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왕녀님께 설명을 해 드리려다가 선을 넘은 듯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사과드려, 에치오.”
나시르의 조언에 에치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녀님. 가주님을 걱정하시는 것 같길래 설명을 하려다가 제가 너무 나간 것 같습니다.”
“당연히 걱정하죠. 저와 샤를을 지키려다 크게 다쳤으니까요.”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몸을 틀었다. 그녀는 베일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두 분을 만날 때마다 대공비 얘기를 듣게 되는 게 영 유쾌하진 않네요.”
미라벨은 자신의 말투가 덤덤하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대공이 대공비를 많이 사랑하는 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도 모르겠고요. 또 대공비는 죽은 게 아니라 도망친 거라면서요. 그런 걸 보면 대공이 크게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요.”
“아뇨, 사랑하셨어요. 미쳐 버리실 만큼, 엄청나게요!”
“그게 무슨 말이죠?”
미라벨은 에치오의 대꾸에 눈을 가늘게 떴다. 에치오와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언짢았다. 왕녀의 추궁 같은 질문에 에치오가 할 말을 찾아 더듬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젠장, 나시르! 자네가 말 좀 해 봐!”
결국 에치오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외쳤다. 조용히 미라벨을 살피던 나시르가 이마를 짚었다.
“이쯤 해 둬, 에치오.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도! 자넨 주군이 가엽지도 않아?”
“……가엽다고?”
나시르와 에치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라벨의 잇새에서 차가운 음성이 비어져 나왔다. 그녀는 에치오를 노려보며 신랄하게 말했다.
“대공이 가엽다고? 사랑한다는 여자를 도망까지 치게 만든 사람이?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미라벨은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에치오를 쏘아보았다.
“…….”
미라벨의 비난에 에치오가 입술을 말아 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미라벨은 주눅이 든 그의 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에치오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안다. 그는 자신이 충성하는 주군을 비호하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때에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사랑한다는 소리를 제삼자의 입에서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지금까지 잘 참아 왔는데.
아르밀라와는 상관없는 사람인 척, 그래서 레나토에 잠시 머물렀던 손님 중 하나로만 남으려 했다.
그런데 왜 울컥해 버린 걸까.
어쩌면 리카르도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는 방어 심리일지도, 또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감정이 격해진 것일지 모른다.
‘어쨌든 에치오에게 화를 낼 일은 아니지.’
미라벨은 천천히 손의 힘을 풀었다. 애꿎은 자에게 날을 세웠다는 생각이 스치자,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머리가 식었다.
“쓸데없이 언성을 높였네요.”
미라벨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잠을 못 자서 예민해졌나 봐요. 미안해요, 에치오.”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대공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는 잘 알겠어요. 그래도 주치의 말을 들어 보면 보통 사람보다는 강한 것 같더군요. 에치오도 걱정 말고 푹 쉬도록 해요.”
“……예.”
미라벨은 풀 죽은 에치오의 대답을 뒤로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날을 세운 이유를 얼버무리듯이 변명했지만, 그게 과연 통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성격이 괴팍한 왕녀라고 하겠지.’
미라벨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에치오와는 자꾸 마찰을 빚게 되는 것 같았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걸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는데.
“아…….”
복도를 걷던 미라벨이 휘청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계속 밤을 새워서 좀 지치긴 했다.
‘일단 잠을 좀 자야겠어.’
미라벨이 기사 숙소의 계단을 내려가려는 때였다.
“잠시만요, 왕녀님.”
뒤에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나시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미라벨의 발걸음을 붙잡고서 다가왔다.
“함께 가시지요. 본관까지 모시겠습니다.”
“에치오와 더 얘기하지 않고요.”
“그럴까 했는데 영 대화할 상태가 아니라서요. 왕녀님이 나가시자마자 머리를 쥐어뜯기만 하던데요.”
반쯤 농담이 섞인 나시르의 얘기에 미라벨이 살포시 웃었다. 그녀에게서 조금 전의 냉기가 빠졌다는 걸 확인한 나시르가 곁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에치오가 좀 다혈질인 경향이 있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편이지요.”
나시르는 잠자코 계단을 내려가는 미라벨을 힐끔 보고서 말을 이었다.
“말은 서툴지만, 본성은 선한 자입니다. 가주님을 향한 충성심도 나무랄 데 없는 좋은 기사이고요.”
“알고 있어요.”
나시르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미라벨이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너무 과했죠.”
“아뇨, 잘하셨습니다.”
