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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84화 (85/120)
  • 84화

    “왕녀님?”

    기사 숙소 앞에 도착한 미라벨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눈을 돌리자 단정한 낯의 사내가 보였다.

    “나시르.”

    상대를 알아본 미라벨이 이름을 부르자, 나시르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눈길 사이에서 나타난 나시르가 미라벨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왕녀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에치오가 깨어났다고 해서요.”

    “아, 그러셨군요. 저도 마침 병문안을 가는 참이었습니다.”

    나시르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미라벨의 곁에 섰다. 본의 아니게 그와 동행하게 된 미라벨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녀를 에스코트하려던 나시르가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아니고요. 나시르에게도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게 이제야 생각나서요.”

    미라벨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에 나시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으로 돌아오고서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간호하는 동안 몇 번인가 나시르와 마주쳤다. 하지만 그뿐, 딱히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워낙에 리카르도의 상태가 위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리카르도가 큰 고비를 넘겼으니, 숨이 트였다고나 할까.

    숨 쉴 구멍이 생기고 나서야 미라벨은 자신이 그동안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시르가 단검을 챙기라고 해 준 덕에 마수에게서 날 지킬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미라벨은 단정히 말하고서 허리를 숙였다. 왕녀가 베일을 늘어뜨리며 절을 하자, 나시르가 크게 당황했다.

    “와, 왕녀님, 이러지 마십시오.”

    미라벨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녀가 빙긋이 웃자, 쩔쩔매던 나시르가 말했다.

    “왕녀님께서 고개를 숙여 보이실 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또 왕녀님을 지켜 드린 건 제가 아니라 가주님이시고요.”

    “……그렇죠.”

    나시르가 리카르도를 언급하자, 미라벨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공에게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깨어나시거든 전해 주세요. 기뻐하실 겁니다.”

    미라벨은 나시르의 따뜻한 조언에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녀가 리카르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지끈거렸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증오했다. 그는 그녀가 가장 행복했어야 할 시절을 눈물로 얼룩지게 했으며, 추억이 아닌 고통만을 남겨 준 장본인이었다.

    마음을 다한 미라벨의 고백을 차갑게 비웃은 남자.

    사랑을 믿지 않은 남자.

    그가 리카르도였다.

    미라벨은, 아르밀라는 그의 곁에서 불행했음에도 미련스레 버텼다. 그게 그녀가 사랑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사랑은 새하얗게 타 버렸다.

    한없이 맹목적이던 사랑이 원망으로, 증오로 변하면서 미라벨은 과거를 버렸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미라벨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가를 매만졌다.

    조금 전 눈물을 흘렸던 탓에 눈가가 뜨겁고 코가 시렸다. 하지만 울음을 쏟아 낸 덕에 마음만은 한결 후련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리카르도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대체 뭘까. 그게 뭐길래 이토록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걱정? 불안? 증오?

    정답은 없었다.

    미라벨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대체 언제까지 유효한지 알고 싶었다. 사랑이 평생 가는 것이라면, 거기서부터 시작된 증오도 평생 동안 지속되는 것인지도.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정답은 없었다.

    미라벨이 원하는 게 곧 정답일 테지만, 그녀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안개 속에 홀로 있고 싶지 않다는 사실뿐이었다.

    “가주님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수도 없이 돌아오셨으니까요.”

    미라벨이 침묵하는 이유를 넘겨짚은 나시르가 살갑게 말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대공비 전하…… 아르밀라 님을 잃으셨을 때도 죽음의 고비가 있었지만 끝내 돌아오셨죠.”

    나시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미라벨이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나시르는 그녀를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그때는 정말 가주님을 잃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르밀라 님을 그리워하시다 못해 스스로를 벼랑 끝까지 몰아가셨거든요.”

    “왜 내게 그 얘기를 하는 건가요?”

    “그냥 그랬다는 겁니다.”

    나시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군말을 하지 않고서 숙소의 정문을 가리켜 보였다.

