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충격적인 고백을 뱉은 리카르도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바라보던 미라벨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지금, 뭐라고…….”
미라벨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방금 들은 이야기가 너무 놀라워서, 머리에 바로 들어오질 않았다.
“내 어머니는 남편의 형인 황제와 불륜을 저질렀어. 나는 황제의 핏줄이야.”
리카르도는 미라벨을 바라보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사생아지.”
리카르도의 이야기가 느리게 미라벨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선대 대공비는 황제와 불륜을 저질렀고, 리카르도는 그들 사이에서 나온 사생아다.
건조하게 사실만 나열했는데도 벅차다. 미라벨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리카르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이걸 말하는 건, 네게 제대로 사죄하기 위해서야.”
아.
미라벨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는 이제야 리카르도가 어마어마한 비밀을 털어놓은 이유를 깨달았다.
리카르도는 지금, 과거 그가 아르밀라에게 퍼부었던 폭언과 폭력의 기저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미라벨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샤를의 손수건을 꽉 쥐고서 리카르도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변명이 되지 않아요. 아니, 될 수 없어요.”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니야.”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서, 이 아이를. 샤를을 죽일 거라고 했던 걸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몸을 그렇게 대한 게 다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라벨의 질책에 리카르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시선을 떨군 그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미라벨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리카르도의 고백을 들어도 별다른 감정이 생기질 않았다. 대공가의 비밀이 놀랍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다 끝낼 때가 된 거야.’
미라벨은 가만히 리카르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다음에 할 말을 기다리며 바짝 얼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갈 사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은 미라벨에게 어떤 감흥도 가져오지 않았다.
비극적인 가정사를 얘기하며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리카르도가 과거에 했던 짓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라벨의 몸을 함부로 대하고 그녀의 애원을 무시하며 감금했던 건 다른 이가 아닌 리카르도다.
솔직히, 제국행을 결심했을 때의 미라벨은 그를 증오하는 한편 여전히 사랑했다.
그와의 재회에 내심 옅은 기대를 품기도 했던 것 같다. 전과 달라진 리카르도를 보고 다시금 증오심을 다져야 할 만큼.
하지만 이젠 아니다.
미라벨은 너무 많은 것을 봐 버렸고 알아 버렸다.
미라벨은 황궁에 와서 리카르도와 결혼할 여자를 봐 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그 결혼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도 알아 버렸다.
리카르도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의 행보가 미라벨의 마음을 들쑤신다는 건 사실이니까.
리카르도가 어떻게 한들, 그가 미라벨의 심장에 뚫어 놓은 구멍을 메꿀 수는 없다.
‘여기까지 하자.’
그래서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손을 놓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덜 괴로워지기 위해서.
더는 리카르도를 사랑하지 않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아르밀라였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미련하고 맹목적이니까.
하지만 아르밀라가 아닌 미라벨은 그의 허물마저 보듬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앞으로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만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영영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그에게 남겨진 형벌이었다.
“그쯤 하고 일어나세요.”
“미라벨……?”
피로에 젖은 음성에 리카르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미라벨은 불안한 빛을 품은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지쳤어요. 당신을 미워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더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그만해요.”
“그런 말 하지 마.”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통보에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너른 어깨를 파들파들 떨던 그가 무릎으로 기어 와 미라벨의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넌 아무것도, 아, 안 해도 돼. 그럴 필요 없어.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그거면, 그거면 돼.”
리카르도는 넋이 나가 미라벨에게 애원했다. 미라벨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남자를 보다가 입술을 짓씹었다.
리카르도가 안쓰럽고 불쌍했다.
애정이 뭔지 모르고 자라서 애정을 주는 법도, 사람을 믿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고 싶었다.
리카르도를 사랑하면서, 그를 미워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눈물로 점철된 밤은 미라벨을 지치게 하였다. 그동안 리카르도가 변하였듯 그녀도 변했다.
“사랑해, 미라벨.”
리카르도가 흐느끼며 말했다. 미라벨은 그가 토해 내는 사랑을 무감하게 들었다.
그의 고백을 들어도 전혀 설레질 않았다. 그녀의 잔잔한 마음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미라벨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참 지독하게도 짓궂은 타이밍이다.
그녀가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다음에서야,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그녀에게 그의 사랑이 거추장스러워진 다음에서야.
