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줄리아는 손을 앞치마에 닦는 비앙카를 새침하게 쏘아보았다.
“귀가 먹었어? 왜 이제야 와?”
“설거지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종소릴 듣자마자 뛰어왔는걸요. 아가씨께서 절 기다리실까 봐서요.”
비앙카가 증거라도 내놓듯이 줄리아에게 젖은 손을 들어 보였다. 억울해하는 그녀를 노려보던 줄리아는 콧방귀를 뀌고서 소파에 풀썩 앉았다.
“알았으니까, 저 접시 치워.”
“예, 아가씨.”
비앙카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서는 줄리아가 깨 놓은 접시 조각을 앞치마에 모으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열심히 일하는 비앙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혀를 쯧 찼다.
“그렇게 해서 언제 다 치우려고? 됐고, 가서 아버지나 모셔 와. 이번에야말로 마담 카트린에게 망신을 줘야겠어.”
“백작님께서는 출타 중이세요.”
“또? 어디 가셨는데?”
“글쎄요.”
비앙카는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러자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줄리아가 아랫입술을 삐죽이고선 중얼거렸다.
“또 그 여자를 만나러 가셨나?”
줄리아의 혼잣말에 비앙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두란테는 일찍이 아내를 여의었으나, 곁에 여인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가치는 오직 돈뿐이었다. 그런데 두란테가 여자를 만나러 가다니.
‘저것한테 새어머니가 생기려나?’
비앙카는 예의 없이 소파 테이블에 구둣발을 턱 올리는 줄리아를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줄리아의 천박한 행동거지에 적잖이 놀랐다.
줄리아는 한마디로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예의는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소리부터 지르고, 발을 구르고, 떼를 썼다.
백작가 사용인의 1년 치 봉급을 온몸에 두른 영애가 하는 짓거리가 말단 하녀보다도 못했다.
말단 하녀까지 갈 것도 없었다. 줄리아는 레나토에서 가장 천대받던 아르밀라보다도 훨씬 천박했다.
그 덕에 사람의 품위란 신분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겼던 비앙카의 고정 관념이 송두리째 뒤집혔다.
부모가 자식에게 애정 대신 돈을 퍼부으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싶기도 하였고.
‘저것 덕에 내가 여기 붙을 수 있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비앙카는 신경질적으로 치맛자락을 펴는 줄리아의 행태에 한숨을 삼켰다.
비앙카는 추천서 하나 없이 레나토에서 쫓겨나고서 혈혈단신으로 두란테를 찾았다.
이미 그도 그녀를 버렸지만, 달리 찾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두란테는 쓸모없어진 비앙카를 외면했다.
만약 그 자리에 줄리아가 없었다면, 그리고 비앙카가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들러붙지 않았다면 분명 그대로 내쫓겼을 것이다.
“왜 그렇게 봐?”
비앙카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줄리아가 얼굴을 구겼다. 그녀의 기분이 다시 바닥을 치려 하자, 비앙카는 황급히 눈을 접어 웃었다.
“아. 아가씨 머리 빗질을 다시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얼른 와서 해.”
“예.”
비앙카는 샐쭉 웃고서 퉁명스러운 명령에 따랐다. 공들여 빗질을 하던 비앙카는 줄리아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가씨, ‘그 여자’라뇨? 백작님께서 요즘 만나시는 분이 생긴 건가요?”
“그걸 들었어? 귀도 밝지. 됐어, 넌 몰라도 돼.”
“어떤 분인지 알아야 제가 아가씨를 도와드리죠. 혹시라도 아달베르토가에 새 백작 부인이 오시게 된다면…….”
“푸핫!”
비앙카가 늘어놓던 얘기를 심드렁하게 듣던 줄리아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웃다가 입을 열었다.
“풉, 말도 안 돼. 세골린데의 왕녀가 미쳤다고 백작가로 시집을 와? 그것도 우리 아버지한테?”
“네?”
줄리아가 흘릴 정보에 귀를 기울이던 비앙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세골린데의 왕녀라니. 그럼, 아르밀라가 아닌가.
‘고것이 수도에 왔나?’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빗을 세게 움켜쥐었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제게 망신을 주고 쫓아낸 아르밀라를 밤마다 떠올리며 이만 갈았는데.
‘하늘이 날 버리진 않았구나.’
비앙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만 하면 아르밀라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꼭 해야 했다. 하늘이 등을 떠밀어 주기까지 하였는데 보복을 하지 않고서 넘길 수야 없지 않은가.
“하여간, 하녀들이란. 새 백작 부인이라고?”
줄리아는 빗질이 멈춘 것도 모르고 킥킥댔다. 그녀는 하녀의 말실수를 지적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상상도 정도껏 해야지. 세골린데의 왕녀가 결혼을 한다면 황태자나 대공 전하일 거야. 아, 대공 전하는 나랑 혼인하실 테니 황태자겠네.”
