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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90화 (91/120)
  • 90화

    마차에서 내린 미라벨은 망토의 깃을 붙잡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금발을 정리하는 그녀의 앞에는 으리으리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

    대륙을 통치하는 권력의 중심, 아르칸젤로 제국의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

    미라벨은 긴장한 얼굴로 황제의 본궁을 바라보았다. 본궁 지붕 꼭대기에 꽂힌 깃대에는 거꾸로 뒤집힌 황제의 휘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황제의 서거를 알리는 표식이었다.

    황제가 죽었다.

    긴 투병 끝에, 그는 홀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했다. 하여 미라벨은 리카르도와 함께 황궁으로 왔다.

    세골린데의 사절로서 황제에게 조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리카르도의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지만, 그게 황제의 장례식에 불참할 핑계는 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우고와 함께 따로 마차를 타고 왔다.

    “장례식은 일주일 뒤에 열릴 거야.”

    황제의 깃발을 보고 있던 미라벨의 귓가에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리카르도였다. 미라벨과 시선을 마주치던 그가 뒤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미라벨의 뒤에는 곤히 잠든 샤를과 그를 안고 있는 소피가 있었다. 리카르도는 샤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만 참아 줘.”

    미라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그 뒤에 미라벨은 곧장 세골린데로 돌아갈 것이다. 이미 루이즈에게 기별을 넣어 놓았다.

    루이즈는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에 놀라면서도 미라벨과 샤를의 상태를 걱정하였다. 외유가 너무 길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미라벨은 최대한 빨리, 일정을 마무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에서 바로 세골린데로 갈 거예요.”

    “……알고 있어.”

    다시금 확인하듯이 내뱉는 말에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미라벨을 응시하다가 그녀의 망토로 손을 뻗었다.

    “수도에서 이건 필요 없을 거야.”

    리카르도의 말마따나, 수도 날씨는 레나토와는 달리 포근했다. 마치 계절을 가로질러 황궁까지 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왕녀님.”

    리카르도가 미라벨의 망토를 벗겨 주는 때에, 황궁의 시종장이 다가왔다. 그는 리카르도에게서 왕녀의 망토를 건네받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별궁으로 모시겠습니다.”

    미라벨은 옅은 미소를 지은 뒤 시종장을 따라나섰다. 리카르도도 조용히 그녀의 곁을 따라 걸었다.

    황궁은 황제의 본궁, 그리고 크고 작은 별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작은 섬 같은 별궁 건물들을 스쳐 지나가던 미라벨은 베일을 슬며시 벗었다.

    현재 ‘아르밀라’의 얼굴을 아는 이는 수도에 없다. 그러니 굳이 여기서까지 베일을 쓰고 있을 필요도 없다.

    두란테 백작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해서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왕녀를 보고서 아르밀라를 연상하지 못할 테니까.

    이따금 편견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두란테야말로 그 표본이나 마찬가지인 자였다.

    빈대같이 천한 것. 그것이 아르밀라에 대한 그의 평가였다.

    설령 미라벨이 아르밀라와 똑같은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하고 있어도, 두란테는 그 둘이 동일인이라는 발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입니다.”

    시종장은 깍듯한 예를 갖추며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미라벨이 멈춰 서자 경비병들이 문을 천천히 밀어 열었다.

    숙소는 화사하고 아늑했다. 화려하긴 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진 않았다. 상중이라 장식을 자제한 듯했다.

    넓은 침실에 딸린 응접실까지 확인한 미라벨이 소피에게 샤를을 침대에 눕히도록 했다. 그녀는 방을 마저 둘러보다가 시종장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는 어디에 모셔져 있지?”

    “황궁 신전에 계십니다.”

    시종장은 대답을 하고서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를 불러들였다.

    “왕녀님께 황궁 안내를 해 드리도록.”

    시녀에게 임무를 맡긴 시종장이 미라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끝까지 안내해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도 숙소까지 모셔다드려야 해서요.”

    “여기는 됐으니 이만 가 보게.”

    왕녀의 허락에 시종장이 거듭 인사를 하고서는 리카르도에게 다가갔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미라벨을 보더니, 우고와 함께 방을 나섰다.

    이내 문이 닫히자 미라벨은 피로한 얼굴로 눈가를 문질렀다.

    갑자기 황궁에 오게 된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차를 타기 싫다고 칭얼대는 샤를을 겨우 달래서 오느라 진이 다 빠진 듯했다.

    하지만 피곤하다고 해서 황궁에 온 이유를 잊어선 안 될 일. 외국의 왕족으로서 조문을 왔으니, 황제를 모신 신전부터 가 봐야 한다.

    미라벨은 거울 너머로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한 뒤 소피를 불렀다.

    * * *

    황궁 내의 신전은 봄기운을 가득 끌어안은 바깥과는 달리 공기부터 서늘했다. 지상에 있는데도 지하에 있는 듯이 습하고 축축한 게, 오싹하기까지 했다.

