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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92화 (93/120)

92화

발레리오는 심각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도 야위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몸이 더 상해 있었다.

심지어 내상까지 깊게 입다니.

황궁에 온 리카르도를 만나러 온 발레리오는 자신이 접한 소식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어조로 치료를 받는 리카르도를 향해 물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마수한테 당했다고? 자네가?”

리카르도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보아하니 또 지난번처럼 사람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발레리오는 상처의 통증을 참는 그를 보다가 나시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곁에서 치료 과정을 지켜보던 나시르는 황태자의 시선에 입을 열었다.

“폭설이 길어져서 한동안 마수 토벌을 못 나가셨습니다. 그사이 마수가 늘어났고요.”

“아무리 개체 수가 불어났다 해도, 리카르도 비토레가 고작 마수에게 당했다는 게 말이 되나.”

“그건…….”

“내 실력이 줄었나 보지.”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카르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우고가 건네준 물약을 들이켜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지킬 건 지켰으니 됐어.”

“지켜? 뭐를? 아니, 근데 잠깐…….”

리카르도에게 질문을 던지던 발레리오가 불현듯 입을 작게 벌렸다. 지금 리카르도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발레리오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 전처럼 돌아온 건가? 괜찮아진 거야?”

“괜찮다는 게 뭔데?”

“나 좀 봐 봐.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시끄러워, 발레리오.”

“세상에!”

발레리오는 입을 틀어막고서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발레리오가 침대 옆의 소파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그래, 정신이 돌아왔으면 됐지. 체력은 금세 원래대로 회복할 거야. 1년 넘게 폐인처럼 지냈으니 전 같을 수야 없겠지.”

“지금 내가 미쳤었다고 말하는 건가?”

“제정신은 아니었잖아?”

발레리오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그는 진료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는 우고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공의 몸 상태는 어떻지?”

“내상이 깊으셔서 당분간 마력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원체 건강하셨던 덕에 운신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되도록 몸을 사리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나가 봐. 너희들도, 다 나가라.”

흡족하게 미소를 짓는 황태자의 명에 우고와 시종들이 인사를 하고서 나갔다. 발레리오는 문이 닫히자마자 리카르도에게 상체를 내밀며 말했다.

“이제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아까부터 귀찮게 하는군.”

리카르도가 인상을 쓰자 발레리오가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본새를 보아 하니 리카르도 비토레 맞네. 그래, 떠난 사람은 잊어야지. 역시 시간이 약이라니까.”

“떠난 사람이라니?”

“그야…….”

“아르밀라를 말하는 거라면, 그녀는 살아 있다.”

리카르도는 보랏빛 눈을 빛내며 단호히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주장에 발레리오의 얼굴이 싹 굳었다.

“이봐, 리카르도.”

“난 미친 게 아니야. 아르밀라는 살아 있다. 난 여기에 그녀와 함께 왔어.”

“뭐?”

발레리오는 리카르도의 얘기에 이마를 짚었다. 그는 희망에서 절망으로 고꾸라진 사람처럼 좌절하며 말했다.

“아직도 이 지경인 건가?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신 이때에 이런 상태라니.”

“발레리오.”

“지금 자네한테 도움을 구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발레리오!”

리카르도는 머리를 쥐어뜯는 발레리오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올리자, 리카르도가 차분히 말했다.

“나시르한테 물어봐. 내가 미친 건지.”

리카르도의 지목에 옆에서 초조해하고 있던 나시르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발레리오가 리카르도의 상태를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얘기만 뚝 떼어 놓고서 들으면 아르밀라의 죽음을 인정 못 했던 과거의 그와 똑같으니까.

그래서 나시르도 발레리오의 오해를 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라벨 왕녀의 정체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해도 되는지, 그리고 리카르도 앞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게…….”

나시르가 우물쭈물하자 리카르도가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다, 나시르. 네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진작 알아채고 있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여태 몰랐다는 게 도리어 말이 안 되지.”

“그러면 제가 어디까지 말하면 됩니까?”

“그녀가 곤란하지 않을 만큼만 말해.”

리카르도의 지시에 나시르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발레리오에게 말했다.

“정말인가?”

“예, 가주님은 우연히 아르밀라 님과 재회하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됐군!”

발레리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는 리카르도를 얼싸안으려다가 멈칫하고서는 헛기침을 했다.

“그, 그래서. 대공비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것까지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왜?”

“뭘 자꾸 묻나.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만 알았으면 됐지.”

리카르도가 발레리오의 의문을 잘라 내며 무심히 말했다. 나시르와 리카르도를 번갈아 보던 발레리오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잘 안 풀리고 있나 보군.”

