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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93화 (94/120)
  • 93화

    “샤를!”

    리카르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를 향해 뛰어갔다.

    넓은 침대에 누운 샤를의 양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열을 앓고 있는 듯했다.

    “느때 삼쵸온…….”

    미라벨의 손길을 받으며 누워 있던 샤를은 리카르도를 힘겹게 부르며 눈을 떴다.

    촘촘한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싶더니, 물기를 머금은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히잉…….”

    리카르도와 눈이 마주친 샤를이 턱에 힘을 주다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열 때문에 힘들어서 눈물이 절로 나는 모양이었다.

    “흑, 힝…….”

    발갛게 익은 볼을 가로질러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는 모습을 보던 리카르도가 이를 악물었다.

    아이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있자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뿐인가. 손발이 벌벌 떨리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어떻게 해 줘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발레리오와 나눴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버렸다.

    “샤를…….”

    아이를 달래 줘야 하건만 목울대에서는 형편없이 흔들리는 소리만 나왔다.

    리카르도가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조막만 한 손이 이불 밖으로 빼꼼 나왔다. 샤를은 리카르도의 두 번째 손가락을 부여잡고서 쌕쌕 숨을 쉬었다.

    “삼쵸온, 샤를 아파요…….”

    아이의 호소에 리카르도의 눈가가 단번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꼬옥 쥐고 있는 작은 손을 바라보다가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괜찮다.

    지난번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나.

    치유 마법을 걸어 주면 바로 열을 내릴 수 있다.

    그러니까…….

    “잠깐만, 샤를.”

    샤를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 주려던 리카르도가 이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이에게 손을 붙잡힌 탓에 마법을 걸기가 수월치 않았다.

    당황한 리카르도의 호흡이 가빠졌다. 별거 아니다. 이 손이 안 되면, 다른 손으로 마법을 걸면 된다.

    그걸 아는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에서 생각이 자꾸 뚝뚝 끊겼다. 아픈 아이를 앞에 두고 있자니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대공.”

    샤를을 보며 숨을 거칠게 쉬던 리카르도의 귀로 차분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새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한 리카르도가 고개를 틀자, 미라벨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라벨. 샤를이…….”

    “알고 있어요. 진정하세요.”

    리카르도를 지켜보던 미라벨은 그에게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보여 주었다.

    유리병 속의 오렌지색의 액체를 멀거니 바라보는 리카르도에게 그녀가 말했다.

    “지난번이랑 똑같아요. 갑자기 열이 오르길래 우고가 준 약을 바로 먹였어요.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미라벨의 설명을 듣는 동안 리카르도의 심장이 차츰 원래의 박자를 찾았다. 그는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길게 숨을 쉬었다.

    “……다행이야.”

    리카르도는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샤를에게 별 이상이 없다니 다행인데, 놀란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졌다가 나온 것 같았다. 전장에서도 이처럼 혼비백산한 적은 없었는데.

    ‘그때 미라벨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문득,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손에 들린 약병을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샤를을 몰래 볼 생각으로 사용인들에게 저택을 비우라고 명했다.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인해, 미라벨은 아픈 샤를을 두고 혼자서 저택을 헤매야 했다.

    아이를 도와 달라고 할 사람을 찾아서. 정신없이.

    나중에 그게 리카르도의 지시 때문이었다는 걸 안 미라벨은 분노했다.

    당시 그는 그녀의 화를 풀어 주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정말로 뭘 잘못했는지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또다시 미라벨을 화나게 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는데.

    미라벨에게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줘 놓고는, 잘못했다고만 하는 게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미처 몰랐다.

    ‘이러니 미라벨이 내게 질렸겠지.’

    당연하다. 리카르도는 이기적이고, 극단적이고, 뻔뻔한 놈이니까.

    얼굴에서 손을 거둔 리카르도의 시선이 미라벨에게로 향했다.

    어느새 곤히 잠든 샤를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는 그녀를 보던 그가 목이 졸린 소리를 내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샤를의 얼굴을 부드럽게 닦던 미라벨이 눈을 깜박였다. 고개를 든 그녀가 한 손으로 시녀들에게 손짓을 했다.