    “이곳입니다.”

    사제의 뒤를 따라 신전 깊은 곳으로 들어온 미라벨은 석문이 열리자 숨을 들이켰다.

    드넓은 기도실의 정중앙에 기다란 관이 모셔져 있었다. 황제의 관이다.

    “세골린데의 미라벨 에티에네트 왕녀님이십니다.”

    미라벨을 안내한 사제가 관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물러났다.

    기도실이 텅 비자 미라벨은 경건한 표정으로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창문에서 갈라져 들어오는 햇살을 가로질러 걸어가 관 앞에서 우아하게 몸을 숙였다.

    고인에 대한 예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미라벨은 짧지 않은 묵념을 마치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조문객들이 그러했듯이 관 옆에 전시된 하얀 백합 한 송이를 들었다.

    정식 장례식은 일주일 뒤에 치러지겠지만, 주요 인사들은 이렇게 개별적으로 미리 황제에게 꽃을 바친다.

    아르칸젤로 제국에서 황제의 장례식은 차기 황제의 즉위식 전에 치러지는 의례적 행사에 가깝다. 따라서 조문을 위한 시간은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례식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외교적 결례를 범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미라벨은 세골린데 왕족으로서 최대한의 예를 표하고 싶었다. 그녀는 황실까지 온 이상 제국과의 평화 협정을 마무리 짓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제국에 호의를 드러내서 나쁠 건 없다.

    ‘이 귀한 백합을 여기에 쓰다니.’

    미라벨은 파리하게 빛나는 흰 꽃을 보며 생각했다.

    고인에게 건네는 용도의 흰 꽃으로는 보통 장미나 국화가 사용된다. 백합값이 치솟은 탓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항이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백합으로 관을 장식하는 건 웬만해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였다.

    ‘사라는 백합에 둘러싸여 있었지.’

    미라벨은 무심코 백합으로 치장되었던 사라의 관을 떠올렸다.

    왕녀의 시신으로 오해받은 탓에 그렇게 꾸며진 것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나쁘지 않은 처우였다. 사라도 백합을 좋아했으니까.

    미라벨은 생각을 접고서 하얗게 분칠이 된 황제의 얼굴 옆에 백합을 내려놓았다.

    백합에 둘러싸인 채 잠들어 있는 중년의 남성을 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왜 저러지?’

    미라벨의 시선은 가슴께로 다소곳이 모인 황제의 손끝으로 향해 있었다. 사후 경직이 와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황제의 손을 바라보던 미라벨이 고개를 돌렸다.

    “소피,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왜 그러세요, 왕녀님?”

    기도실 입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소피가 미라벨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온몸에 보석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중년의 남성이 기사들을 거느리고서 나타났다. 두란테였다.

    그는 아달베르토 가문의 상징인 흰 염소의 머리가 조각된 인장을 단 기사들 사이로 걸어 나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두란테는 미라벨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허공에 과장되게 휘두르고서 예를 표해 보였다. 그러고선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살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왕녀님께서 오시기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두란테 아달베르토 백작입니다.”

    두란테의 인사를 받는 미라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궁에서 마주치게 될 거라곤 짐작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미라벨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서는 두란테를 응시했다. 그녀의 뺨을 서슴없이 내리쳤던 남자가 지금은 서글서글하니 웃고만 있었다.

    왕녀가 인사를 받아 주지 않자, 두란테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방금 당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길입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왜지?”

    미라벨은 두란테를 경계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냉랭함에 당황한 표정을 짓던 두란테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미라벨과 그의 시선이 겹쳐지자, 두란테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 이런.”

    두란테는 눈썹을 일그러뜨리고선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반응에 미라벨의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인간이었다.

    두란테는 바르게 서서는 당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왕녀님께선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나 보군요. 제 소개부터 다시 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을 들으면 모두가 알아본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거만한 말이었다. 미라벨은 그에게 무심히 말했다.

    “됐소. 백작의 소개를 들으러 온 게 아니야.”

    “하하,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왕녀님, 저는 보통 귀족과는 다릅니다. 귀족회의 원로이자, 대공 전하의 대부이지요.”

    두란테는 은밀하게 입가에 손을 대며 싱글벙글 웃었다.

    자신이 웬만한 소국의 왕족이 아쉽지 않은 권력자라는 걸 알려 준 그의 눈에 오만한 빛이 서렸다. 그러나 미라벨은 무덤덤하게만 굴었다.

    “신전까지 무장한 기사들을 이끌고 온 걸 보면 확실히 보통 귀족은 아닌 듯하군. 인사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으니 그럼 이만. 가자, 소피.”

    “예, 왕녀님.”

    “잠깐만요! 왕녀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요정의 숨결’에 관해서입니다.”

    두란테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미라벨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두란테는 왕녀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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