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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81화 (82/120)
  • 81화

    리카르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마차를 막아선 채로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미라벨은 마차의 문을 닫고 나아가려는 리카르도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소피, 소피가 아직 밖에 있어요!”

    “기다려.”

    리카르도는 차분히 대답하고서 검을 휘둘렀다.

    ‘깨갱!’ 하고서 무거운 무언가가 훅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라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샤를을 끌어안았다.

    아이가 자고 있어 다행이었다. 깨어나서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패닉에 빠질 테니.

    미라벨은 행여나 샤를이 깨지 않도록 담요로 아이의 귀를 꼬옥 막았다. 그리고 아이의 귀에 작은 주문을 속삭였다.

    은은한 황금빛이 아이의 귀에 맴돌다 사라지고, 샤를이 평온한 잠에 빠졌다.

    미라벨은 곤히 잠든 샤를을 보고서 한숨을 쉬었다.

    아실만큼은 아니지만 미라벨도 왕실의 일원으로서 마법의 기초를 배웠다. 그래서 숙면 마법과 같은 매우 간단한 마법은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간단한 마법조차도 아실에게 배워서 쓸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샤를이 더 어렸을 때는 종종 썼던 것인데, 또 이렇게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마법을 걸어 놓으면 시동자가 깨우기 전까지 샤를은 깨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 아이가 깨서 놀랄 일은 없다.

    급한 대로 샤를을 챙긴 미라벨은 초조해하며 리카르도의 너른 등을 보았다.

    리카르도는 문을 몸으로 막은 채로 마차에 접근하는 마수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갑주가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우웅, 어마…….”

    “그래, 샤를. 더 자. 푹 자렴.”

    미라벨은 샤를이 잠꼬대를 하자 아이를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그녀가 샤를의 뺨을 매만진 순간, 소피가 마차 안으로 내던져졌다.

    “소피!”

    소피는 미라벨에게 대답을 하지도 않고 다급히 마차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마차는 정적에 휩싸였다. 아실의 보호 마법이 작동한 것이다.

    소피는 그제야 식은땀을 훔치며 숨을 골랐다.

    “허억, 왕, 녀님.”

    “괜찮아? 다친 덴 없어?”

    “네. 기사단장이 데려다줘서요. 절대로 마차 밖으로 나오지 말랬어요.”

    미라벨은 소피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리카르도와 에치오를 비롯한 레나토의 기사들이 마수들을 베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수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마치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수백 마리의 마수가 마차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맙소사…….”

    압도적인 광경에 미라벨의 잇새에서 경악에 찬 감탄사가 비어져 나왔다.

    리카르도가 아무리 뛰어난 검술을 펼친다 할지라도, 이 많은 마수를 다 대적하기는 무리다.

    이건 적군으로 가득한 전장에 장수 한 명을 떨궈 놓고서 승리하라고 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심지어 지금 리카르도에게는 지킬 것이 있었다.

    그는 마수들이 마차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미라벨의 마차는 지금 투명한 유리 볼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구슬 같은 방어막은 단단하지만, 한번 균열이 생기면 다시 복구되지는 않는다. 즉, 균열의 틈으로 마수가 한 마리라도 들어오면 모든 게 끝난다.

    그래서 아실은 미라벨을 위해서 마차에 세 겹의 보호막을 씌워 놓았다.

    설령 보호막 하나가 깨지더라도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방어 수단이 두 개나 더 남아 있도록.

    평범한 마수 무리라면 걱정할 리 없는 꼼꼼한 설계였다.

    긴 폭설에 굶주린, 우두머리조차 잃어 제멋대로 날뛰는 마수 무리가 아니라면.

    파지직, 챙강!

    “헉!”

    가장 겉의 1차 보호막이 깨지는 소리에 소피가 흠칫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혹여라도 샤를을 깨울세라 비명을 참는 그녀를 보며 미라벨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두 개의 막이 남아 있어. 괜찮아.’

    미라벨은 샤를을 간절하게 껴안았다. 아이의 담요를 쥐는 그녀의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미라벨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검을 휘두르던 리카르도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히자 미라벨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녀를 보는 리카르도의 턱에 힘줄이 돋았다.

    리카르도는 검을 길게 휘둘러 여러 마리의 마수를 한 번에 해치웠다. 그리고 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뿌리며 미라벨을 향해 입술을 벙긋하였다.

    ‘걱정하지 마.’

    리카르도의 입술을 읽은 미라벨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리카르도는 다시 홱 몸을 돌리고서 양손으로 검 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바닥에 검을 대번에 내리꽂았다.

    하얀 눈에 검이 푹 꽂히자, 번개를 닮은 보랏빛 검기가 확 퍼져 나왔다. 검기는 마수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내리꽂히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깨갱!”

    “끼이잉!”

    마차로 접근하려던 마수들이 검기가 닿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마수가 죽고, 마차 주변을 동그란 원처럼 에워싸고서 마수의 사체가 쌓였다.

