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샤를, 괜찮니?”
미라벨은 황급히 달려와 아이를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아이를 끌어안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미라벨은 숨을 헐떡이며 샤를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시야에 붉은 방이 들어오지 않도록,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도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하아, 샤를, 하아…….”
“샤를 갠짜나, 어마.”
미라벨에게는 샤를이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귀가 먹먹해지며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렸다. 동시에, 절박한 여인의 절규가 미라벨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만, 그만하세요! 전하! 전하, 제발!’
불쌍한 아르밀라의 애원.
‘조용히 해. 저택 사용인들을 다 부르고 싶지 않으면.’
그리고, 그녀에게 고통과 치욕을 안겨 주었던 잔인한 리카르도의 음성.
붉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과거의 기억이 무섭게 몸집을 키워 미라벨을 덮쳐 왔다. 미라벨은 소름 끼치는 기억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붉은 방.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다시 보게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은 공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끔찍한 장소.
미라벨이 샤를을 낳지 못하게 하려고, 임신을 못 하게 하려고 리카르도가 저지른 짓들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그녀를 찔렀다.
“읏, 하아.”
미라벨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뎌진 줄로만 알았던 과거의 고통이 선명하게 되살아난 탓이었다.
미라벨의 몸을 함부로 대한 잔인한 남자가 그녀를 이곳에 가두었다.
다시는 그녀에게 씨를 뿌리는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며,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 그녀가 다른 자를 홀리게 하지 않겠다면서.
“샤를, 샤를…….”
미라벨은 정신없이 아들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품 안의 아이가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그녀를 휩쌌다.
미라벨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리카르도는 이 아이를 죽일 거다.
그를 피해야 한다.
미라벨의 아이를 죽일 수 없도록, 도망가야 한다. 지금, 당장.
“어서 나가자. 나가야 해.”
샤를을 끌어안고 있던 미라벨이 홀린 듯 말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겐 리카르도에게서 벗어나는 것, 도망치는 것만이 중요했다.
아이를 위해서, 아이의 목숨을 위해서.
“대공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도망가야 해…….”
“어마, 어마!”
넋을 잃은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미라벨이 일어나며 아이를 잡아끌자, 샤를이 당황하며 외쳤다.
“가면 안 대여! 이고, 이고 고쳐 주고 가야 대여!”
“……뭐?”
막무가내로 샤를을 문 쪽으로 잡아당기던 미라벨은 아이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를 바라보자, 그녀와 똑 닮은 푸른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세골린데의 맑은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에 미라벨의 심장이 차츰 제 박동을 찾았다.
아이는 살아 있다.
아이는 리카르도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무사히 태어났다. 미라벨의 손에 잡힌 자그마한 온기가 그 증거였다.
붉은 방의 기억은 악몽에 불과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초라한 악몽.
가까스로 진정한 미라벨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한 목소리를 꾸며 내었다.
“뭘 고쳐 줘야 하는데?”
“이고.”
샤를이 엄마의 질문에 바닥을 가리켰다. 작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린 미라벨이 미간을 좁혔다.
“커튼은 원래 찢어져 있었어, 샤를.”
“아니 아니.”
샤를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러고선 갑갑하다는 듯이 다시 천장을 가리켰다.
“쪼 위에 있어써. 샤를이 잡아서 떨어져써.”
미라벨의 눈이 위로 향했다. 커튼이 매달려 있었을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고개를 내리다 무심코 정면을 본 미라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벽인 줄로만 알았던 곳에 한 여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커튼에 가려서 미처 보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이게 뭐지?’
미라벨은 샤를의 손을 쥔 채로 초상화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림 속의 여인은 비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한쪽으로 늘어뜨린 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를이랑 똑가타…….”
샤를의 중얼거림에 미라벨이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인형 같은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 여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샤를과 무엇이 같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게?”
“눈이랑, 머리카락이랑.”
그제야 미라벨은 작게 감탄사를 뱉어 내었다.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은 샤를과 같은 흑발에 청안을 하고 있었다.
‘……선대 대공비인가?’
미라벨은 꺼림칙해하며 초상화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이 선대 대공비의 방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방에서 죽었다는 것도.
미라벨은 몸을 돌려 샤를에게 말했다.
“커튼은 나중에 엄마가 대공 전하께 말해서 고칠게. 그러니 일단 나가자. 주인 없는 방에 오래 있는 건 실례야.”
“녜.”
샤를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미라벨을 따라나섰다. 미라벨은 낡은 방문을 닫고서 샤를에게 엄중히 말했다.
“그리고, 여긴 다시 오지 마.”
“왜애?”