    나시르가 앞장서는데도 미라벨은 바로 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한데 나시르의 얘기까지 들으니 더없이 어수선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리카르도를 미워하는 감정만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또렷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녀에게 선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몇 걸음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미라벨의 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모호함 속에서 그녀의 마음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 * *

    미라벨은 나시르와 함께 에치오의 방을 찾았다. 나시르는 종종 에치오의 숙소에 왔었는지, 능숙하게 그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자 침대에 누워 있던 에치오가 황급히 일어나려 했다.

    “왕녀님!”

    “일어나지 마세요.”

    미라벨은 다리에 붕대를 감은 에치오가 인상을 쓰자 황급히 말했다.

    나시르가 다가가 침대 헤드에 기대도록 도와주자, 에치오가 길게 숨을 쉬었다. 고통을 누르려는 것 같았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깨어났다고 해서 왔어요. 몸은 좀 어때요?”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직접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치오는 어색하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라벨은 그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에치오는 샤를과 종종 놀아 주긴 했지만, 미라벨과 딱히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서재에서의 껄끄러운 만남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 데면데면했다.

    에치오는 미라벨과 눈이 마주치면 티 나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고, 그녀도 딱히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랬기에 에치오는 미라벨이 병문안을 올 것이라 상상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미라벨은 서먹한 관계와 상관없이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에치오가 아니었다면 리카르도를 저택까지 데려올 수 없었을 테니까.

    마수와 만났던 날, 에치오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서도 리카르도를 부축했다.

    미라벨이 정신을 놓은 리카르도를 일으키려다가 쓰러지려는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에치오가 우직하게 그들을 받쳐 주었다.

    그리고 남아 있을지도 모를 마수를 경계하며 저택까지 일행을 인도하였다.

    에치오는 리카르도를 무사히 침대에 눕히고서 쓰러졌다. 그대로 숙소로 실려 나갔으나, 미라벨은 그의 상황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워낙에 경황이 없었던 탓이다.

    “진작 와서 인사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죠. 그날은 고마웠어요.”

    “뭐가 말입니까?”

    “저택까지 데려다주었잖아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딱히 고마워하실 일은 아닙니다.”

    에치오는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라벨은 낯간지러운 인사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살가운 성격이 아니다 보니 용건이 끝난 뒤에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 탓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흠, 그렇다 해도 왕녀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건 없지 않나.”

    두 사람 사이에 낀 나시르의 헛기침에 방 안에 감돌던 서먹함이 깨졌다.

    “가주님께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까. 푹 쉬면서 어떤 상을 받고 싶은지나 생각하고 있어.”

    “포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야.”

    “자네가 그런다고 가주님께서 넘어가실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지? 레나토의 주인은…….”

    “은혜와 원수는 절대 잊지 않고 갚으시지.”

    에치오가 부루퉁하게 나시르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는 옅게 피가 새어 나온 붕대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포상이든 뭐든 다 좋으니, 하루빨리 깨어나셨으면 좋겠네.”

    “그럴 거예요.”

    잠자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라벨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강한 사람이니까.”

    미라벨의 말에 둘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에치오가 헛기침을 하자, 미라벨이 시선을 들었다.

    “왜들 그러죠?”

    “그게 뭐랄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에치오가 입을 쩝 다시며 말했다.

    “예전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분이셨지만. 지금은 글쎄요.”

    “대공이 강하지 않다는 건가요?”

    “그건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강하시죠. 하지만 그 여자…… 대공비 전하를 잃고서는 다른 분이 되셔서요.”

    에치오는 미라벨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이 되셨거든요. 그간의 일로 기력이 제법 쇠하셔서요. 회복력이 전 같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예전의 주군이셨다면 그 정도 마수는 단번에 쓸어버리고도 남았죠.”

    “그런가요.”

    “예, 대공비 전하께서 떠나신 후로 레나토에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주군께서 많이 자책하고 힘들어하셨습니다. 대공비 전하로 인한 상심이 주군을 병들게 한 거죠.”

    에치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미라벨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열성적으로 말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대공비의 이야기를 하는 거죠?”

    미라벨의 질문에 에치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에치오가 눈을 굴리며 나시르를 바라보자, 이내 그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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