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발레리오는 향기로운 차의 향기를 음미하다가 눈을 들어 올렸다. 그의 맞은편에는 우아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세골린데의 왕녀가 있었다.
왕녀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왔으나, 실물을 마주하고 있자니 놀라웠다.
사실 발레리오는 왕녀의 소문을 믿지 않았다. 어느 나라 왕자가 늠름하다더라, 어디의 왕녀가 예쁘다더라 하는 소문은 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놀랍군.’
이 정도 외모면, 소문이 더 대단하게 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왕녀가 행방불명된 이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음에도 국민이 그녀를 환대했다던데.
어째서 왕녀의 미심쩍은 행적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왕녀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저 감상일 뿐.
그는 외교 사절로서 그녀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중요한 건 왕녀의 미모가 아니었다.
발레리오는 정중한 태도로 왕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절단을 이끌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심이 크시지요.”
상냥하고 나긋한 어조에 발레리오는 미소를 지었다.
“워낙 병환을 오래 앓아 오신 터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생전에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알현실을 맡기셨다 들었습니다. 믿음직한 아들이 있으니, 걱정 없이 편안히 가셨을 거예요.”
발레리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황제는 편안히 세상을 뜨지 못했다.
황제는 장장 여섯 시간 동안 갑작스러운 고통에 몸부림치다, 막판에는 제발 죽여 달라고 절규하다가 죽었다. 그것을 아는 이는 임종을 지킨 주치의와 발레리오뿐이었다.
“황태자 전하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런 말씀은 말아 주세요. 제가 바빠 왕녀님을 바로 뵙지 못한 것을요. 별궁은 편안하십니까?”
“예, 덕분에.”
왕녀는 부드럽게 대답하고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발레리오는 선뜻 용건을 꺼내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잔을 세게 거머쥐었다.
오늘 왕녀와 만나는 자리를 만든 건, 아직 미완인 평화 협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왕녀는 안부 인사만 늘어놓고 있었다.
‘아직 내가 황위에 오르지 않아서인가.’
알현실의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협정을 논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발레리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발레리오는 황제가 서거한 마당에 황태자에게 협정이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는 왕녀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씁쓸함을 느꼈다.
‘쓸데없는 생각을.’
발레리오는 쓰게 웃었다. 두란테의 견제에 시달리다 보니, 자격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왕녀에게 고개를 까닥여 보이며 인사를 했다.
“하면 장례식 때 다시 뵙지요.”
“전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왕녀는 발레리오를 붙잡고서는 방 안의 시녀들을 내보냈다.
시녀들이 모두 나가자, 그녀가 무언가 크게 결심한 것처럼 발레리오와 시선을 맞추었다. 덩달아 긴장한 발레리오에게 들려온 이야기는 뜻밖의 것이었다.
“폐하의 시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
생각지 못한 주제가 나오자 발레리오의 목소리가 튀었다. 왕녀는 그를 지그시 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신전으로 가서 조문을 드렸습니다. 생전의 모습은 초상화로만 뵈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으시더군요. 장의사가 정성을 다해 치장해 드린 듯했습니다. 다만…….”
“다만요?”
발레리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왕녀는 신중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발레리오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께선 못 알아보셨습니까?”
“예? 무엇을…….”
의뭉스러운 질문에 발레리오는 당황했다. 그는 왕녀가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 * *
침묵 속에서 미라벨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는 신중한 성격 같았다. 그렇기에, 그녀가 던진 뜬구름 같은 이야기에 쉽게 낚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할까.’
미라벨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지금 제국은 두란테와 황태자의 파벌로 나뉘어 있다.
차기 황제의 위를 두고서 두 파벌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괜히 나서지 않는 게 좋겠지.’
생각을 정리한 미라벨은 발레리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잘못 봤던 모양이에요. 즉위식을 마치시거든 협정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제가 놓친 게 있는 게로군요.”
미라벨이 일어나자, 발레리오가 불쑥 말했다.
“폐하의 시신과 관련해 제가 놓친 게 있다면 부디 알려 주십시오.”
발레리오는 조금은 절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도움이 절실합니다.”
“곧 황위에 오르실 분께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요? 며칠 뒤에 제국의 주인이 되실 텐데요.”
“아뇨, 장례식이 일정보다 더디게 준비되고 있습니다. 마치 시간을 끄는 것처럼, 마치 제가 아니라 다른…….”
초조함에 말을 늘어놓던 발레리오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서 한참을 고민하였다.
“……실은, 두란테 아달베르토 백작이 대공의 이름을 빌려 역성혁명을 꾀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낯으로 변한 발레리오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미라벨은 그가 털어놓는 내밀한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미라벨은 할 말을 찾다가 표정을 굳혔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선을 그은 미라벨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녀가 바로 자리를 뜨려 하자 발레리오가 초조해하며 그녀를 잡았다.
“도와주십시오.”