    미라벨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리카르도를 지켜보았다.

    ‘검기를 뿜어내다니.’

    한 번에 검기를 넓게 방출하는 것은 웬만해선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어마어마하게 내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리카르도는 창자가 쥐어짜지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터.

    역시나, 검을 지면에서 뽑아낸 리카르도가 비틀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그는 다시 검을 바로 잡고서 자세를 취했다. 숨 돌릴 새도 없이 또 마수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챙강!

    리카르도를 지켜보던 미라벨은 또다시 들려온 파열음에 흠칫하였다.

    두 번째 보호막이 깨졌다.

    사체를 넘고서 다가온 마수들이 발톱을 세워 달려든 것이다.

    리카르도가 필사의 힘을 다하고 있지만, 혼자서 사륜마차를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수들의 개체 수는 제법 줄었으나 그들의 살기가 더욱 거세졌다.

    에치오를 비롯한 레나토의 기사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마차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광폭한 마수에게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력이 달려도 너무 달렸다.

    “와, 왕녀님…….”

    소피는 파랗게 질려 새된 소리로 미라벨을 불렀다. 두 번째 보호막까지 깨졌으니 이제 남은 건 단 하나의 보호막이다.

    이것까지 깨져 버리면 마차는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그것만은 안 돼.’

    미라벨은 품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얼마 전 나시르가 요즘에는 자기도 단검을 가지고 다닌다며, 미라벨에게도 호신용으로 지니고 있기를 권했다. 이 단검은 그래서 장만한 것이었다.

    “괜찮을 거야, 소피.”

    미라벨은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부여잡고서 말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강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만은 지키겠다는 의지가 그녀를 불태웠다.

    “크르르릉!”

    “컹, 컹!”

    마지막 남은 보호막을 깨려는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위협적으로 가까워졌다.

    미라벨은 소피에게 눈짓을 하여 제 곁으로 오도록 했다. 또 소피와 떨어지면 그땐 손쓸 새도 없이 그녀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라벨은 소피의 동생인 사라를 잃었다. 소피마저 그렇게 잃을 순 없었다.

    “내 손을 꼭 잡아.”

    “흐윽, 왕녀님…….”

    겁에 질린 소피는 눈물을 흘리며 미라벨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녀만큼이나 미라벨도 무서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상황이 바뀌지는 않으니까.

    “대공을 믿자. 그 사람은 강한 사람이니까.”

    미라벨은 소피를 다독이고서 리카르도를 내다보았다. 아까 눈이 마주쳤을 때보다 그는 훨씬 더 가까이에 있었다.

    미라벨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침을 삼켰다.

    리카르도가 가까워졌다는 건 그만큼 보호막이 많이 파손되었다는 뜻이다. 마차에 바짝 붙어서 지켜야 할 만큼.

    끼긱.

    끽.

    마치 유리를 쇠 꼬치로 긁어내리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에 미라벨은 인상을 썼다.

    마수들이 발톱으로 보호막을 내리치다 못해 긁기 시작했다.

    “……대공.”

    미라벨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리카르도를 작게 부르자, 마치 그가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문 앞으로 달려왔다.

    “미라벨!”

    리카르도의 절박한 얼굴이 미라벨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을 때.

    챙강.

    마지막 보호막이 깨졌다.

    보호막이 깨지자마자, 그 틈으로 마수들이 쏟아지듯이 들어왔다.

    “젠장!”

    리카르도는 욕을 씹어뱉으며 마수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차의 창문에 붉은 피가 확 튀었다.

    미라벨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 너머로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마지막 보호막이 깨진 후부터 마차가 마구 덜컹거리고 있었다. 마차 위에 올라탄 마수들이 그르렁거리며 콧김을 내뿜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콰직, 하고 마차의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흡!”

    미라벨은 숨을 들이켜며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녀는 샤를을 담요로 돌돌 말고서 단검을 치켜들었다.

    미라벨이 검을 제대로 쥐자마자, 지붕이 부서지고서 노란 눈을 한 마수가 나타났다.

    마수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소파의 가죽을 긁고서 이를 드러냈다.

    “크르르릉…….”

    마수는 잇새로 침을 뚝뚝 흘리며 미라벨과 대치하였다.

    우두머리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제법 덩치가 큰 개체였다. 그 뒤로 수 마리의 마수들이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라벨!”

    마수가 미라벨을 향해 달려들 때, 뒤에서 리카르도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차의 문을 지키고 있던 그의 예상과 달리 마수들이 지붕에서 침입을 시도하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안 돼!”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절규를 들으며 마수의 눈에 단검을 꽂았다.

    어떻게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키이잉!”

    눈을 찔린 마수가 마구 몸부림을 치며 마차를 흔들었다. 검을 눈에 꽂은 채로 난동을 부리는 마수가 미라벨에게 덤벼들려는 찰나.

    리카르도가 미라벨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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