줄리아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조금 전까지 길길이 날뛰었더니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하여튼, 아버진 요즘 그 여자한테 백합 구근을 얻으려고 공들이고 계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실없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맞아요, 제가 참 실없이 생각했네요.”
줄리아의 설명을 신중히 듣던 비앙카가 수긍하였다. 그녀는 다시 빗질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비앙카의 검은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 * *
미라벨은 침대에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고가 준 약 덕에 샤를의 체온은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 다행이야.’
미라벨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리카르도 앞에서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아픈 아이를 보는 건 가슴이 아팠다.
무엇보다도 샤를의 고열이 그녀가 물려준 고통이라는 사실에 속이 쓰라렸다.
만약 미라벨이 리카르도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와 동침하지 않았다면.
샤를은 아르칸젤로인과 세골린데인의 혼혈에게 찾아온다는 고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샤를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터.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다.
미라벨이 샤를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이 시기를 흘려보내도록 해 주는 것이 다였다.
“엄마가 미안해, 샤를.”
미라벨은 어찌할 수 없는 죄책감을 조용히 내뱉었다. 그 순간, 아이의 통통한 볼이 씰룩이더니 샤를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어마…….”
“깼니?”
“삼쵸는?”
샤를은 작은 손으로 눈을 비비고서 리카르도부터 찾았다. 아이의 푸른 눈동자가 리카르도를 찾아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느때 삼쵼 어디써?”
“삼촌은 바쁜 일이 있어서 갔어. 나중에 다시 샤를을 보러 올 거야.”
“징짜?”
“진짜.”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장단을 맞춰 주던 미라벨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샤를의 볼을 어루만지며 착잡한 심경으로 물었다.
“샤를은 늑대 삼촌이 왜 그렇게 좋아?”
“구냥…….”
엄마의 질문에 샤를은 눈을 내리깔고서 웅얼거렸다. 눈썹이 팔랑이도록 눈을 깜박거리던 샤를이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아서.”
“응?”
“샤를이랑 달마서.”
한참을 꼬물꼬물대던 샤를이 발그레한 얼굴로 말했다.
“샤를이 어른 되명 그럴 고 가타. 늑때 삼쵼처럼 머신는 사람 대고 시포.”
“대공 전하는 무서운 사람인데?”
“안 무서오. 차캐. 따뜻하구.”
샤를은 배시시 웃었다. 그러나 곧, 자신을 보는 엄마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고서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구치만, 구치만. 샤를 어마가 훨씬 조아.”
미라벨은 아이가 제 눈치를 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난번에 세골린데로 돌아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아이 앞에서 정신을 잃은 이후로, 샤를은 미라벨이 섭섭해할까 봐 조심했다.
‘애한테 눈치나 보게 하고.’
미라벨은 씁쓸하게 웃었다. 샤를은 마냥 밝게 자라도록 해 주고 싶었는데, 아픈 기억을 심어 준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다.
그녀는 샤를의 얼굴을 끌어안고서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도 샤를 사랑해.”
“웅. 샤를도 어마 사랑해여. 그니까 샤를 ……업써두 대.”
엄마의 따뜻한 포옹에 몸을 맡긴 샤를이 턱을 내리고서 우물거렸다. 미라벨은 샤를이 삼킨 단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수도 없이 ‘엄마’를 부르고 말하는 샤를이 절대로 내뱉지 않는 단어.
리카르도를 보면서 떠올렸을 그 단어.
그 한마디 단어가 묵직하게 마음을 때려서, 미라벨은 조용히 아이를 토닥여 주었다.
* * *
기사들과 하녀를 거느리고서 왕녀의 별궁을 찾아온 두란테가 조바심을 내었다. 초조함에 지팡이로 바닥을 딱딱 두드리던 그는 문을 열고 나타난 시녀에게 다급히 물었다.
“설마 왕녀님께서 오늘도 퇴짜를 놓으시는 건 아니겠지? 오늘에야말로 아달베르토가의 컨트리 하우스로 모시고 싶네.”
“송구합니다. 왕녀님의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으셔서…….”
“아직도?”
두란테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손잡이가 은으로 장식된 검은 지팡이가 파르르 떨렸다.
“내 정원에 왕녀님께서 좋아하실 꽃들이 잔뜩이라고는 전했나? 아주 중요한 얘기를 나눠야 한다는 것도?”
“예. 하오나 장례식장에서 뵙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때는 늦어!”
두란테는 급기야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나 궁중 생활에 익숙한 시녀는 그의 분노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백작님.”
“제기랄…….”
두란테는 시녀가 다시 문 안으로 사라지자 이를 갈았다.
그가 씩씩대자, 뒤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하녀가 허리를 들었다.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왕녀는 절대 백작님의 얘기를 들어 주지 않을 거라고요.”
회색 머리의 하녀는 두란테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믿으시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