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79화 (80/120)
  • 79화

    “떠나. 대신에 나도 함께 가겠어.”

    “뭐라고요?”

    리카르도의 얘기에 미라벨의 눈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자, 리카르도가 황급히 말을 고쳤다.

    “오해하지 마. 내가 국경까지 호위하겠다는 거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마차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걸요.”

    미라벨은 단호하게 리카르도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를 벗어나기 위해 떠나려는 판국에, 배웅까지 받고 싶지는 않았다.

    “사양할게요.”

    “다시 생각해 줘.”

    뜻밖에도 리카르도는 완강했다. 그는 미라벨을 다시 잡고서 손에 힘을 주었다.

    “마수들이 날뛰고 있다고 했잖아.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마차를 타고 움직인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어.”

    미라벨은 조용히 리카르도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거부의 뜻을 나타내기도 전에, 그가 재차 말했다.

    “샤를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줘.”

    리카르도가 입에 올린 이름에 미라벨이 멈칫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소피의 방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샤를은 미라벨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샤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미라벨은 못 할 일이 없었다.

    리카르도도 이 점을 알고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약은 수라고 생각되었지만, 미라벨은 다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으니까.

    가뜩이나 레나토는 마수가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이곳에 온 이후로 산에 가질 않았다.

    사냥이 이뤄지지 않은 데다 무리의 우두머리까지 없으니, 마수는 더욱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만약 아실이 여기에 있다면 미라벨은 이대로 샤를만 세골린데 왕궁에 보내 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나토에는 아실도, 사람을 이동시킬 만큼의 고위 마법을 행할 마법사도 없다.

    샤를을 왕궁으로 데려가려면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불편하고 싫다는 거 알아. 네게 거슬리지 않도록, 마차 밖에서 말을 타고 움직일게. 그러니 샤를을 위해서라도 호위할 수 있게 해 줘.”

    리카르도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달리 묘안을 찾지 못한 미라벨은 무거운 마음으로 승낙했다.

    “알았어요. 대신에 국경까지만이에요.”

    “그래, 국경까지만.”

    리카르도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미라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샤를이 있는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 * *

    날이 밝자, 샤를은 발갛게 부은 눈을 하고서 미라벨을 찾아왔다.

    아이는 엄마의 침대 위로 꼬물대며 올라와서는 훌쩍였다.

    “어마, 흐엥, 잠모태써여…….”

    샤를은 미라벨의 눈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떼를 쓴 탓에 엄마가 쓰러졌다고 생각했는지,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어마……. 흐에엥, 아프지 마…….”

    “엄마는 괜찮아. 울지 마, 샤를.”

    미라벨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안아 주었다. 샤를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에게 포옥 안기며 종알거렸다.

    “집에 갈께여. 집에 가. 어마랑 샤를, 바로 가여.”

    “그래, 그러자.”

    미라벨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샤를이 끝까지 안 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음을 접어 주어 다행이었다.

    미라벨은 다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가 샤를을 배웅해 주신대. 이따가 아침 먹고 출발하자.”

    “느때 삼쵼이?”

    샤를은 작은 주먹으로 눈을 비비고서는 물었다. 미라벨은 아이의 눈물을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까…….”

    “에찌오랑 나시르는? 루째는?”

    미라벨은 이어진 질문에 당황했다. 샤를이 리카르도 말고도 레나토의 사람들을 하나씩 찾자,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샤를은 레나토가 좋아?”

    “웅.”

    미라벨의 품 안에서 꼬물대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박에 나온 대답에 미라벨의 가슴이 돌이 괴어진 듯 답답해졌다. 그녀는 아이를 바르게 앉히고서 차분히 말했다.

    “일단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나중에 또 놀러 오자. 응?”

    “……녜.”

    샤를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엄마를 꼬옥 껴안고서는 다짐을 받아 내겠다는 듯 말했다.

    “아프지 마여.”

    “그래, 약속.”

    미라벨은 샤를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샤를은 냉큼 미라벨과 손가락을 걸고서 약속을 했다.

    아이는 고작 손가락을 거는 약속을 해 놓고서는, 대단한 약조라도 한 것처럼 뿌듯해했다.

