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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83화 (84/120)
  • 83화

    카타리나 부인이 다급하게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하녀들은 뜨거운 물이 든 대야와 깨끗한 수건을 들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또다시 넓은 복도를 가로지른 카타리나 부인이 굳은 얼굴로 한 방문을 열었다.

    “전하의 팔을 잡아, 어서!”

    “수건! 수건을 더 가져와!”

    문이 열리자마자 요란한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전장을 연상케 하는 긴급함이었다.

    카타리나 부인은 하인들을 피해 방의 중앙에 놓인 침대에 누운 피투성이의 남자에게로 재빨리 다가갔다.

    윗옷을 벗고 검은 바지를 입은 남자의 두꺼운 흉통이 바쁘게 팽창하다가 조여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카타리나 부인은 신중하게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이틀 전에 보았을 때보다는 제법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다.

    “물과 수건을 더 가져왔습니다.”

    “이쪽에 두십시오. 그리고, 시트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주치의가 땀을 닦으며 초조하게 말했다. 카타리나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을 따라온 하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하녀들이 문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심각한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넓은 가슴과 굴곡진 복근에 새겨진 상흔은 그가 맹수와의 사투를 벌였음을 짐작케 했다.

    탄탄한 남자의 다리는 침대의 기둥에 묶여 있었는데, 그 모습만 보면 마치 그가 맹수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에게서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꺼져 가는 생명줄을 힘겹게 붙잡고 있는 가련함만이 배어 나왔을 따름이었다.

    “컥……!”

    그때, 창백한 낯으로 거칠게 숨을 내뱉던 남자가 상체를 들썩이며 피를 토했다.

    주치의가 능숙하게 수건으로 남자의 입을 가리자 하얀 천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변했다.

    카타리나 부인은 남자의 수려한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가 털썩 고개를 떨구자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남자를, 리카르도 비토레를 알아 온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이토록 마음을 졸였던 적이 있던가.

    그가 아르밀라를 잃고서 폐인이 되었을 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의 리카르도는 삶의 의지가 없었다. 눈 뜬 시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미라벨 왕녀가 레나토에 오고서부터, 그는 변했다. 얼핏 예전의 정정한 모습을 되찾는 듯도 했다.

    여전히 밤에는 복도를 서성이고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족하나마 조금씩 예전의 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을 놓았는데.

    미라벨 왕녀가 떠나던 날, 그녀를 호위하겠다며 함께 길을 나섰던 리카르도는 그저께 피범벅이 되어 돌아왔다.

    에치오가 다리를 절뚝이며 리카르도를 부축해 왔던 때, 저택은 경악했다.

    수없이 많은 전장에 나갔어도 리카르도가 이토록 깊이 상처를 입은 적은 없었다.

    그는 적군의 공격을 허하지 않았으니까.

    리카르도는 검날이 자신에게 스치기도 전에 상대의 명줄을 끊어 놓았다.

    그 상대가 마수여도 마찬가지였다.

    리카르도가 마수에게 허점을 보인 건, 아르밀라가 이 저택에 있었을 때 딱 한 번뿐이었다.

    혼자서 마수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이소타 협곡의 마수를 휩쓴 자가 리카르도다.

    그랬던 그가, 마수와 싸우다가 다치다니.

    “……라벨.”

    쇳소리 가득한 음성에 카타리나 부인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고통을 집어삼킨 듯이 헐떡이는 리카르도의 모습이 들어왔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에 검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병약하거나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신이 내린 고난을 겪고 있는 젊은 영웅과 같아 보였다.

    리카르도가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신음을 흘리자 그의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미라벨 왕녀였다.

    “나 여기 있어요.”

    왕녀의 부드러운 음성에 괴롭게 숨을 토해 내던 리카르도가 잠잠해졌다.

    하얀 손이 핏줄이 선 손등을 토닥이자 리카르도가 이내 편안히 호흡했다.

    마치 숙면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잠드는 그의 모습에 우고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괜찮은 거죠?”

    불쑥 던져진 미라벨 왕녀의 질문에 우고가 움찔했다. 그는 눈을 깜박이고는 리카르도에게 시선을 던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성에 들어오기 전에 숨이 끊어졌을 겁니다.”

    우고는 길게 숨을 쉬고서 피에 젖은 수건을 대야에 던졌다. 리카르도가 토해 낸 피로 젖은 수건들이 쌓인 대야를 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또 이 정도의 출혈이면 쇼크가 오고도 남지요.”

    “하지만 리카르도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예.”