“방 주인이 안 좋아할 거야. 대공 전하가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샤를이 저길 간 건 비밀로 하자. 알았지?”
“웅…….”
미라벨이 지어낸 변명에 샤를은 눈을 깜박이다 대답했다. 그제야 미라벨은 안심하고서 복도를 걸어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붉은 방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한편, 엄마를 따라서 복도를 걷던 샤를은 주머니 속에 넣은 물건을 몰래 만지작거렸다.
어른의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낡은 수첩이 손끝에서 만져졌다.
아까 커튼과 함께 떨어진 물건이었다.
‘오또카지.’
샤를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엄마가 갑자기 나타난 바람에 얼결에 주머니에 넣었는데, 다시는 빨간 데를 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럼 이 수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늑대 삼촌에게 줘야 할까, 아니면 엄마한테 부탁해야 할까.
늑대 삼촌에게는 비밀이라고 했으니까 엄마한테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도 빨간 데를 되게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샤를?”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던 샤를은 미라벨의 부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기 서서 뭐 하니?”
“웅, 가께.”
샤를은 종종걸음으로 미라벨을 쫓았다. 엄마를 바삐 따라가는 아이의 머릿속에서 수첩에 대한 고민은 그새 지워져 있었다.
* * *
왕녀의 호출에 손님용 응접실에 온 나시르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방금 들은 얘기가 적잖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반응에 홍차를 마시던 미라벨이 눈썹을 모았다.
“갑작스럽죠? 미안해요.”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생각지 못한 화제라서요.”
나시르의 대꾸에 미라벨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녀는 찻잔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레 말했다.
“곤란한 청이라면 거절해도 돼요. 외부인이 할 부탁이 아니란 걸 저도 알아요.”
“외부인이라뇨,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나시르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곳’…… 붉은 방 얘기를 꺼내실 줄은 몰라서. 말씀하신 대로 그곳으로 향하는 통로를 다 막겠습니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나시르. 실은, 얼마 전에 샤를이 또 거기에 갔거든요.”
“아…… 그랬군요.”
그제야 나시르는 이해한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다짐하듯 말했다.
“왕자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좋을 일은 없지요. 당장 막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가주님께서도 허락하실 겁니다.”
나시르는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현재 리카르도가 와병 중인 탓에, 저택의 주요 업무는 그가 도맡고 있었다.
복도 하나를 통째로 막는 건 대공의 결재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붉은 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거기서 그림을 하나 봤어요. 초상화요.”
미라벨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가 운을 떼자, 차를 마시려던 나시르가 눈을 들었다. 미라벨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선대 대공비는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나요?”
“그 그림이 거기에 있었군요.”
나시르의 대답에 미라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르는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선대 대공께서 불태워 버린 줄 알았습니다.”
“아내를 어지간히도 싫어했나 보네요.”
“사랑하셨습니다.”
나시르는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양 바로 말했다.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너무 사랑해서, 그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사실에 분노하셨지요.”
미라벨은 가만히 나시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녀는 선대 대공비가 붉은 방에서 죽었다는 것밖에 몰랐다. 그래서 자살이었다는 게 적잖이 놀라웠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건 뒤따르는 이야기였다.
“어린 아들에게 그 광경을 보게 했다는 사실에, 더더욱 화를 내셨고요.”
“어린 아들이라면…….”
나시르의 얘기에 미라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대공이 목격한 건가요? 자기 어머니가 자살한 걸?”
“……그분을 안쓰럽게 여겨 주십시오. 그렇게라도 곁에 있어 주셨으면 합니다.”
미라벨은 나시르의 차분한 말에 찻잔을 세게 쥐었다.
붉은 방에서 리카르도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느낀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나시르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곳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을 소년이 안쓰러웠다.
사람이 죽는 걸 본다는 것만으로도 쇼크였을 텐데. 심지어 그 대상이 자신의 어머니였다니.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미라벨은 소년 리카르도가 안쓰러웠다.
샤를만큼 어머니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외로웠을 소년이.
‘내가 불쌍해할 건 아니야.’
찻잔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성장 환경이 불우했다는 게, 그가 한 짓의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미라벨의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술렁거렸다.
미라벨이 침묵하자 나시르도 조용히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응접실에는 고요함이 퍼졌다.
콰앙!
“와, 왕녀님!”
소피가 달려오기 전까지는.
“허억, 하아. 하아. 죄송해요. 너무 급해서.”
“무슨 일이야, 소피?”
미라벨은 헐떡이며 나타난 소피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피는 나시르와 미라벨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깨어나셨어요!”
소피의 외침에 바닥으로 찻잔이 떨어졌다. 미라벨은 카펫 위에서 뒹구는 찻잔도 보지 못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