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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98화 (99/120)

98화

미라벨은 이 문장을 본 적이 있었다. 황제를 조문하러 갔을 때, 두란테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달고 있던 배지에 이것이 새겨져 있었다.

아달베르토가의 문장이다.

미라벨은 배지를 세게 움켜쥐었다.

‘황궁의 시종들을 다 치워 놓을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면, 두란테가 맞겠지.’

발레리오 황태자는 두란테가 역성혁명을 꾀하고 있다고 했다. 황태자가 그렇게 언급할 정도라면 두란테의 세력이 적지 않다는 뜻일 터.

정황상, 루체를 납치해 간 건 두란테다.

‘대체 왜?’

하지만 그의 동기를 알 수 없었다. 대체 루체에게서 뭘 얻어 내겠다고. 황궁에서 납치를 한다는 대범한 짓을 벌인 걸까.

‘이유는 중요치 않아.’

미라벨은 두란테의 문제를 흘려 넘기려 했다. 리카르도가 엮여 있긴 하지만, 그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가 무력한 건 아니니까.

또 무엇보다도 타국의 계승 문제에 끼어드는 건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가 미라벨의 사람을, 그것도 루체를 건드렸다면 얘기는 다르다.

루체가 누구인가.

그녀는 미라벨에게 단순한 하녀가 아니다. 미라벨의 영혼이 외로움에 시들어 갈 때 유일한 위로가 되어 준 빛과 같은 존재였다.

루체가 없었다면 미라벨은 진작 괴로움에 휩쓸려 죽었을 것이다.

“당장 마차를 준비해. 아달베르토의 컨트리 하우스로 간다.”

“예!”

배지를 노려보던 미라벨이 명을 내리자 소피가 재빨리 뛰어갔다.

얼마 뒤, 미라벨은 으리으리한 저택 앞에 서게 되었다. 분노가 무엇보다도 그녀를 빠르게 움직인 덕이었다.

“백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이분은 세골린데의 왕녀, 미라벨 에티에네트 님이십니다.”

“와, 왕녀님이시라고요?”

소피에게서 미라벨의 네임 카드를 받은 집사가 사색이 되었다. 그는 난처한 듯 눈을 빠르게 깜박이다가 말했다.

“송구합니다, 왕녀님. 백작님께서는 저택을 비우셨습니다. 그러니 외람되지만 다음번에…….”

“응접실로 안내해라.”

미라벨은 집사의 말을 싹둑 자르고서 명을 내렸다. 왕녀의 지엄한 명에 집사는 변명을 더 늘어놓지 못하고 길을 비켜야 했다.

“백작이 나를 일전에 초대하였는데, 오늘밖에 시간이 나지 않아 오게 되었네. 여기서 차를 마시며 기다릴 테니…… 아니지. 영애와 한담이라도 나누면 좋겠군.”

“그, 그게……. 송구합니다, 두 분께서 함께 출타 중이시라…….”

미라벨은 말없이 집사를 응시했다. 왕녀와 눈이 마주친 집사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다, 당장 백작님께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왕녀 앞에서 쩔쩔매던 집사가 부리나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주인의 부재로 고요했던 저택이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여기저기서 외침에 가까운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 미라벨의 계획대로였다.

미라벨은 사용인들이 허둥대며 돌아다니자 소피에게 속닥였다.

“어서 찾아. 누가 널 보고 왜 돌아다니냐고 묻거든 내가 마차에 두고 온 손거울을 가지러 가는 길이라고 하고.”

“네, 왕녀님.”

소피는 재깍 대답하고서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사용인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것을 보던 미라벨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빨리 찾아야 할 텐데.’

혼비백산한 저택의 사용인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미라벨의 시야에는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풀고서 이내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루체, 제발 무사해야 해.’

소피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미라벨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두란테가 어떤 자인가. 그는 기분에 따라 잔인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게다가 아랫사람은 사람으로 취급조차 하지도 않는다.

아르밀라의 뺨을 다짜고짜 때렸던 걸 보면 뻔했다.

게다가 아까 미라벨을 응접실로 안내하던 하인은 다리를 절고 있었다. 필경 두란테의 작품일 것이다.

그런 자가 루체를 납치하였으니…….

“왕녀님!”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소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체의 안전을 빌던 미라벨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자 상기된 뺨을 한 소피가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찾았어요. 지하실에 있더라고요.”

“……그래.”

미라벨은 안도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티 세트를 옮기느라 분주한 하녀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입술을 달싹였다.

“상태는 어때?”

“좋지는 않아요. 마차에 데려다 놓았어요.”

소피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루체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소피를 따뜻한 눈으로 보았다.

“고생했어.”

“뭘요.”

“일단 가자.”

