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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80화 (81/120)

80화

미라벨은 잔뜩 긴장하고서 바른 자세로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걱정과는 달리 마수나 다른 방해물은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골린데에 도착할 때까지 방심할 수는 없다.

예전에는 이소타 협곡을 피하면 마수 무리를 피할 수 있었다.

이 길도 협곡을 피해서 빙 돌아가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통하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마수의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언제 어디에서 마수 떼가 나타날지 모른다.

‘또 마수를 만날 일은 없을 거야.’

미라벨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을 다독였다.

마수의 우두머리를 마주했을 때의 공포는 수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선명했다.

그르렁거리는 마수의 날카로운 송곳니와 드러난 잇몸, 사람의 몇 배는 되는 압도적인 크기와 살기.

그저 무력감밖에는 느낄 수 없는 절망.

그때 미라벨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로지 도망뿐이었다. 그녀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아실의 팔찌가 보호 마법을 펼쳐 줬다고 해도, 세골린데까지 도착한 건 순전히 운이었다.

또다시 그 운이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러니, 미라벨은 그런 불행이 닥쳐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괜찮아.’

미라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의 마수는 죽었다. 리카르도가 죽였다고 했다. 그러니, 적어도 다시 그때와 같은 공포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미라벨은 불안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자는 샤를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비단실처럼 보드라운 아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눈 좀 붙이세요, 왕녀님.”

“아냐.”

미라벨은 건너편에 앉은 소피에게 차분히 대답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커튼을 걷자, 작은 창 너머로 눈산의 풍경이 드러났다.

눈꽃이 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미라벨의 시야에 들어왔다. 소복이 눈이 쌓인 바깥의 광경이 움직이는 그림처럼 천천히 넘어갔다.

‘여기는 계속 겨울이구나.’

미라벨은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마차가 오갈 수 있는 길은 치워졌지만, 그게 눈이 다 녹았다는 뜻은 아니다. 눈산의 눈은 1년 내내 녹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 산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눈산’이라는 고유 명사가 산의 이름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만년설이 아닌가 하였지만, 그건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레나토는 계절과 상관없이 눈이 내리는 곳이니까.

바깥을 내다보던 미라벨은 커튼을 반쯤 열어 놓고서 다시 바로 앉았다.

막 출발하였을 때는 흰 눈이 햇빛을 반사하여 눈부셨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엇비슷한 풍경이라 할지라도 조금씩 보는 편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왕자님은 잘 주무시네요. 어제 새벽에는 몇 번씩 깨셔서 걱정했는데.”

미라벨은 소피의 말에 쌕쌕 자는 샤를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엄마의 손가락 하나를 소중하게 쥐고서 자고 있었다.

보통 때는 이렇게까지 미라벨에게 찰싹 달라붙지는 않는데, 어제 그녀가 눈앞에서 정신을 잃어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제 샤를은 어땠어?”

“말도 마세요. 왕녀님이 자기 때문에 쓰러졌다며 어찌나 우시던지. 또 토하실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그래도 대공 전하께서 잘 달래 주셔서 금방 진정하셨어요.”

“그 사람이?”

“네. 왕녀님을 녹색 방까지 안아 들고 오셔서 주치의 진찰을 받게 하신 뒤에 왕자님을 안아 주시더라고요. 왕자님이 잠들 때까지 계속요.”

“……그랬구나.”

미라벨은 덤덤하게 소피의 얘기에 반응했다. 리카르도가 샤를을 아낀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래서 더 그가 껄끄러웠다.

아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아르밀라의 임신은 필사적으로 피하려 했으니까.

리카르도는 그게 사랑에 무지한 까닭에 한 실수라고 했다. 하지만 미라벨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무심하게 굴면 그만이었을 터.

리카르도가 아르밀라에게 했던 짓은 계획적이었고, 그래서 악질적이었다.

미라벨은 리카르도가 아르밀라에게 대공비의 권한을 주지 않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출신도 부정확한 여자를 제국의 대공비라고 내세우긴 어려웠을 테니까. 또한 둘의 결혼은 애초에 거래였고.

그렇지만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난폭하게 안고, 그녀 몰래 피임약을 먹고, 아이를 없애기 위해 했던 짓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이전까지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는 원래 잔인하고 잔혹한 성정의 사내라고 생각했으니까. 타고난 성정대로 아르밀라도 함부로 대한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미라벨과 샤를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 안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지금의 리카르도는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의 행동을 깊이 반성하고 속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 과거에는 왜 다 알면서도 그렇게 굴었을까.

