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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82화 (83/120)

82화

리카르도는 팔을 뻗어 미라벨을 빈틈없이 감쌌다. 마수가 포효하며 그의 등을 할퀸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윽!”

미라벨의 얼굴 위로 리카르도의 신음이 터졌다.

리카르도는 크게 휘청하고서는 땅을 짚으며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리카르도가 힘겹게 미소를 지어내었다.

“걱정하지 마. 널 또다시 잃진 않을 거다.”

미라벨을 안심시키는 리카르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미라벨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이를 악물고서 검을 다잡았다.

미라벨의 안전을 확인한 리카르도가 몸을 틀고서 마수와 대치했다. 자연스레 그의 넓은 등을 보게 된 미라벨은 경악했다.

너덜너덜해진 망토 너머로 보이는 근육질의 등에 크게 짐승의 발톱 자국이 나 있었다.

리카르도가 움직일 때마다 깊게 팬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도 남을 상처를 입고서, 리카르도는 마수에게 맞서고 있었다.

미라벨의 앞을 가로막은 그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단말마의 울음소리가 마수들에게서 마구 터져 나왔다.

“허억, 헉…….”

마수의 사체로 작은 산을 만들어 낸 리카르도가 거칠게 숨을 쉬었다. 미라벨은 입을 틀어막고서 그를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마수가 죽었지만 아직 몇 마리가 남아 있다.

눈에 띄게 덩치가 큰 놈들이었다.

미라벨은 초조해하며 리카르도를 보았다. 지원 병력이 오지 않는 한, 여기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이대로는 힘들 텐데.’

하지만 리카르도는 미라벨과 다른 생각인 듯했다. 그의 얼굴에 절박함은 있었지만 초조함이나 불안 같은 건 엿보이지 않았다.

“이제 끝내야겠군.”

리카르도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 원을 그리더니, 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의 행동에 미라벨은 숨을 들이켰다.

‘설마, 또?’

설마 또 검기를 뽑아내려는 것일까.

확실히, 이 상황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리카르도는…….

‘안 돼.’

미라벨은 샤를을 안은 채로 벌떡 일어났다.

“대공!”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발 늦었다. 미라벨이 리카르도를 말리기도 전에, 그의 검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보랏빛의 검기가 땅을 타고서 퍼져 마수들을 일격에 쓰러뜨렸다.

마치 땅에서 피어난 벼락 같은 광경을 보는 미라벨의 말문이 막혔다.

검기를 뿜는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경이로웠다. 하지만 아름다운 만큼 잔혹하기도 했다.

시행자의 목숨을 깎아 내는 것이니까.

“끼이잉!”

“크르릉!”

남아 있던 마수들이 일제히 몸부림을 쳤다.

그물같이 몸을 옥죄는 검기에 고통스러워하던 마수들이 동시에 리카르도에게 달려들었다.

보다 정확히는 미라벨을 향해.

마수들은 수백 마리의 동족을 죽인 리카르도에게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라벨을 잡아먹으려 들고 있었다.

연약해 보이는 인간을 사냥하려는 본능에 따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마수도 미라벨에게 닿지 못했다.

리카르도가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그녀에게 접근하는 마수들을 베어 냈으니까.

검기를 뽑아내면서 피를 토했는데도 리카르도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를 돕던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졌지만, 리카르도는 의연히 검을 휘둘렀다. 미라벨은 피가 튀는 모습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끼잉……!”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마지막 마수의 숨이 끊겼다. 그리고 그 직후, 검을 떨군 리카르도가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대공!”

미라벨은 샤를을 소피에게 맡기고서 리카르도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엎어져 있는 그를 힘겹게 일으켜 제 무릎에 눕혔다. 리카르도를 마주한 미라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뒷모습만 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리카르도의 상체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어, 어떻게…….”

미라벨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눈을 감고 있던 리카르도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리카르도는 눈매를 찌푸리다가 거칠게 숨을 쉬었다.

마수의 사체로 이루어진 산을 뒤로한 그가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괜…… 찮나?”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상태를 확인하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피에 흠뻑 젖은 손이 닿자 미라벨의 뺨에도 붉은 자국이 생겼다.

리카르도는 그 자국을 지우려는 듯 뺨에 손을 문댔다. 하지만, 그럴수록 핏빛은 더욱 번지기만 했다. 리카르도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미라벨의 볼을 매만졌다.