    소피를 비롯한 시녀들이 방을 비우자, 미라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하세요.”

    “난, 이런…… 기분일 줄 몰랐어. 아이가 아프면 부모가 이렇게나 괴로워지는 줄은…….”

    “그랬겠죠.”

    덤덤하기 짝이 없는 어조였다. 하지만 그 짧은 대답이, 리카르도에게는 날카로운 검처럼 날아와 박혔다.

    미라벨은 그를 차분한 시선으로 보다가 샤를을 살폈다. 아이의 상태를 신중히 살피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난 일이에요.”

    “그래도, 미라벨.”

    “그때야 왜 그러는지 몰라서 놀랐지만 이젠 원인도 알았고 해결책도 있으니 괜찮아요. 샤를에게는 성장통이라고 설명했어요.”

    샤를을 바라보는 미라벨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는 아이를 보며 생긋 웃었다.

    “잘 자렴, 내 아가.”

    샤를에게 속삭이던 미라벨이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세골린데의 자장가인 듯했다.

    고요한 방에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상냥한 포옹처럼 온기를 퍼뜨렸다.

    리카르도는 멍한 얼굴로 미라벨과 샤를을 바라보았다.

    고열에 시달리던 아이가 엄마의 노랫소리에 편안한 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엄마와 아이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던 리카르도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생경한 게 당연하다. 리카르도에게 이런 기억은 없었으니까.

    그에게는 아플 때 엄마에게 기대고, 엄마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든 기억 따위 없었다.

    리카르도는 어머니를 좋아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머니는 리카르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를 볼 때마다 슬퍼하기만 했다.

    그녀는 때론 리카르도의 뺨을 쓰다듬으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이 울었다.

    ‘보고 싶어.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

    처음에는 리카르도도 이유도 모른 채 어머니와 함께 울었다. 하지만 차츰 머리가 커 가면서,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되며 어머니를 피하게 되었다.

    리카르도는 어머니의 눈물이 역겨웠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혐오스러웠다. 그는 그 자체로 부정의 증거였으니까.

    ‘엄마는 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 리카르도.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단다. 그 사람은…… 아주 높은 곳에 있지. 엄마가 닿지 못할 곳에.’

    리카르도가 어머니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쯤, 그녀는 매일을 눈물로 보냈다. 어머니는 처량하게 울며 제 남편의 형을, 황제를 그리워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의 애정을 바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리카르도는 순수한 애정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았다.

    그런 건 아이들을 현혹하는 동화와도 같은 허상이라고, 그걸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 치부했다.

    이토록 선명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어머니와 아르밀라는, 미라벨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고.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와의 부정의 증거를 꾸역꾸역 낳는 게 여자야.’

    미라벨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다. 그녀에게 어머니의 과오를 덧씌워, 힘들게 하였다.

    “……미라벨.”

    뒤늦게 자신의 진짜 잘못을 절절히 깨달은 리카르도가 미라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행동에 침실을 감돌던 자장가가 뚝 끊겼다.

    “갑자기 뭘 하는 거죠?”

    “네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

    리카르도는 허벅지 위에 얹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야 했다.

    미라벨은 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었다.

    리카르도는 그동안 미라벨에게 수없이 사죄하면서, 정작 왜 그녀를 괴롭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한다고, 날 버리지 말아 달라고만 했다.

    그것처럼 미련한 사죄가 없는데도.

    “말해 보세요.”

    미라벨의 차분한 음성에 리카르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서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너도 그럴 거라고 지레짐작했었어.”

    “그랬군요. 별로 놀랍지는 않네요. 사랑 없이 결혼하는 귀족이 한둘도 아니고.”

    미라벨의 차가운 대꾸에 리카르도의 어깨가 움칠했다. 그는 목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으려는 고백을 힘겹게 끌어 올렸다.

    “나는 너도 내 어머니처럼, 남편을 배신할 거라고 생각했어.”

    리카르도의 고백에 미라벨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남편의 형과 정을 통한 내 어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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