리카르도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때를 회상하던 미라벨이 미간을 구겼다. 그가 했던 묘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와의 부정의 증거를 꾸역꾸역 낳는 게 여자야.’

그때 리카르도는 치를 떨며 말했다. 진짜 그런 일을 겪은 사람처럼.

하지만 그게 그의 일일 리는 없다. 리카르도에게 여인이라고는 아르밀라가 유일했으니까.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고, 또 그에게 믿어 달라고 하기에 바빠서 몰랐는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거지?’

미라벨은 마차가 흔들린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깊이 생각에 빠졌다.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한번 의문을 품게 되니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까요, 왕녀님?”

“응?”

리카르도의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리던 미라벨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소피가 상냥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하셨어요. 어쩔까요, 왕녀님?”

미라벨은 소피의 얘기에 샤를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지금 너무 오래 자면 이따가 밤에 못 잘 거야. 샤를도 깨울 겸, 그러자.”

“예, 알겠습니다.”

미라벨의 대답에 소피가 마차 문을 두 번 두들겼다. 그 신호에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미라벨은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샤를을 일으키며 작게 소곤거렸다.

“샤를, 배 안 고프니? 점심 먹을까?”

“우웅…….”

아이는 잠투정을 부리며 미라벨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제 제대로 자지 못했다더니 아직 잠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우으웅.”

샤를은 눈을 꼭 감은 채로 도리질을 했다. 아이를 깨우려던 미라벨은 난감해하며 웃었다.

“안 되겠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일부러 깨우면 울지도 모르니, 이대로 놔두자.”

미라벨은 샤를의 몸을 망토로 잘 감싼 뒤에 마차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차갑고 거센 바람이 마차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소피는 바람 좀 쐬고 와. 계속 마차 안에만 있어서 갑갑하지?”

“왕녀님은요?”

미라벨은 대답 대신에 샤를을 보았다. 소피는 작게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올게요.”

소피는 기지개를 켜고서는 마차 밖으로 나섰다. 소피가 나가면서 문을 닫자, 재정비를 하느라 요란한 바깥의 소음이 한결 잦아들었다.

미라벨은 샤를을 토닥이며 마차의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댔다.

‘피곤하기는 하네.’

오랫동안 한 자세로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했다. 미라벨은 허리를 콩콩 두드리고서 목을 좌우로 꺾었다.

똑똑.

간단하게나마 몸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미라벨이 커튼을 젖혀 보려는 찰나, 깊고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가도 될까?”

“무슨 일이죠?”

미라벨은 허락 대신 질문을 던지며 문을 살짝 열었다. 리카르도가 마차의 입구를 가로막듯이 서 있었다.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문 앞에 서 있는 탓에, 아까 전과는 달리 실바람만이 마차 안에 감돌았다.

“시녀만 내보냈길래.”

리카르도는 미라벨에게 어색한 어조로 말하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가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들고 있던 그릇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추울 때는 체력 소비가 많아져. 잘 먹어 둬야 해.”

미라벨의 시선이 소파 위로 향했다. 리카르도가 가져온 그릇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가 들어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고기 스튜를 응시하던 미라벨은 눈을 들어 리카르도를 보았다.

“불을 피웠나요? 아직 밝은데?”

“밤에 불을 피우는 거야말로 위험하지. 마수를 불러들이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지금 따뜻한 음식을 먹고, 저녁을 간단히 때우는 게 나아.”

“샤를도 뭘 먹이긴 해야겠네요.”

“먼저 먹고 있어. 애는 내가 챙길 테니까.”

리카르도는 미라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아이를 건네받으려는 큼지막한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라벨이 샤를을 넘겨주질 않자, 리카르도가 멋쩍어하며 손을 거뒀다.

“내게 맡기고 싶지 않다면 시녀를 불러 줄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미라벨의 입에서 나온 말에 리카르도가 반색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궁금한 게 있다는 사실이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미라벨은 입을 일자로 모으다가 가슴을 부풀리며 크게 숨을 쉬었다.

이제 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냐고 물어보는 건 덧없다.

알고 있는데, 자꾸 찝찝했다. 만약 이대로 흘려보낸다면 앞으로 영영 그 이유를 확인하지 못한 채로 살아야 할 것이다.

리카르도와는 이제 곧 안녕이니까.

미라벨은 결론을 내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려던 때.

“마수다! 마수가 나타났다!”

에치오의 외침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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