“언제…… 다쳤지.”

“안 그래도 돼요. 이거 내 상처 아니니까.”

미라벨의 설명에 그제야 리카르도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우물대다가, 이내 기침을 토해 내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붉은 피가 리카르도의 입에서 비어져 나왔다. 치맛자락이 붉게 물든 미라벨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검기를 한 번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한동안은 운신하지 못할 정도의 내상을 입는다. 그런데 리카르도는 그걸 무려 두 번이나 했다.

지금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미라벨은 떨리는 손으로 피를 닦아 주었다.

“말하지 말아요. 나도, 샤를도 다 괜찮아요.”

“난……. ……켰어.”

“알았으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나중에.”

“……지 마.”

리카르도는 붉게 물든 손으로 미라벨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간절한 눈빛으로 미라벨을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가지…… 마.”

리카르도의 애원에 미라벨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고 올라왔다.

언제부터 고여 있었는지, 눈에 차오른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미라벨의 턱이 떨리자, 리카르도가 인상을 썼다.

“우, 울지…….”

“대공. 나중에, 제발. 흑. 나중에 말해요. 나중에 다 들어 줄 테니까.”

“쿨럭! 이번에…… 는, 널…… 지켰…… 어.”

“알았어요. 그래요, 당신이 날 지켰어. 날 살려 냈어. 그러니까 제발, 흐윽. 쉬어요.”

미라벨은 울면서도 정신없이 리카르도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가 무리해서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 말이라도 안 하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미라벨이 아무리 만류해도 그는 멈추질 않았다.

미라벨은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간절하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나 여기 있잖아요. 안 갈게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절, 대. 끅, 날……. 버리지…… 마.”

미라벨의 간청에 리카르도가 마지막 당부를 하고서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붙잡고 있던 손이 툭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대공……?”

미라벨은 뿌옇게 번진 시야 안에 들어오는 리카르도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리카르도를 자세히 보려 했다.

“대공…….”

리카르도의 얼굴을 본 미라벨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려 왔다.

리카르도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핏방울이 튄 수척한 얼굴에서는 고통도, 간절함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니야…….”

미라벨은 황망한 눈으로 바닥에 떨궈진 그의 손을 보았다. 피범벅이 된 손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와락 일그러졌다.

“잠깐…… 잠든 거죠? 그런 거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에서 비어져 나왔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손을 쥐었다. 마주 잡으려는 듯이.

하지만 덧없는 일이었다.

늘 그녀를 절실히 붙잡고 놓아주질 않던 리카르도가, 그녀를 잡지 않았다.

미라벨이 아무리 그의 손을 맞잡으려 해도 축 처진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뿌리쳐도 다시 미라벨을 잡으려 뻗어 오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리카르도!”

미라벨은 눈물에 젖어 절규했다. 그녀는 다급히 리카르도에게 회복 마법을 걸었다.

미라벨의 약한 마력으로도 정신을 깨우는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미약한 황금빛은 그에게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깨어나요. 제발…….”

미라벨은 반복해서 리카르도에게 마법을 걸었다. 하지만 수십 번을 해도, 리카르도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미라벨의 손이 벌벌 떨렸다.

보통은 회복 마법을 이렇게 많이 걸면 정신이 돌아온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웬만한 마법으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내상을 입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의.

“아냐…….”

미라벨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 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리카르도를 끌어안고서 외쳤다.

“아냐…… 아냐!”

“왕녀님!”

샤를을 안고 있던 소피가 다가와 미라벨을 불렀다.

이성을 잃은 왕녀의 모습에 놀란 소피가 미라벨을 재차 부르며 말했다.

“왕녀님, 대공 전하는 괜찮으실 거예요! 잠시 정신을 잃으신 걸 거예요! 그러니 진정하세요!”

“……흐윽, 소피.”

리카르도를 끌어안고 있던 미라벨은 눈물을 흘리며 소피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도를 대할 때는 차갑기만 했던 파란 눈동자에 불꽃이 일어 있었다.

“그럴까?”

미라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 턱에 고였다.

“……그래, 그런 걸 거야.”

미라벨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옅게 웃었다. 불안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억지웃음을 지어낸 그녀가 스스로를 세뇌하듯이 말했다.

“대공은 이런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소피에게 말하던 미라벨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서 겨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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