    미라벨은 아이를 달래고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창밖을 내다본 그녀의 시야에 짙은 회색빛 하늘이 들어왔다.

    미라벨이 아르밀라였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레나토의 하늘과 같은 빛이었다.

    * * *

    “살펴 가십시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카타리나 부인의 정중한 인사에 미라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샤를, 그리고 소피를 비롯한 세골린데 일행은 지금 비토레가 저택의 정문 앞에 나와 있었다.

    카타리나 부인과 발터를 비롯한 모든 사용인이 저택 앞으로 나와 귀빈을 환송했다.

    하녀장과 인사를 나누던 미라벨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왕녀의 마차를 필두로 하여 짐을 꾸린 기사들과 일행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미라벨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마차 옆에 있는 리카르도였다.

    기사들을 이끌고 있는 리카르도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흑마 위에 올라타 있었다.

    검은 갑주를 입고서 검은 망토를 두른 그에게서 서늘한 위압감이 번졌다.

    아르밀라에게는 익숙하지만 미라벨에게는 낯선 위용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리카르도의 진한 눈매가 드러났다.

    자수정처럼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미라벨을 응시하였다. 미라벨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굳히고서 몸을 틀었다.

    국경까지만 참으면 된다.

    그 이후로 리카르도와 만날 일은 없다.

    미라벨은 이를 세게 물었다. 샤를을 위해서 리카르도의 동행을 허락하였지만, 아르밀라였을 적에 종종 보았던 모습을 한 그를 보니 껄끄러웠다.

    “왕녀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왕녀의 침묵에 카타리나 부인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미라벨은 목을 가다듬고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것 없어요. 하녀장 덕분에 편히 지내다 갑니다.”

    미라벨의 인사에 그녀 옆에 서 있던 샤를이 카타리나 부인에게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카타리나 부인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혔다.

    토끼털로 된 하늘색 망토를 입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카타리나 부인이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언제든지 또 오세요, 왕자님.”

    “녜!”

    샤를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카타리나 부인은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를 보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물러나자, 뒤에 도열해 있는 하녀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루체였다.

    아까부터 울고 있던 루체는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으며 미라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흑, 왕녀님, 잘 가세요…….”

    “잘 있어, 루체.”

    미라벨은 루체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루체와 헤어지는 것만도 벌써 세 번째다. 하지만 몇 번이 되어도 이별은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건 루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꼭, 꼭 또 오셔야 해요…….”

    미라벨은 쓰게 웃었다.

    루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가장 힘들 때 곁에서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루체는 레나토의 사람이다. 세골린데의 왕녀인 미라벨이 그녀를 막무가내로 데려갈 순 없었다.

    그 대신에 미라벨은 루체에게 작은 선물을 남겨 놓았다. 세골린데에서 가지고 왔던 백합 구근이었다.

    “루체는, 흑, 꽃 없어도 되는데. 왕녀님만 있으면 되는데.”

    “그런 말은 하지 마.”

    미라벨은 루체를 다독이고서는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아르칸젤로에서 백합 구근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비싸게 거래된다고 하였으니, 루체의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혹시나 싶어서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 루체의 뒤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그러니 더 이상 루체는 궂은일을 하며 살지 않아도 될 터.

    아르밀라를 도와준 루체에 대한 작은 보상이었다.

    “갈게.”

    미라벨은 마지막으로 루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가 몸을 틀자 루체는 결국 엉엉 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엉, 와, 왕녀님…….”

    “루째…….”

    루체의 울음에 그녀를 지켜보던 샤를의 턱이 쪼글쪼글해졌다.

    미라벨은 눈물을 참는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 주었다. 샤를이 소피의 도움으로 아늑한 마차 안에 타자, 미라벨도 마차에 올랐다.

    이내 왕녀의 마차 문이 닫히고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저택 앞에 퍼졌다.

    마차가 굴러가자 마차 밖에서 ‘히이잉!’ 하고 말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출발!”

    리카르도의 지휘하에 세골린데 일행이 눈산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의 미라벨은 굳은 얼굴로 샤를의 손을 꼭 쥐었다.

    미라벨이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마치 불길한 일이라도 예감하는 것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