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왕녀님?”
소피는 때마침 나타난 미라벨을 보며 작게 입을 벌렸다. 루체를 거느리고 온 미라벨은 그녀의 반응에 눈을 접어 웃었다.
“왜 이렇게 놀라?”
“그게, 방금 왕자님께서 왕녀님이 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랬어?”
미라벨은 소피의 설명에 몸을 숙이고 샤를에게 손을 벌렸다. 그러자 눈을 반짝이며 미라벨을 올려다보던 아이가 종종종 걸어 엄마에게로 가 폭삭 안겼다.
샤를은 미라벨의 품속에서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얼굴을 비볐다.
“어마아.”
“그래, 샤를. 소피랑 잘 놀고 있었어?”
미라벨은 자신의 뺨에 뽀뽀를 날리는 샤를을 꼬옥 껴안으며 다정히 물었다. 샤를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미라벨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늘 아침에도 만났으면서도 애틋한 모자의 모습에 소피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이상하게도 미라벨과 샤를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동시에 누구도 이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오펠리를 비롯해, 아실과 루이즈가 샤를을 많이 아꼈지만 아이는 엄마만을 찾았다.
샤를의 유별난 애착에 세골린데 왕실의 사람들은 미라벨이 유모를 적게 써서 그런 것이려니 했다.
아이가 엄마와 붙어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다른 사람을 불편해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레나토에 와서 소피는 그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공 때문이었다.
대공은 샤를과 이곳 레나토에서 처음 만났다.
그런데도 샤를은 대공을 무척 잘 따랐다. 그를 ‘늑대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쫓는 샤를을, 대공 또한 살갑게 대했다.
아이를 안아 주고 목말을 태워 주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마치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샤를이 레나토에 정을 붙인 건.
미라벨이 레나토를 떠나겠다고 했을 때, 샤를이 보였다는 반응에 소피는 적잖이 놀랐다.
무조건 엄마와 함께하려는 아이가 대공의 편을 들며 막아서다니.
어쩌면 샤를은 레나토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의 정을 대공에게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과 똑같은 흑발을 한 대공에게 상상 속의 아빠를 비춰 본 것일지도.
소피는 어렴풋이 떠오른 이유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아닐 거다.
느긋하고 온후한 분위기의 세골린데 어른들과는 다른, 날이 선 맹수 같은 사람이 신기하여 따르는 것일 터.
“엄마가 우리 샤를이 좋아하는 초콜릿 쿠키를 가져왔어. 자, 아.”
“아.”
소피는 초콜릿 쿠키를 받아먹는 샤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샤를은 쿠키를 오물오물 먹다가 한 입 베어 먹은 것을 엄마에게 나눠 주었다.
“어마두, 아.”
“아.”
미라벨은 샤를이 내민 쿠키를 먹고서 생긋 웃어 보였다. 샤를은 엄마가 자신의 쿠키를 먹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루체가 가져온 쿠키가 한가득 남아 있는데도, 두 사람에게 그런 건 상관없어 보였다.
소피는 둘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다정한 모자다. 그러니 샤를이 대공에게 보인 관심은 잠시 갖는 흥미일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이니까.
“소삐도 머거! 루째도!”
“네!”
“네, 왕자님.”
소피와 루체는 샤를의 권유에 쿠키를 먹었다. 달콤한 초코 칩이 박힌 쿠키를 먹던 소피의 시선이 문득 미라벨에게 향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샤를 몰래 물어보았다.
“오늘 전하께선 좀 어떠세요?”
“비슷해. 여전히 깨어나지도 않았고.”
미라벨은 샤를에게 흰 우유를 먹이며 작게 말했다. 말투는 평온하였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곁에 있으려 했으나, 우고가 그녀를 만류하였다.
의학적인 처치를 해 줄 수 없는 한 이제부터는 침대 옆에 붙어 있는 건 의미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우고는 미라벨에게 자신을 믿고 대공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미라벨은 마음을 다스리고자 샤를을 찾아온 참이었다. 소피는 미라벨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자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너무 염려 마세요. 곧 깨어나실 거예요.”
“……응.”
미라벨은 소피의 위로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억지로 지어낸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니 얼굴이 한결 밝아 보였다.
“어마, 샤를 심시매요.”
“그래? 그럼 우리 뭐 하고 놀까? 샤를 하고 싶은 거 있어?”
소피와 대화를 나누던 미라벨은 쿠키를 다 먹은 아이의 투정에 시선을 내렸다. 샤를은 엄마에게 안겨 그녀의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에찌오랑 놀고 시퍼. 에찌오랑 숨바꼬찔할래.”
“에치오는 바빠서, 당분간은 샤를이랑 못 논대. 대신에 엄마랑 소피랑, 루체랑 숨바꼭질할까?”
“요기서?”
“음…….”
샤를이 아랫입술을 쭉 내밀며 묻자, 미라벨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밖에 나가고 싶니?”
“웅!”