    대공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왕녀의 행동에 우고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왕녀의 심각한 분위기에 눌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상이 깊으니 시일은 걸리겠지만, 회복하실 겁니다. 일단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습니다. 남은 건 전하의 회복력을 믿는 것뿐입니다.”

    왕녀는 우고의 대답에 한숨을 길게 쉬었다. 겨우 안도하는 모양새였다.

    “그래요. 괜찮아, 괜찮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이 중얼거리는 왕녀의 음성에 방 안의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없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카타리나 부인은 조용히 두 손을 맞잡았다. 왠지 모르게 왕녀를 위로해 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일개 하녀장이 감히 왕녀에게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넬 순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저 가만히 왕녀를 바라보았다.

    카타리나 부인은 그간 소피에게 대략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굶주려 미친 마수 떼와 왕녀 일행이 운 나쁘게 마주쳤고, 리카르도가 그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고 했다.

    소피는 우고와 카타리나 부인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불안한 눈으로 계속 왕녀를 살폈다.

    처음에, 카타리나 부인은 소피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상처투성이인 리카르도에 비해 왕녀가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소피가 유별나게 군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어째서 왕녀를 걱정했는지 알게 되었다.

    왕녀는 지난 이틀간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고를 도와 리카르도를 간호하기에 바빴다.

    샤를 왕자를 살피러 갈 때를 제외하곤 리카르도의 곁을 뜨지도 않았다.

    냉정해 보였던 그녀의 태도에 내심 유감스러워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간간이 왕녀는 가슴을 가만히 움켜쥐고서 힘겹게 숨을 내쉬었는데, 그 안쓰러운 모습에 마음이 다 저려 올 정도였다.

    미라벨 왕녀는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방금의 각혈로 남은 독소를 다 빼내었으니 이제 깨어나시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 전에 시트를 좀 갈아야겠군요.”

    우고의 말에 왕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서슴없이 침대 시트로 손을 뻗었다.

    왕녀가 직접 시트를 갈려는 것처럼 잡아당기자, 카타리나 부인이 기겁을 하며 말렸다.

    “이건 하녀의 일입니다. 왕녀님, 쉬세요. 가주님은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그럼 난 뭘 해야 하나요?”

    “예?”

    “난 이 사람한테 뭘 해 줘야 해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당황한 카타리나 부인이 말을 잇지 못하자, 왕녀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분한 음성을 내뱉었다.

    “에치오는 깨어났나요?”

    “예, 오늘 아침 정신을 차렸습니다.”

    “대공이 깨어나거든 바로 알려 주세요.”

    왕녀는 카타리나 부인에게 신신당부하고서 시트를 놓았다. 그녀는 그러고서도 한참을 서서 리카르도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몸을 틀었다.

    * * *

    미라벨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에치오가 머무르고 있는 기사 숙소 건물은 본관의 뒤편에 있었다. 그녀가 달리 안내를 요청하지도 않았지만, 그 점에 관심을 두는 자는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미라벨 왕녀가 비토레 저택을 거니는 풍경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다만, 고요한 복도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만이 그녀를 주목했다.

    그들은 왕녀가 자신의 구역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짧게 묵례하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이 크게 다쳤다는 사실 때문에 다들 날이 바짝 서 있었다.

    중간에 몇몇은 왕녀를 따라오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라벨은 모두 거절했다.

    미라벨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리카르도를 간호하고 그의 곁을 지키면서 내내 외면했던 불안감이 그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설마, 이대로 죽어 버리진 않겠지.’

    미라벨은 술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저택을 나섰다.

    기사 숙소까지 이어진 길을 가기 위해 후원으로 발을 내딛던 그녀의 걸음이 차츰 더뎌졌다.

    검은 나뭇가지 위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장관을 바라보던 미라벨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베일째로 얼굴을 그러쥐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느다란 어깨가 격렬히 들썩이고, 붉은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하얀 김이 회색 하늘에 퍼졌다.

    “당신이 이렇게 죽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위태롭게 숨을 헐떡이는 리카르도의 모습을 떠올린 미라벨이 입술을 짓씹었다.

    리카르도에게 어울리는 건 검을 휘두르며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힘없이 정신을 잃고 있는 모양새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미라벨은 유약한 리카르도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리카르도는 강하기만 한 자였다.

    그래야만 했다.

    미라벨이 원망하고, 증오해도 꿈쩍도 하지 않도록.

    리카르도는 굳건해야만 했다.

    “죽으면…… 용서 안 할 거야.”

    텅 빈 후원에 홀로 선 미라벨이 촉촉이 젖은 음성을 힘겹게 내뱉었다. 뺨을 가르고 흐르는 눈물이 뜨거운 동시에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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