“……나한테 도움을 구할 일이라는 게 뭔지나 말해 봐.”

송곳 같은 발레리오의 지적에 잠시 침묵하던 리카르도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발레리오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도와줄 건가?”

“자네가 날 도와준 만큼은.”

“그거론 좀 부족할 수 있겠는데.”

“뭐길래?”

발레리오를 보는 리카르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침대 헤드에 기댄 허리를 곧게 세우고서 입을 열었다.

“일단 말해 봐.”

* * *

샤를은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서 팔짱을 단단히 꼈다. 자기 나름대로 화가 많이 났다는 걸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신전에서 돌아온 미라벨은 샤를의 태도에 당황하며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니, 샤를?”

“어마 거진말해써.”

“내가?”

“샤를 차카게 이쓰면 느때 삼쵼 만나게 해 준다고 해짜나.”

샤를의 항의에 미라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수도까지 마차 여행을 하는 동안 칭얼대는 샤를을 그렇게 얼렀다.

샤를은 늑대 삼촌의 감기가 다 나았다면서 어째서 같은 마차를 타지 않고 오는지에 대해서 계속 물었다.

치료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설명이었던 모양이다.

“마짜도 디게 컨는데, 따로 오고.”

“그래서 속상했어? 어쩔 수 없었어. 소피랑 엄마랑 샤를까지 타니까 마차가 꽉 찼잖아.”

미라벨은 침대에 앉고서 샤를을 무릎 위에 앉혔다.

아이는 말로는 엄마가 원망스럽다고 하면서도, 미라벨의 품에 고분고분하게 안겼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불평을 종알대었다.

“샤를 코 하는 동안 어마 엄써써. 느때 삼쵼도 안 데려오구. 샤를 기다련는데.”

“그랬구나. 많이 화났어? 엄마 미워?”

“우으웅.”

미라벨의 질문에 샤를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러고서는 미라벨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또 그새 엄마가 자기를 두고 사라질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애정이 느껴지는 행동에 미라벨의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엄마가 잘못했어. 샤를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그러니까 화 풀어.”

“……웅.”

미라벨의 품속에서 꼬물거리던 아이의 검은색 정수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미라벨은 샤를의 머리를 쓰다듬고서는 소피를 불렀다.

“대공을 모셔 와. 샤를이 찾는다고 하고.”

“예, 왕녀님.”

미라벨에게 안긴 샤를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소피가 재빨리 대답했다. 미라벨은 소피가 방 밖으로 나가자 샤를을 고쳐 안았다.

황제의 부고를 접하고서 워낙 경황이 없어서 샤를에게 상황 설명을 제대로 못 해 줬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알려 줘야 했다.

“있지, 여기는 아르칸젤로의 황실이야. 황제 폐하가 하늘나라에 가셔서 인사하러 온 거야.”

“하라부지쩌럼?”

“응, 샤를의 할아버지처럼. 하늘나라에 가셨어.”

“그러쿠나.”

“그러니까 여기선 얌전히 있어야 해. 다들 슬퍼하고 있거든. 알겠지?”

“웅……!”

미라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샤를이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한결 느릿한 동작이었다.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미라벨이 샤를의 뺨을 감싸 쥐었다. 발그레한 아이의 볼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표정이 심각한 빛을 띠었다.

* * *

홀로 침실에 앉은 리카르도는 조용히 발레리오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는 두란테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했다.

‘최근 폐하께서 많이 안 좋으시긴 했지만, 그날은 상태가 양호하셨거든. 그런데 갑자기 새벽에 숨을 거두신 게 영 마음에 걸려.’

‘독살을 의심하는 건가? 용의자는 있고?’

‘황실에 욕심이 넘치는 자가 있잖아. 자네도 알고, 나도 아는.’

리카르도는 자연스레 떠오른 한 인물을 생각하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두란테 아달베르토.

발레리오에게 끈질기게 암살자를 보내고, 황제를 독살할 만한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그만한 탐욕을 가진 이는 또 없으니.

‘하지만 왜?’

리카르도는 미간을 구겼다. 두란테는 황제의 친우라는 덕을 톡톡히 보았다. 백합 독점 판매권을 따낸 것도 그래서였는데.

두란테가 황제를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을 것인가.

똑똑.

그의 생각을 비집고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리카르도가 매서운 눈으로 문을 바라보자, 익숙한 여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대공 전하, 미라벨 왕녀님께서 찾으십니다. 샤를 왕자님께서 전하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요.”

“지금 가지.”

리카르도는 소피의 얘기에 경계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는 복잡한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미라벨, 샤를.”

그리고 미라벨의 숙소에 당도하였을 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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