아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이자, 미라벨이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알았어. 대신에 저택 밖으론 나가면 안 돼. 기사 아저씨들 보이는 데에만, 저택 안에만 있는 거야. 알았지?”
“아조씨들이 샤를 어디에 숨었는지 다 말하면 어떠케?”
“그러지 말라고 할게.”
미라벨은 풋 웃으며 샤를의 코를 살짝 눌렀다. 아이는 눈을 찡그리다가 코를 손등으로 문대며 말했다.
“그러면 샤를 먼저 술래!”
샤를의 활기찬 외침에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미라벨은 소피와 루체에게 눈길을 보낸 뒤, 방 밖으로 나섰다.
* * *
네 사람의 숨바꼭질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샤를은 옆방 문 뒤에 숨어 있던 미라벨을 가장 먼저 찾아내었고, 다음으로 커튼 뒤의 루체, 마지막으로는 옆 복도의 기둥에 숨어 있던 소피를 찾아내었다.
놀이가 여러 번 반복되고, 이번에는 미라벨이 술래가 되어 샤를을 찾을 차례가 되었다.
“열까지 셀게. 하나, 둘, 세엣…….”
“꺄하하!”
서늘함만이 감돌던 복도에 아이의 웃음소리가 온기를 더했다. 오랜만에 방 밖으로 나와서인지 샤를은 무척 들떠 있었다.
복도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샤를을 보았다. 시선을 느낀 샤를이 몸을 홱 돌려 기사들을 올려다보았다.
“샤를 이쪽으로 가따고 하면 앙 대여! 쉬이!”
“예, 왕자님.”
야무지게 두 번째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서 약속을 받아 낸 샤를이 인적이 드문 복도로 향했다.
그러자 아이를 훈훈한 시선으로 보던 기사들이 난감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아이가 향하는 곳은 술래가 못 찾아낼 만한 곳이었다. 그곳은 저택의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장소였으니까.
“왕자님, 그쪽은!”
“쉬이!”
기사들이 샤를을 막으려 하자, 아이가 폴짝 뛰며 비밀을 지켜 달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기사들은 아이를 억지로 붙잡을 수 없어 쩔쩔매었다.
“왕자님!”
“……아홉, 열!”
한편, 눈을 감고서 숫자를 끝까지 다 센 미라벨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녀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는 복도 끝의 기사 둘과 시선이 부딪쳤다. 미라벨은 의아해하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왜 그러죠?”
“왕녀님, 왕자님께서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이라뇨?”
“그곳은…… 위험한 곳은 아니지만 좀 불길한 곳입니다.”
“불길하다니, 뭐가요?”
“그게…….”
왕녀에게 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기사들을 보던 미라벨이 그들이 힐끔거리는 곳을 보았다. 샤를이 간 길을 보던 미라벨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설마.’
익숙한 복도를 본 미라벨의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휑한 공기가 감도는 텅 빈 복도에서 어렵사리 시선을 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샤를이 붉은 방으로 갔나요?”
“예? 왕녀님께서 ‘붉은 방’을 어떻게 아시는…….”
“샤를!”
미라벨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기사를 뒤로하고서 달려 나갔다.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며, 빠르게 뛰었다.
* * *
숨을 곳을 찾아 기웃거리던 샤를은 익숙한 인테리어의 방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오와!”
온통 새빨간 색으로 도배된 방, 그래서 마음속에 짙은 인상을 남긴 방이 샤를의 앞에 있었다.
“빨간 데네?”
문 앞에 선 샤를은 신기해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성인이라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뒷걸음질 칠 만했지만, 샤를에게는 마냥 신기해 보였다.
빨간 침대, 빨간 커튼, 빨간 벽지.
마치 빨간색 물감을 실수로 쏟아 버린 것만 같은 신비한 공간이었다.
동화 속 사과 공주가 이런 방에 살지 않았을까.
샤를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안녕하세여! 샤를이에여. 들어가도 되나여?”
샤를은 방 입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혹시 방 주인이 있다면,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샤를의 인사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창밖의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방의 가구가 죄다 부서진 걸 보면, 사과 공주가 이사를 간 모양이었다.
“샤를 들어가께여!”
샤를은 다시 한번 외치고서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아이는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으로 침대와 협탁을 구경하다가 반쯤 찢어진 커튼을 붙잡았다. 커튼 자락이 방을 거닐던 샤를의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우앗!”
붉은 술이 달린 커튼을 잡은 샤를이 깜짝 놀라 천을 죽 잡아당겼다. 아이가 살짝 힘을 주자 천이 와르르 딸려 와 바닥으로 무너졌다.
바닥에 깔려 있던 먼지가 뿌옇게 안개처럼 일어나, 샤를은 콜록거려야만 했다.
이어서 무언가가 풀썩 떨어지는 작은 소리와 함께, 커튼으로 가려졌던 풍경이 아이의 눈앞에 나타났다.
“샤를!”
바닥에 떨어진 것부터 주우려던 샤를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였다.
“어…… 마?”
엄마를 보고 활짝 웃던 샤를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창백한 얼굴의 미라벨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