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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91화 (92/120)
  • 91화

    요정의 숨결.

    ‘요정의 숨결’은 세골린데의 백합 중에서도 최고로 일컬어지는 품종이었다.

    만개할 때 뿜어내는 향기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달콤하다는 이 꽃은, 미라벨 왕녀의 탄생을 기념하여 그녀의 아버지가 왕실 정원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개량한 품종이었다.

    이 꽃의 꽃잎은 마치 눈가루를 뭉쳐 만든 듯 눈부시게 새하얗고 반점 하나 없이 아름다우며, 향기는 실로 요정의 숨결같이 환상적이라고 한다.

    세골린데의 자랑이기도 한 이 꽃은 국외로는 절대로 수출되지 않는다. 그것을 키우는 재배법은 왕실의 극비 정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요정의 숨결’을 실제로 접하려면 세골린데에 방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합 투기에 눈이 돌아간 아르칸젤로인들은 너도나도 ‘요정의 숨결’을 수입하려 했다. 이 꽃의 구근 하나가 다른 백합 구근의 열 배는 호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모두 수포가 되었다.

    세골린데 왕실이 ‘요정의 숨결’에 대한 수출 허가를 내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 국왕은 자신의 죽은 남편이 생전에 딸에게 준 선물을 세골린데만의 것으로 간직하려 했다.

    그 선물을 받은 미라벨 왕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세골린데인에게 ‘요정의 숨결’은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왕족의 유산이자, 세골린데의 자존심이었다.

    외교적인 이유로 아주 가끔 꽃송이를 외국의 지도자에게 선물하는 경우는 있어도, 구근을 주는 법은 없었다.

    두란테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 있었다.

    ‘요정의 숨결’의 구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지금 그가 처한 경제적 위기는 단숨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가 왕녀님께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할까 합니다.”

    탐욕으로 빛나는 두란테의 눈을 응시하던 미라벨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순간 그의 입에서 ‘요정의 숨결’이 나와 놀랐지만, 곧 어렵지 않게 그 속내를 간파할 수 있었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네.’

    미라벨은 두란테에게 보냈던 흥미를 거두고서 서늘하게 말했다.

    “내게 제안할 거면 기사들을 끌고 나타나질 말았어야지. 마치 겁박이라도 당하는 것 같군.”

    “오해이십니다. 워낙에 긴밀한 얘기를 나누려다 보니…….”

    “뭘 그렇게 조심하지? 내가 신전에 온 걸 바로 알 정도로 황실 곳곳에 그대의 귀가 있는데.”

    질책과 비아냥을 담아 말한 미라벨이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그동안 ‘요정의 숨결’을 탐내어 접근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이처럼 불쾌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억만금을 준다 한들 그에게는 절대로 ‘요정의 숨결’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제 의도를 곡해하신 듯합니다, 왕녀님.”

    두란테는 미라벨의 공격에 당혹스러워하며 허겁지겁 말했다.

    “왕녀님을 뵙기만을 목 빼고 기다렸더니, 마음이 급해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뵈려고 노력을 한 것뿐이니, 부디 언짢게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무슨 제안을 하려고?”

    “혹시 아달베르토령에 관심은 없으십니까? 제국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이지요. 꼭 아달베르토령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제국의 땅 어디든, 왕녀님의 깃발을 꽂고 싶은 땅이 있으시다면 제가 그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누가 들으면 백작이 황제라도 되는 줄 알겠군.”

    미라벨은 팔짱을 끼고서 두란테를 응시하였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감탄으로 받아들이고서 빙긋이 웃었다.

    “‘요정의 숨결’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이지요.”

    “꽃은 한 송이 가져왔지만, 그건 장례식에서 황제의 무덤에 바쳐야 해서. 백작에게 내어 줄 수 없겠어.”

    “아니요, 제가 원하는 건 구근입니다.”

    “구근?”

    미라벨은 두란테의 얘기에 인상을 썼다.

    구근이라니. 백합 시장에서는 꽃보다 구근의 가치가 월등히 높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꽃과 구근의 가격은 엇비슷하였으나, 백합 투기가 과열된 지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그 차이가 벌어졌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구근 하나에 작은 저택을 넘겨주는 게 맞는 장사다. 토지를 준다는 두란테의 제안은 과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품종에 한해서일 뿐. ‘요정의 숨결’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여태 이 꽃의 구근을 받아 간 이는 없었다. 설령 제국의 황제가 요청한다고 해도 거절할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 백작 따위가 제 욕심을 채우겠답시고 나서다니. 기가 막혔다.

