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리카르도가 준 것은 비토레가 저택의 사용인 명단이었다. 집사인 발터와 하녀장인 카타리나 부인부터 시작해서, 말단 하녀들의 이름까지 빼곡히 적힌.
미라벨은 혼란스러운 어조로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이걸 왜 제게 보여 주는 거죠?”
“거기서 몇몇 이름을 골라내 주었으면 합니다.”
“어떤 이름이요?”
“이 저택에서 계속 일할 자격이 있는 자들의 이름.”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시겠어요?”
“대공비를 잃고서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을 하려는 겁니다.”
리카르도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미라벨에게 자리를 권하고서 말을 이었다.
“그녀가 도망치고서 사용인들을 모두 만나 보았습니다. 한 명도 빼놓지 않고. 그런데 놀랍게도 다들 그녀를 싫어하더군요. 우습지.”
“…….”
“그때 잠깐 고민했었죠. 이것들을 전부 죽여 버려야 하나.”
덤덤하지만 서늘한 말투에 미라벨은 들고 있던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가 지금 진심이라는 건 굳이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살벌하게 번뜩이는 보랏빛 눈동자에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전부 다 죽여 버리면. 그러면 아르밀라를 향한 속죄가 되지 않을까. 감히 대공비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고 구박한 것들은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까 고민도 했는데. 결국 그만두었습니다.”
“……왜요?”
“아르밀라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없어지는 게 싫어서.”
미라벨의 질문에 대답한 리카르도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살기로 형형했던 눈빛은 어느새 뜨거운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르밀라가 내 곁에 남긴 흔적이랄 게 없었거든. 낡은 드레스 몇 벌, 그리고 핏자국이 있는 팔찌. 그게 다였는데.”
리카르도는 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였다. 그의 얼굴이 몇 분 사이에 더욱 수척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아르밀라를 찾아 헤매던 그때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사용인들까지 전부 다 해고해 버리면 이곳에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나밖에 안 남을 테니까. 한 명이라도 더, 아르밀라를 알고 있는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싶어서. 그래서 남겨 뒀습니다.”
뜻밖의 고백에 미라벨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그리워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움의 깊이를 실감한 적은 없었다. 리카르도가 그랬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딱히 와 닿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얘기를 듣고 있자니 새삼스레 리카르도의 사무친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았다.
“이제 와 해고하려는 이유는요? 더는 이들이 필요하지 않은 건가요?”
“해고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땐 라그나르 다리가 부서진 뒤였거든. 레나토에 발이 묶여 있는데 해고해 봤자 의미도 없잖아. 다 여기에 머물러 있을 텐데. 그리고…….”
리카르도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서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덜 이기적으로 굴어야겠다 싶어져서. 그러면 조금이라도 덜 미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질문 같기도, 대답 같기도 한 나직한 말에 미라벨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동안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비난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마치, 정말로 속죄라도 하는 것처럼.
“입으로만 사과하는 건 의미도 없고, 당신을 속상하게만 하잖아.”
미라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리카르도가 말을 이었다. 어느새 그의 말투는 ‘왕녀 미라벨’이 아니라 아르밀라를 대하듯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나시르도 미라벨도, 그 점을 굳이 짚어 내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당신이 골라 줘. 아르밀라를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리카르도의 설명이 끝나자 미라벨은 명단으로 시선을 내렸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바람에,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잔뜩 눈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미라벨은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려 하자 눈을 재빨리 닦아 내고서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레나토와는 상관없는 사람인걸요. 곧 있으면 여길 떠날 사람이 이런 걸 정해도 되나요?”
“왕녀는 내 전 약혼자이니까. 그런 핑계로라도 안 될까.”
리카르도의 다정한 설득에 미라벨의 가슴이 작게 들썩였다. 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고서 명단의 이름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명단을 가득 채운 깨알 같은 글씨 중에서,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이름은 단 두 개뿐이었으니까.
루체 코르넬리아, 카타리나 지아코모.