소피와 신속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미라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녀가 응접실을 나서려 하자, 집사가 부리나케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왕녀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백작님께서 영애와 함께 오실 겁니다. 지금 의상실에 연통을 넣었으니…….”

“지금 왕녀님께 더 기다리라고 하는 겁니까?”

미라벨의 곁에 있던 소피가 나서며 냉랭히 말했다. 감히 왕녀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지껄여 버린 집사가 입을 합 다물었다.

“가시지요, 왕녀님.”

소피는 집사를 무시하고서 미라벨을 안내했다. 미라벨은 우아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 * *

“루체!”

평온을 가장한 미라벨의 가면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깨어졌다. 그녀는 마차의 소파에 모로 누운 루체를 보고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상에…….”

미라벨은 루체의 몰골에 기함했다. 그녀는 채찍을 잔뜩 맞은 듯,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머리는 흙먼지가 엉켜 헝클어져 있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이도 두어 개 빠졌는지 입에서는 피가 질질 흘렀다. 게다가 눈은 퉁퉁 부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떡해. 루체, 눈 좀 떠 봐.”

미라벨은 울먹이며 루체의 얼굴을 무릎 위에 올렸다. 사람의 손길에 놀란 루체가 흠칫하고서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모라여……. 루체는, 하윽, 아무것도 몰라요…….”

루체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서 같은 말만을 되뇌었다. 빠진 이와 부은 뺨 때문에 발음도 불명확했다.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던 미라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루체. 우선은 황궁으로 돌아가자. 어서 치료를 받아야지.”

“……와녀님?”

“응, 나야.”

미라벨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다정히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루체가 서럽게 흐느꼈다.

“흐엉, 엉…… 와, 와녀니임…….”

“응, 루체. 이제 안전해. 괜찮아.”

미라벨은 우는 루체를 달래며 마차의 천장을 두드렸다. 마차 안에서 보내온 신호에 마부가 채찍질을 더욱 분주히 하였다.

미라벨은 거세게 덜컹이는 마차에서 루체를 꼬옥 끌어안았다.

“걱정 마. 루체는 내가 지킬 거야. 반드시, 누구도 손 못 대게 할게.”

미라벨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녀는 루체의 뺨에 들러붙은 눈물을 닦아 주며 짓씹듯 말을 이었다.

“절대 용서 안 해.”

미라벨의 푸른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빠르게 굴러가는 마차 속에서 그녀는 의지를 다졌다.

고민은 끝났다.

미라벨은 루체를 이 지경으로 만든 두란테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 *

두란테는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입술을 사리물었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왕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지하실에 가둬 놓았던 왕녀의 하녀가 사라진 뒤였다.

공교롭게도 왕녀와 함께 그녀의 하녀가 사라진 것이다. 마치 왕녀가 데려간 것처럼.

혹시나 하는 와중에 왕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두란테는 지금 또 서둘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젠장!”

두란테는 욕을 내뱉고서는 발을 굴렀다.

하필 그 타이밍에 왕녀가 오다니.

원래 두란테는 하녀를 고문하는 중에 자리를 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줄리아가 하도 의상실에 가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별도리가 없었다.

저택에 돌아온 두란테는 처음엔 왕녀가 초대장도 없이 주인이 없는 집에 온 걸 가지고 트집을 잡을까도 했다.

하지만 왕녀가 집사에게 말했듯, 일찍이 두란테는 그녀를 제 컨트리 하우스에 초대한 바 있었다.

초대를 받고 왔다는 손님에게 왜 오셨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년은 덜떨어진 하녀를 납치하라고 해선!’

원하는 바를 손에 넣지 못한 두란테의 분노가 비앙카에게로 향했다.

비앙카는 루체가 왕녀의 심복이라며, 그녀를 납치하면 왕녀의 정체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심복이라는 하녀는 어딘가 모자란 멍청이였다. 질문을 하면 더듬거리고, 채찍을 때리면 어린아이처럼 울기만 하는.

황궁에서 납치를 한다는 위험을 감수했건만 소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소득은커녕, 도리어 왕녀에게 호출당해 가고 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잘 보여야 할 대상에게 제대로 찍혀 버린 셈이다.

이렇게 될 거, 애초의 계획대로 왕녀에게 황금 조각상이라는 공수표나 계속 날릴 걸 그랬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뭐라고 해야 잘 넘어갈 수 있지?’

두란테는 초조하게 다리를 달달 떨었다. 평소에는 팽팽 돌아가던 두뇌가 운동을 뚝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왕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아달베르토가는 파산할 수도 있다. 그녀의 구근만이 오로지 살길이었다.

‘생각해, 생각해야 해.’

두란테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벼랑 끝에 선 듯 막막했다.

하지만 더욱 막막한 건, 벌써 그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두란테를 태운 마차가 황녀의 별궁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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