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미라벨은 정신없이 리카르도를 향해 뛰어갔다. 시야가 마구 흔들리고, 주변에서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함께 뛰어오던 나시르가 뒤에서 뭔가 말했지만, 미라벨에겐 들리지 않았다.
어서 리카르도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필이면 응접실은 검은 방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탓에 분주히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숨이 목 끝까지 턱턱 차올랐다.
“하아, 하아. 하아…….”
그리고 드디어 리카르도의 침실 앞에 섰을 때.
미라벨은 치맛자락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을 풀고서 호흡을 골랐다.
뛰어서 그런 건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마치 온몸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쿵, 쿵, 하고 요란한 박동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미라벨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오려고 뛰어왔으면서, 정작 도착해서는 방 안으로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라벨은 멀거니 리카르도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우고와 사용인들이 그를 에워싼 탓에, 사람들 사이로 흑발만 언뜻 보였다.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인영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단지 그의 머리카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미라벨.”
문간에 서 있던 미라벨은 방 안에 퍼지는 깊은 저음에 움찔했다.
리카르도의 부름에,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갈 수 없었다. 발이 마치 땅에 들러붙은 것 같았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서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레나토에 돌아왔을 때보다 한결 더 해쓱해져 있었다.
날렵했던 턱 선이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고 짙은 눈썹 아래의 또렷한 눈매가 도드라졌으며, 눈 밑은 움푹 파여 어두운 그늘이 고여 있었다.
건장했던 몸은 근육만 남기고 지방이 죄다 빠진 듯, 벗은 상체에는 군더더기라고 할 만한 게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야위었다고 해서 빈한해 보이진 않았다. 인상이 더욱 매섭고 위태로워져, 도리어 절로 무릎을 굽히게 만드는 삭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퍼지는 살벌한 냉기와 달리 미라벨을 보는 보랏빛 시선은 애처롭기만 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히자, 방 안을 채우고 있던 자들이 자리를 떴다.
우고와 카타리나 부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방을 나가고 나시르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도, 미라벨은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동안…….”
“……어째서.”
리카르도가 적막을 가르며 말을 건넸을 때, 미라벨은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달싹였다.
차마 리카르도를 더 바라볼 수 없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목이 뜨겁게 달구어져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왜…….”
미라벨은 눈을 질끈 감고서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
“왜 그랬어요?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거예요?”
미라벨은 닫힌 문에 기대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고,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어요.”
“…….”
“무모해도 너무 무모하잖아요.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검기를 두 번씩이나…….”
“그래야만 했으니까.”
리카르도는 덤덤히 대답했다. 바스락하고 이불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침대의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킨 리카르도가 한 걸음씩 천천히 떼어 내며 미라벨에게로 다가왔다.
이내 미라벨의 머리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얼굴을 가린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고, 턱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고 있었으니까.
“울지 마.”
다정한 음성이 들려오고, 이어서 커다란 손이 가는 팔목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베일을 걷고 갸름한 턱을 쥐고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가 울지 않게 하려고 한 일이었어. 너와 샤를을 지켜야만 했고, 그러려면 그 수밖에 없었거든.”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젖은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의 손길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시야에 파리한 얼굴이 들어왔다. 미라벨은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죽는다 해도?”
“죽는다 해도.”
리카르도는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마수가 날뛴 건 그간 임무를 게을리한 내 탓이지. 올해 토벌을 건너뛰지만 않았어도 그 사달은 안 났을 테니까.”
“그게 왜 당신 때문이에요. 혹한이 길어져서, 그래서 마수들이 굶주려서 그랬던 거잖아요.”
“아니, 네게 일어난 불운은 전부 다…… 내가 불러들인 거야. 그러니까.”
미라벨의 눈물을 닦아 주던 리카르도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는 붕대가 칭칭 감긴 복부를 감싸 쥐고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대공!”
놀란 미라벨이 부축해 주려 하자, 리카르도가 그녀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요. 붕대에 피가 새어 나오고 있잖아요!”
미라벨이 리카르도를 침대로 이끌자, 그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리카르도는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맹세하듯 말했다.
“걱정 마. 네 불행은 모두 다 내가 가져갈게.”
“일단 어서 침대에 누워요. 알겠으니까.”