나시르는 외알 안경을 손등으로 스치듯 만지고서 말했다.
“확실히 에치오의 언행은 무례하였으니까요. 왕녀님께 가주님은 전 약혼자인데, 그분의 아내 이야기가 달갑지 않으셨겠죠. 섬세함이 부족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붉은 방 얘기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다 잊어 주십시오.”
“딱히 그럴 것까진…….”
나시르에게 대답하던 미라벨이 말끝을 흐렸다. 계단을 다 내려와 숙소의 로비로 나온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갈 길을 가려던 미라벨이 문득 숨을 들이켰다.
‘붉은 방’이라는 단어를, 나시르의 입에서 들은 게 생소한 탓이었다.
마치 처음 들은 것처럼.
‘아, 맙소사.’
미라벨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뒤늦은 깨달음에 다리가 떨려 왔다.
나시르는 미라벨 왕녀에게 ‘붉은 방’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난번에 아무렇지 않게 그 방을 그렇게 일컬었다.
그러나 나시르는 그걸 두고 지적하지도,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영민한 그가 놓쳤을 리가 없는데.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
에치오를 만류하던 나시르의 말을 떠올린 미라벨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이다.
미라벨은 앞서 걸어가는 나시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시르.”
“예.”
왕녀의 부름에 나시르가 재깍 답하며 몸을 돌렸다. 기사들이 모두 활동 중인 한낮의 숙소 로비에는 그와 미라벨만이 서 있었다.
미라벨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가 눈을 들었다. 베일 너머로 나시르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예? 뭐가…….”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눈감아 주고 있는 거잖아요.”
미라벨의 말에 나시르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반응에 미라벨은 확신했다.
나시르는 그녀가 아르밀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에치오 또한, 알고 있다.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이 말만 할게요. 나는 에치오도, 나시르도 원망하지 않아요. 두 사람을 잊은 적도 없고 미워한 적도 없어요.”
“아르밀라 님…….”
나시르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아르밀라를 불렀다.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뭐가요?”
“힘이 되어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힘들어하시는 걸 알면서도 못 본 척했지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시르의 호의 덕분에 버텼는걸요.”
나시르는 씁쓸하게 웃었다. 고작 그걸 호의라고 하다니.
그런 건 호의 축에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르밀라에게는 작은 관심조차도 절박했을 터. 그게 새삼 와 닿아 마음이 아팠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 드리겠습니다.”
“없어요, 그런 건.”
미라벨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거절에 나시르가 눈썹을 모았다.
“하지만.”
“난 대공이 회복하는 대로 다시 떠날 거예요. 조용히 지내다가 조용히 떠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여기에 없던 사람처럼요.
미라벨은 나직이 덧붙이며 두 번째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나시르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소삐, 오늘두 안 돼?”
샤를의 간절한 질문에 소피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미라벨은 저택에 오자마자 샤를을 숙면 마법에서 깨웠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샤를은 레나토에 돌아와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폴짝폴짝 뛰면서 당장 늑대 삼촌에게로 가겠다고 했다.
미라벨과 소피는 진땀을 흘리며 천진한 아이를 말려야만 했다. 피투성이의 리카르도를 보면 아이가 받을 충격이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매일, 샤를은 리카르도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리카르도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에 샤를을 그에게 보낼 순 없었다. 소피는 답답한 심정으로 샤를을 다독였다.
“네, 대공 전하의 감기가 많이 독한가 봐요. 당분간은 보고 싶어도 참으셔요. 왕자님께 옮으면 큰일이잖아요. 왕자님도 감기는 싫죠?”
“웅…….”
샤를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늑대 삼촌은 샤를이 아는 병 중에 가장 무서운 병인,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감기에 걸리면 열도 펄펄 나고 콧물도, 기침도 계속 난다. 밖에 나가서 놀 수 없는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병이었다.
그래서 샤를은 하는 수 없이 늑대 삼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동화책이라도 읽어 드릴까요? 사과 공주 이야기는 어떠세요? 빨간 숲 이야기는요?”
“갠짜나…….”
샤를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는 재미있던 블록 놀이도, 동화책도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에만 갇혀 있으니 갑갑하기만 했다.
“어마는? 어마도 오늘도 바빠?”
샤를이 동그란 눈을 들어 올려 소피를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아이의 시선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미라벨을 데려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샤를을 혼자 남겨 두고서 방을 나가기도 애매했다.
“음, 그게요.”
난처해진 소피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우와!”
샤를이 갑자기 탄성을 뱉었다. 샤를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린 소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