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비앙카의 당돌한 말에 두란테가 몸을 홱 틀었다. 그는 기사들에게 멀찍이 물러나라고 한 뒤 매섭게 속삭였다.
“내가 널 왜 믿어야 하지? 왕녀를 만나게 해 주면 그게 대공비라는 걸 증명하겠다더니, 막무가내로 우길 셈이었느냐?”
“막무가내가 아니에요. 백작님께서도 왕녀의 얼굴을 보셨다면서요. 이상한 것 못 느끼셨어요?”
“전혀. 이목구비는 닮았을지 어떨지 몰라도, 그 천것이랑은 차원이 다른 기품이 있었어. 왕녀는 왕녀야.”
두란테는 비앙카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세골린데의 왕녀가 아르밀라라니. 황당무계한 소리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게다가 대공비는 죽은 사람이 아닌가.
레나토에서는 그녀의 장례식까지 치렀다. 두란테는 그 장례식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아르밀라가 살아 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닮은 사람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너 따위의 말을 믿고 내가 움직였다가 낭패를 보게 되면, 어떻게 보상할 거냐?”
“하지만 왕녀가 아르밀라라면요?”
비앙카의 속살거림에 두란테의 눈가가 움칠했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갔다.
“백작님께서는 왕녀의 약점을 쥐게 되시는 거예요. 왕녀가 기억을 잃고 대공의 침대나 데우는 짓을 했다니. 그것만 한 추문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요정의 숨결’은 바로 내 것이 되겠지.”
“그럼요. 어디 ‘요정의 숨결’뿐일까요. 세골린데가 사랑하는 왕녀의 약점을 쥐시면, 세골린데가 백작님의 손에 들어오게 되겠지요. 저는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아요. 왕녀가 제 앞에 무릎을 꿇게만 해 주시면 되어요. 나머진 다 백작님 거예요.”
비앙카의 속살거림에 두란테가 입맛을 다셨다.
허무맹랑한 가설이었지만, 이게 진짜라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그러잖아도 왕녀가 좀처럼 만나 주질 않아 애를 썩이고 있는 참이었다. 구근을 얻으려면 회유든 아첨이든 해야 하는데, 만날 수가 없으니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녀가 아르밀라라면, 회유와 아첨은 필요 없다. 협박이라면 모를까.
‘아니야. 이건 리스크가 너무 커.’
곰곰이 생각하던 두란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증거라고 내세울 건 비앙카의 증언뿐이다. 레나토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자의 증언을 믿고 나설 순 없다.
사실 관계를 떠나서 지금 왕녀에게 이 패를 들이밀어 봤자, 왕족 모욕죄밖에 더 되겠는가.
“그래도 역시 안 되겠다.”
“백작님!”
“쉬이! 목소리가 커!”
두란테는 비앙카가 항변하려 하자 다급히 그녀의 입을 막고서 으르렁거렸다.
“네 세 치 혀 말고 다른 증거도 없잖느냐! 일 키우지 말고 닥치거라.”
비앙카는 억울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주먹을 틀어쥐고서 왕녀가 있을 방의 문을 노려보았다.
‘저 안에 아르밀라가 있는데!’
비앙카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두란테를 잡고 늘어져서 겨우겨우 황궁까지 따라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순순히 물러날 순 없었다.
‘다른 증거…… 증거가 뭐가 있지? 아님 증인이라도. 내 말에 힘을 실어 줄 증인이 있어야 해.’
비앙카는 분주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느새 두란테는 그녀를 두고서 기사들과 함께 복도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뭐 해, 따라오지 않고!”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비앙카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멀리서 복도의 모퉁이를 꺾고 들어오는 한 하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헤실헤실 웃으며 품 안 가득 책을 들고 오는 하녀는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루체잖아? 쟤가 왜 여기에…….”
멍하니 중얼거리던 비앙카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역시 하늘은 내 편이야.’
비앙카는 활짝 웃으며 두란테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귀에 속살거리는 말을 듣던 그가 복도 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갈색 머리를 한 하녀를 본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 * *
야심한 밤.
리카르도는 눈을 감고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라벨에게 완전하게 내쳐진 후, 그는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낮에는 원인 모를 몸살에 시달렸으며 밤에는 악몽 속에서 헤맸다.
꿈속에서 리카르도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했다.
그가 아르밀라의 몸을 거칠게 대하고, 그녀를 외롭게 두고, 붉은 방에 가두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리카르도는 과거의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외쳤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는 처절한 절망 속에서 자신이 죄를 짓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꿈의 마지막에서는, 늘 미라벨이 이별을 고했다.
그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잠에서 깨어났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라벨. 흐윽, 미라벨!”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이름을 토해 내면서 번쩍 눈을 떴다.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후으, 헉, 허억…….”