“그새 라그나르 다리 보수가 다 끝났다더군.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황궁이든, 세골린데든. 보내 줄게. 어딜 가든, 윽, 내가…… 지켜 줄게.”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부축을 사양하며 문을 짚었다. 한사코 침대로 가지 않고서 버티려는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누가 지켜 달라고 했어요? 누가, 나 대신 불행해져 달라고 했냐고요!”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단단한 어깨를 치며 외쳤다. 미련한 그의 행동에 화가 났다. 화가 나고, 속상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하고서는, 누굴 지켜 주겠다는 건지.
곁에 있어 달라고 매달릴 땐 언제고, 왜 그녀의 등을 떠미는 건지.
미라벨은 그동안 리카르도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깨어나면 할 말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아직도 다 정리하지 못했을 정도로.
우선은 고맙고, 또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또 그런 반면에 그의 무모함에 화가 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감정을 제쳐 두고서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야속하다.
그녀의 고민도 모르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만 하는 남자가 야속하고, 너무 야속해서. 속상했다.
“……가지 말라며.”
미라벨은 눈물이 어린 눈으로 리카르도를 노려보았다. 뿌옇게 번진 시야 속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려 와, 미라벨은 속상했다.
“나보고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버리지 말아 달라고, 떠나지 말라고 했잖아요. 당신 입으로, 내게 그랬잖아요.”
“그건…….”
미라벨의 추궁에 리카르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곤란해하며 입술을 짓씹자, 미라벨이 마구 퍼붓듯이 말했다.
“지금 나한테 이러는 게 이기적이라는 거, 알고는 있어요? 당신이 날 지키겠다고? 내 불행을 다 가져가겠다고? 그거 다 당신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잖아요. 지키지 마요. 날 지키겠답시고 나서지도 마. 나 때문에 또 다치고 침대 신세를 지는 걸 보느니, 아예…….”
“내가 죽는 게 더 네 마음이 편했을까?”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너는 날 보면 늘 화를 내고, 속상해하고, 슬퍼하기만 하잖아.”
리카르도의 대꾸에 버럭 화를 내던 미라벨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덤덤하게 사실을 말하는 리카르도의 발언에 가슴이 아팠다.
여기서 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 미워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미라벨이 손을 떨구고서 입을 일자로 다물자,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해.”
“……침대로 가요. 환자잖아.”
미라벨은 가까스로 차분히 말했다. 목이 메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고마워.”
리카르도는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무거운 걸음으로 침대로 돌아갔다. 누워 있는 동안에 우고가 계속 붙어서 살폈음에도, 체력이 떨어진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갈수록 예전의 강건함을 잃어 가는 리카르도의 모습에 미라벨의 마음이 아파 왔다.
왜 자꾸 아프고, 괴로워하는지.
정말 아프고 괴로웠던 건 아르밀라였는데. 왜 그가 괴롭힘을 당했던 것처럼 구는 건지.
‘이러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더 미워해.’
별것 아닌 얘기에도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부터 하는 리카르도의 뒷모습을 보는 미라벨의 속이 쓰라렸다.
리카르도가 일어나면 모든 게 선명해질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마음에 낀 안개가 더욱 자욱하니 짙어지고만 있었다.
* * *
“우선은 수도로 가는 길이 막힌 동안 장사를 못 한 이들에게 보상부터 해 줘야겠군. 보상금은 예산에서 충당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미라벨은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가만히 리카르도의 지시를 들었다. 그의 곁에는 대공의 명을 꼼꼼히 받아 적는 나시르가 서 있었다.
리카르도는 깨어난 후, 그동안 밀려 있던 업무에 바로 돌입했다.
나시르가 대부분의 일을 해 오긴 했지만 그래도 대공이 직접 처리해야 할 일까지는 손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둘은 바로 회의에 돌입했고, 미라벨은 지금 그 자리에 끼어 있었다. 리카르도가 불러서였다.
하지만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지시 사항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골린데의 왕녀가 레나토의 일을 속속들이 알아도 되는지부터가 신경이 쓰였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니, 잠시만 기다려 줘요.”
결국 미라벨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리카르도가 황급히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는 나시르에게 눈짓을 하고서 그녀에게 말했다.
“왕녀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중요한 일입니다.”
“그게 뭔가요?”
리카르도의 얘기에 그대로 방을 나서려던 미라벨이 몸을 틀었다. 그녀가 흥미를 보이자, 리카르도가 나시르에게 명단 하나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다리도 복구되었으니 밀린 일을 해야 해서. 여기에 적힌 이름들부터 봐 주시겠습니까?”
리카르도가 넘겨준 명단을 본 미라벨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