“전하께서 입에 올리신 것은 제국의 일입니다. 제게는 힘도, 이 일에 나설 명분도 없습니다.”
“왕녀님께서 저의 곁에 서 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세골린데가 사랑한다는 왕녀님의 존재, 그 상징성은 제국민도 선망하는 것이니까요.”
미라벨은 심란해하며 황태자를 보았다. 오늘 만난 것이 고작인 타국의 왕녀에게 도움을 청할 만큼, 황태자의 입지가 불안한 것인가.
미라벨은 빠르게 계산해 보았다.
위기에 처한 자에게 손을 내밀면 후에 몇 배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의 일.
미라벨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면 뭘 해 주실 수 있나요?”
“평화 협정에서 세골린데가 제국에 바쳐야 하는 축산물 중 한 가지 항목을 빼 드리겠습니다. 뭐든지, 왕녀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요.”
“그건 황제의 권한인데요.”
“그러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왕녀님이 도와주신다면 세골린데를 영원한 제국의 우방으로 천명할 황제가 즉위할 수 있을 겁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의 시신에서 뭘 알아보신 겁니까?”
발레리오의 질문에 미라벨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장의사가 아주 꼼꼼히 시신 처리를 했더군요. 피부는 눈처럼 새하얗게, 볼은 생기 있게, 그리고 손톱까지 두껍게 하얀 칠을 해서.”
미라벨의 얘기에 발레리오가 숨을 죽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쪽 손톱의 칠이 아주 살짝 벗겨져 있었어요. 검은 손톱이 보이더라고요.”
검은 손톱.
왕녀가 내놓은 실마리에 발레리오는 숨을 들이켰다.
독살을 당한 자의 시신은 피부 전체가 얼룩덜룩하게 멍이 들고 손톱이 검게 변한다. 이를 모르는 왕족은 없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의 다음 만남은 장례식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라벨은 발레리오를 잘라 내려 했다.
이쯤이면 되었다. 여기까지 나선 것도 선을 넘은 것이다.
미라벨이 자리를 뜨려 하자 발레리오가 재빨리 말했다.
“이 얘기만 들어 주십시오. 제가 황위를 못 이으면 계승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되면 제국은 혼란에 빠질 겁니다. 대공은 원치 않아도 엮여 역당이 되겠죠. 무고한 이가 엮여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발레리오의 입에서 리카르도가 거론되자 미라벨은 턱을 당겨 물었다. 발레리오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마저 말했다.
“또한 세골린데에도 영향이 갈 겁니다. 아직 평화 협정을 완성하지 못하였으니까요.”
미라벨도 황태자의 적인 두란테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나라, 그것도 제국의 계승 전쟁에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무릇 계승 전쟁이란 진창과도 같이 더러운 법이니.
미라벨이 여기서 발을 뺀다고 해도 황태자는 그녀를 탓할 수 없다. 황제의 독살에 대한 암시를 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물러나도 된다. 하지만 리카르도가 엮일 수 있다는 게 찝찝했다.
‘알아서 잘 하겠지.’
리카르도는 바보가 아니다. 애초에 그가 두란테의 뜻대로 순순히 엮일지도 의문이었다.
미라벨의 시선이 발레리오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지난밤 리카르도가 서성였던 복도를 바라보는 것처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미라벨은 굳은 얼굴로 발레리오에게 인사를 고했다. 지금 그녀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였다.
* * *
미라벨이 황태자와의 접견을 마치고 응접실을 나서자마자, 소피가 달려왔다.
“왕녀님!”
소피는 숨을 헐떡이며 긴급하게 말했다.
“루체, 루체가!”
“루체가 왜? 또 길을 잃었대? 천천히 말해.”
“납치당했어요!”
“뭐?”
소피를 진정시키려던 미라벨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소피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황궁에서 납치라니!”
“흐윽, 제가 봤어요, 방금요!”
호흡을 가라앉힌 소피가 울먹거렸다. 그녀는 끅끅대며 말했다.
“루체가 샤를 왕자님의 동화책을 가지러 서재에 갔거든요. 그런데 하도 안 와서, 흑, 나가 봤는데.”
“그런데?”
“서재에 안 보여서 여기저기 다 뒤져 보는데, 마구간 쪽에서 웬 기사들이 루체 입을 이렇게, 막고서는 마차에 태웠어요. 어떡해요.”
“시종들은? 황궁에 눈이 이렇게 많은데 다들 뭐 하고?”
“그게…… 흐윽, 이상하게도 아무도 없었어요.”
“어떤 마차였어? 기사들의 배지나 망토 색은?”
“검은색으로 가렸더라고요. 그런데 한 기사가 이걸 떨궜어요. 루체가 발로 차는 걸 막다가요.”
소피는 손에 꼬옥 쥐고 있던 배지를 내밀었다.
은빛 배지에는 흰 염소의 머리가 각인되어 있었다. 배지의 문장을 확인한 미라벨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