“미안해요.”
미라벨은 덤덤히 말했다. 고백의 답으로 돌아온 사과에 리카르도는 충격을 받은 듯이 커다란 몸을 움찔했다. 미라벨은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애정의 끝에는 증오가 있지만, 증오의 끝에 애정이 없는 걸 어쩌겠어요. 우리 악연은 여기서 끝인 걸로 해요.”
“안 돼, 미라벨. 제발 다시 생각해 줘. 제발.”
리카르도는 어미에게 내쳐지는 어린 짐승처럼 절박하게 미라벨에게 매달렸다. 그는 허겁지겁 그녀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게 필요한 건 너뿐이야. 나는, 너만 있으면 돼. 내 전부를 다 줄게. 달라고 한다면 내 심장도 꺼내 줄게. 그러니 제발, 날 다시 사랑해 줘. 아니, 아니. 미워해 줘.”
“당신이 이럴수록 나는 더 지쳐요.”
“흐윽, 미라벨…… 제발…….”
미라벨의 치맛자락이 뜨거운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서 울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눈물만 떨구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며 소리 내어 흐느끼는 그의 모습에 미라벨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흑, 미라벨. 나를, 흐윽, 미워, 해 줘.”
리카르도는 두꺼운 팔뚝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세게 미라벨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정말로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그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리카르도는 차마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간청조차 하지 못하고, 미워해 달라고 사정하며 망가져 가고 있었다.
미라벨은 한숨을 쉬고서 리카르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녀린 손이 단단한 어깨 위에 살포시 놓이자 그의 몸이 일시에 굳었다.
리카르도는 흐느끼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울며 미라벨의 입에서 나올 말만을 기다렸다.
“마지막까지 이기적으로 굴 거예요?”
“……!”
미라벨의 차분한 질문에 리카르도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그녀를 붙잡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침실에 내려앉았다. 간헐적으로 리카르도가 눈물을 참는 소리만 작게 퍼질 따름이었다.
“리카르도.”
절박하게 미라벨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던 리카르도는 부드러운 음성에 눈을 홉떴다.
미라벨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지 조바심이 일곤 했다.
마수와 싸우던 때에 언뜻 그녀가 이름을 외친 듯도 했지만, 리카르도의 바람이 만들어 낸 환청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리카르도는 언젠가 미라벨이 용서해 주었을 때 이름을 불리고 싶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
미라벨에게 버림받을 때가 아니라, 그녀에게 용서받을 때에.
하지만 그때는 오지 않는다.
리카르도는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음을 통감하였다.
* * *
챙그랑!
수도의 중심부에 있는 아달베르토가의 컨트리 하우스.
“아아악!”
히스테릭한 여자의 비명에, 2층의 복도를 오가던 하녀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소리를 지른 주인공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사! 로잘린! 다 어딜 간 거야!”
마들렌이 담겨 있던 접시를 내던진 줄리아가 씩씩대면서 하녀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설렁줄을 당기고 외쳐도 하녀들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질 않았다.
이런 때에 줄리아의 눈에 띄면 화풀이 인형이 되기 십상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천 쪼가리 좀 판다고 감히 아달베르토가를 무시해?”
줄리아는 발을 구르다가 손에 들린 종이를 쫙쫙 찢었다. 마담 카트린의 의상실에서 보내온 청구서였다.
마담 카트린은 청구서와 함께, 밀린 의상값을 일시에 내지 않으면 아달베르토가와 거래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우아하게 돌려 말했지만 결국 골자는 그거였다.
“천박하게 돈이나 밝히고!”
줄리아는 이를 갈고서 눈을 부라렸다. 자신의 아버지야말로 천박하게 돈을 밝히는 인간의 대표라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은 모양새였다.
“왜 아무도 안 와!”
청구서 조각을 벽난로에 내던진 줄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다시금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예, 아가씨! 부르셨어요!”
한참이 지난 뒤에, 하녀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회색 머리의 하녀가 줄리아에게 다가오며 활짝 웃어 보였다.
“비앙카가 왔어요, 줄리아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뭘 해 드릴까요?”
살갑게 말을 붙이는 비앙카의 등장에 줄리아가 턱을 거만하게 치켜들었다. 이제야 조금 화가 풀렸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