    심지어 다른 자도 아닌 두란테가 아닌가.

    아르밀라를 천시하며 뺨을 때리고, 그녀에게 막말을 퍼부었던.

    ‘감히 내 아버지의 선물을 내어 달라고?’

    미라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불쾌함을 조용히 억눌렀다.

    화가 난다고 소리부터 지르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다. 두란테와 더 엮일 일을 만드느니 이쯤에서 대화를 끊는 게 낫다.

    미라벨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서 입을 열었다.

    “그건 어렵겠어, 백작. ‘요정의 숨결’ 구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제국에 내 깃발을 꽂고 싶지도 않고.”

    “땅이 필요 없으시다면 금은 어떠십니까? 왕녀님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꽃이니, 왕녀님과 똑같이 생긴 황금 조각상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두란테의 설득에 미라벨의 눈가가 움칠했다.

    ‘뭔가 수상한데.’

    두란테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요정의 숨결’의 희귀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좀 정도가 지나치지 않나.

    두란테의 제안은 적극적인 걸 넘어서 절박하기까지 했다.

    미라벨이 알기로 두란테의 상단은 제국 내 백합 판매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백합이 아쉬울 리 없을 텐데. 이렇게까지 해서 구근을 손에 넣으려는 이유가 대체 뭘까.

    “그럴 만한 재력이 있으면서 굳이 구근을 얻으려는 이유가 뭐지?”

    “그, 그게…….”

    미라벨의 날카로운 질문에 두란테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지금 그의 부는 허상이다. 백합을 더 구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말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구근을 사들이느라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왕녀에게 그 사실을 이실직고할 순 없다.

    식은땀을 흘리는 두란테를 관찰하던 왕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요정의 숨결’은 세골린데만의 것이니까.”

    “왕녀님!”

    “이만 가자, 소피.”

    “왕녀…….”

    “아버지!”

    미라벨이 두란테에게 등을 돌렸을 때였다. 기도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까 말까 한, 아주 앳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여기 계셨어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여자는 씩씩대면서 두란테에게 다가갔다. 그와 똑같은 갈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한 여자는 보석을 잔뜩 단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담 카트린이 잔금을 치르기 전까진 제 드레스를 내주지 못하겠대요! 어서 해결해 주세요!”

    “줄리아! 여기가 어디라고!”

    두란테는 딸의 투정에 눈에 띄게 당황하고서 미라벨의 눈치를 살폈다. 줄리아는 아버지가 다른 곳을 바라보자 그의 소매를 잡으며 칭얼거렸다.

    “어서요! 지금 가봉을 하지 않으면 장례식 때 입을 드레스가 없단 말이에요!”

    “대충 아무 검은 드레스나 입으면 되잖니!”

    두란테는 낮게 목소리를 깔고서 이를 갈았다. 그가 부리부리한 눈을 홉뜨며 말하자, 줄리아는 언제 기세를 부렸냐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날은 대공 전하도 오신다면서요. 저는 그분께 잘 보이고 싶어서…….”

    줄리아의 입에서 나온 ‘대공’이라는 단어에 미라벨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백작 영애, 줄리아 아달베르토.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버리고서 혼인할 예정이었던 아달베르토 백작의 딸.

    “제가 성인이 되고서 처음 뵙는 자리란 말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우리의 성혼 선언을 하지도 않고 돌아가셨으니 제가 어떻게든 그분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쉿! 조용히 해!”

    줄리아와 두란테의 대화를 듣던 미라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갔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붉은 방에 가둬 놓고선 다른 여자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었다.

    알고 있던 일이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인데도, 막상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그의 약혼녀를 보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웠다.

    ‘울렁거려.’

    미라벨은 가슴을 가볍게 주먹으로 두드렸다. 명치에 뭐가 걸린 듯이 갑갑했다. 그녀는 익숙한 고통에 진저리 치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왜 여기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모욕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문득, 사랑이니 증오니 하는 모든 감정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리카르도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에 넌덜머리가 났다.

    “아버지, 곧 있으면 의상실이 문을 닫는단 말이에요! 지금 당장 가야…….”

    미라벨은 장례식이 아니라 결혼식 준비를 하는 것처럼 소란을 떠는 줄리아를 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턱을 당겨 물고서는 미소를 지어냈다.

    “급하다니 가 보게, 백작. 얘기는 끝났으니.”

    “예? 와, 왕녀님!”

    미라벨은 두란테가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은 두란테를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차갑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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