그 둘 말고는 아르밀라의 손을 잡아 준 이가 없었기에.
“이게 다인가.”
미라벨의 지목에 리카르도가 심란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시르와 에치오를 자를 건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다면 더 없어요. 새 집사는 당연히 제외하실 테고.”
미라벨이 결론을 내리자 리카르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보다 훨씬 짧은 명단에 당혹스러워했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집사 발터와 카타리나 부인, 하녀 루체를 제외한 사용인 전원을 해고한다. 그리고 새 사용인을 구한다는 공고를 내서 비토레가의 사용인을 대대적으로 교체한다는 걸 알리도록. 추천장은 기밀 유지 서약서를 쓴 자에 한하여 주는 것으로 하고.”
“알겠습니다.”
나시르에게 지시를 내린 리카르도가 미라벨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해고 사유는 대공비에 대한 능멸죄다. 그 이유를 꺼내면 모두 혀가 쏙 들어가겠지.”
“예, 가주님.”
나시르는 리카르도의 명을 꼼꼼히 받아 적고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나시르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단호히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너무 늦어서 미안하기만 할 뿐이야. 진작에 했어야 했는데, 네 그림자라도 잡고 싶어서 미련을 떠느라 늦어졌어.”
리카르도의 부드러운 음성에 미라벨의 가슴 한편이 저려 왔다.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고서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서 말했다.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으니, 내일 떠날게요.”
“그렇게나 빨리?”
미라벨의 통보에 리카르도가 당황하며 일어났다. 그는 그녀의 양손을 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나보고 어디든 가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요.”
“그래, 네가 원하는 데라면 가야지. 그래도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돼? 내일은 너무 빠르잖아. 일주일, 아니지. 하루만 더 있다가 가. 딱 하루만.”
미라벨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하다간 리카르도를 용서해 주고 싶어질 것 같아서였다.
무릇 과거는 갈수록 흐려지고 현재만이 선명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예전에 당했던 것보다도, 지금 그가 보이는 속죄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너무 오래 있었어요. 제국의 수도에 가지도 못했는데. 레나토에서 시간을 다 썼으니까요. 가야죠.”
“수도로 갈 건가? 그럼 나도 함께 갈게. 내가 호위하겠어.”
“그럴 것 없어요.”
리카르도의 제안을 미라벨이 바로 거절했다. 그녀를 지키느라 상처를 입고서도 또다시 나서겠다는 게 전혀 반갑지 않았다.
미련한 그가 갑갑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세골린데로 돌아갈 거예요. 수도에 가기에도 시기가 애매하니까. 기사만 몇 붙여 주세요.”
“그러느니 내가…….”
“괜찮다니까요.”
“가주님!”
리카르도와 미라벨이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조금 전 방을 나섰던 나시르가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리카르도가 미간을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노크도 없이.”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나시르는 저벅저벅 걸어 리카르도의 책상 앞에 황금색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두루마리를 봉한 독수리 인장을 본 미라벨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양 날개를 펼친 독수리. 제국 황제의 인장이다.
미라벨은 왕녀로서 아르칸젤로 제국 황제의 인장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아르칸젤로 황제의 인장은 도장을 찍는 실링 왁스의 색에 따라 용도가 나뉜다.
은색은 사교적 편지에 쓰이고, 황금색은 외교 문서에, 그리고 붉은색은…….
“긴급한 건가 봅니다.”
전시나 매우 화급한 상황에.
“그동안 황실에서 전서구를 보냈지만 눈바람 때문에 당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라그나르 다리가 고쳐지자마자 이걸 보냈다더군요.”
리카르도는 나시르의 설명을 흘려들으며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었다.
현재 황제의 사자가 저택의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으나, 예를 갖출 새가 없어 나시르가 바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건…….”
빠르게 두루마리를 훑어서 보던 리카르도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고서 두루마리를 확 접었다. 그러고선 자신을 지켜보는 미라벨을 향해 말했다.
“당장 황궁으로 가야겠어. 왕녀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