벌떡 일어난 리카르도는 거대한 상체가 들썩이도록 헐떡였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야 해. 안 돼. 이대로 보낼 수는…….”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그 말만을 하염없이 중얼거리던 리카르도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미움받았던 시간이 복에 겨웠던 순간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미워해 주었으면 했다. 헐뜯고, 때리고, 비난하더라도 곁에 둬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모든 건 끝났다.
‘미안해요.’
담담히 끝을 고하던 미라벨의 음성을 떠올린 리카르도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운 사이로 드러난 판판한 맨가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리카르도는 이렇게 살 바에야 죽고 싶었다.
예전 같았다면 진작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죽을 수 없었다.
샤를이 있으니까.
샤를에게 ‘늑대 삼촌’이 죽었다는 슬픔을 안겨 줄 순 없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렇지만 리카르도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일 뿐.
그의 변화를 먼저 눈치챈 건 나시르였다. 그가 주치의에게 상담하자, 우고가 대공을 진찰하였다.
우고는 강건한 체력의 리카르도가 몸살이 났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그것이 육체의 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충분한 휴식을 권했다.
차라리 몸이 아픈 거였다면 나았을 텐데.
그러나 마음이 아픈 탓에, 리카르도는 치료도 받지 못하고서 고통스러워해야만 했다.
나시르와 에치오, 발레리오 모두 그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위로할 길은 없었다.
그저, 또다시 리카르도가 전처럼 미쳐 버리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미라벨에게 버림받은 리카르도가 과연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게 가능한 것이었던가.
사람이 공기 없이 호흡하고 불 속을 걸을 수 있게 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라벨.”
잠에서 깬 리카르도는 맨발로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렀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만나야 해, 만나서…… 빌어야 해.”
어느새 리카르도는 방 밖으로 나와 있었다.
푸른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황궁의 복도는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레나토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거대한 규모 덕에 으스스함이 더했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공포 따윈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미라벨을 향한 그리움만이 그를 뒤덮고 있었다.
* * *
미라벨은 착잡한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말했다.
“더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벌써 이게 며칠째인지.
새벽에 리카르도와 방문 앞에서 만나는 건 이제 일과에 가까웠다.
처음 미라벨이 리카르도를 만났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날따라 잠이 안 왔다. 그래서 결국 몸을 일으켰고, 물을 마시려다 텅 빈 물병에 난감해했다.
새벽이라 시녀를 부르기가 애매한 탓에 응접실로 나왔다. 그리고 그때, 문밖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다.
살짝 문을 열어 보았다가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리카르도를 보고서는 얼마나 놀랐는지.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리카르도의 태도였다. 그는 미라벨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서 빌었다. 지금처럼.
“잘못했어. 다, 내가 잘못했어…….”
“가세요.”
“죽은 듯이 있을게.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게. 곁에만 있게 해 줘.”
“필요 없어요.”
미라벨은 덤덤히 말했다.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 곁에 두어야 할 이유가 없다.
리카르도를 완전히 잘라 내는 건 미라벨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었다. 마음도 없으면서 처량하다고 해서 받아 주는 것이 더 잔인하다.
“밤이 깊었어요. 돌아가세요. 그리고 내일부터는 오지 마세요. 또 오셔도 안 나올 거예요.”
“안 나와도 돼. 벌세워 놓는다고 생각해.”
“필요 없다니까요? 거슬려요.”
미라벨의 음성은 더없이 냉정했다. 리카르도가 더 매달릴 여지를 아예 남기지 않으려 작정한 것처럼.
“피곤하게 굴지 마세요.”
“피곤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봤으니까 됐죠? 가세요.”
미라벨은 냉담하게 말하고서 몸을 틀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본 리카르도는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바닥을 짚은 손등 위로 진주 같은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가지 마. ……사랑해.”
“사랑.”
미라벨은 차갑게 웃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음송곳이 되어 리카르도의 심장을 찔렀다. 미라벨은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날 사랑하면 나도 당신을 사랑해야 하나요? 당신은 안 그랬는데?”
“아냐.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돼. 나를 네 첫 번째 남자로 삼지 않아도 돼. 잘라 내지만 말아 줘.”
“나는 당신을 떠나 있던 지난 4년 동안 행복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당신을 만나서 또다시 괴로워요. 그래서 그만하겠다는 거예요.”
가세요.
미라벨은 마지막 말 한마디를 끝으로 문 안으로 사라졌다.
텅 빈 복도에 홀로 남은 리카르도는 오열했다.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갈비뼈를 잡고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리카르도는 이것이 악몽이었으면 했다.
깨어날 수 있는 꿈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의 지옥은 과거의 그가 만들어 놓은 현실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