, ‘요정의 숨결’ 구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정말이십니까?”

왕녀의 말에 두란테가 반색했다. 미라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 웃었다.

이번에는 꾸며 낸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 * *

“포짝, 폴짝!”

샤를은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려 귀처럼 쫑긋거리게 하고서 총총 뛰었다. 토끼를 흉내 내려는 것이었다. 샤를은 몇 번 더 뛴 뒤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모게?”

아이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를 감상한 리카르도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토끼?”

“웅!”

샤를은 리카르도가 정답을 말하자 활짝 웃었다. 그러고서는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뭔가를 바라는 게 명백한 모습에 리카르도는 낮게 웃었다.

“초콜릿 쿠키 줄까?”

“녜!”

“자, 이리 와 앉아.”

리카르도가 허벅지를 탁탁 치자, 샤를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다가왔다. 리카르도는 샤를을 품에 안은 뒤에 쿠키를 건네주었다.

샤를은 앞니로만 갉작갉작 쿠키를 먹는 시늉을 했다. 토끼 흉내를 내는 게 제법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제대로 먹어야지. 그래야 충치 안 생겨.”

리카르도는 샤를의 쿠키를 뺏었다가 다시 쥐여 주었다. 그는 지금 미라벨의 부탁으로 아이를 돌봐 주는 중이었다.

두 시간 전, 갑자기 나타난 미라벨이 다급한 표정으로 아이를 부탁했다.

당장 황궁 밖에 나가 봐야 한다는 영문 모를 말을 하더니, 여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뭔가 복잡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직 멀었나.’

리카르도는 애꿎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까 시계를 보았을 때와 분침의 위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더 쥬세여.”

“그래.”

시계를 멍하니 보던 리카르도는 아이의 요청에 쿠키를 집어 들었다. 샤를은 쿠키를 받고서는 냠냠 맛있게도 먹었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품에 편히 안겨 있는 아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괴롭기만 했던 마음이 평온을 찾은 듯했다.

샤를은 참 착한 아이였다. 리카르도의 걱정과 달리 아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지도 않고 얌전히 굴었다.

‘미라벨이 보고 싶은 건 내 쪽인가.’

또다시 무심코 시계를 보던 리카르도는 쓰게 웃었다.

아이도 별말 없이 잘 있는데, 그가 더 초조해져서는 미라벨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완전한 끝을 통보받은 후, 리카르도는 미라벨을 좀처럼 만나지 못했다. 밤에 그녀를 찾아가는 것도 그만두었기에 더더욱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운이 좋아 마주친다 해도, 마치 남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사실, 어색한 건 리카르도뿐이었다.

미라벨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와 재회하기 전에는 행복했다는 말이 진실이었는지,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리카르도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에게 그는 불편하기만 한 과거라는 방증 같아서.

“샤를 졸려여.”

어느새 쿠키 두 개를 다 먹어 치운 샤를이 리카르도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리카르도는 시계에서 시선을 거두고서 아이를 안았다.

“편히 누워서 자자.”

가뿐하게 아이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하려던 리카르도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아이의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그새 또 고열이 난다고?’

리카르도는 심각하게 샤를의 상태를 살폈다. 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또 열이 난다니.

환경의 변화 때문이라고 해도 주기가 너무 짧다.

리카르도는 일단 샤를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미라벨이 아이와 함께 맡겨 둔 약병을 찾았다. 이번에는 샤를이 놀라지 않도록, 당황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삼쵸온…… 샤르…… 켈록!”

약병을 찾느라 몸을 돌렸던 리카르도는 아이의 기침 소리에 놀라 고개를 틀었다. 무심코 샤를을 본 리카르도가 눈을 크게 떴다.

“켈록! 켈록!”

샤를이 괴로워하며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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