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미라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리카르도는 황망한 낯으로 눈을 움칠했다.
“잠시만…….”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그를 지나쳤다. 멍하니 서 있던 리카르도는 그녀가 온실을 벗어나려 하자 황급히 달려갔다.
“미라벨!”
미라벨을 향해 손을 뻗은 리카르도가 그녀를 붙잡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베일을.
리카르도는 미라벨을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서 벌벌 떨었다.
“내가, 내가 뭘 잘못했어? 지난번에 저택의 사용인들을 다 치워서, 그것 때문에 그런 거면…… 아, 아닌가. 내가 너무 샤를에게 편하게 대했어? 그것도 아니면…….”
리카르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절박하게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그는 까맣게 번지려는 시야를 지우려는 듯, 눈을 껌벅이고서 애타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이미 너무 오래 있었어요. 이젠 건국제도 놓쳤을 테니 더 있을 이유도 없고.”
“그것 때문이었어? 아, 안 그래도 지금 알려 주려던 참이었어. 황제가 위독해서 건국제는 취소됐어. 그러니까 부담 같은 거 가지지 말고 여기 있어. 있어 줘.”
다급하게 말하는 리카르도의 설명에 미라벨이 미간을 구겼다.
건국제가 취소되었다니.
그런 거라면, 더더욱 빨리 세골린데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 있는 사이에 황제가 승하하기라도 한다면 미라벨은 세골린데의 사절로서 리카르도와 함께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
미라벨은 조급해져 베일을 잡고 있는 리카르도의 손을 쥐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그의 커다란 몸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리카르도는 미라벨에게는 무력했다.
미라벨은 단호하게 큼지막한 사내의 손을 떨구어 냈다. 미라벨에게 내쳐진 리카르도는 망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샤를과 웃고 떠들었던 사내는 지금, 더없는 절망의 늪에 빠지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가지 마.”
“…….”
“제발, 부탁이야. 용서하지 않아도 돼. 조금만, 조금만 더 너를 볼 수 있게 해 줘.”
간절한 애원에도 미라벨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에 리카르도는 좌절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빌게 제발…….”
“소용없는 짓 하지 마세요.”
미라벨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리카르도가 허겁지겁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매달려 절박하게 말했다.
“날 때려. 짓밟고, 경멸하고, 욕해. 그렇게 날 미워해. 대신 날 떠나지만 마. 나를 버리지만 말아 줘.”
“당신…….”
“으아아앙!”
리카르도를 뿌리치려던 미라벨은 품 안의 아이에게서 난 울음소리에 흠칫하였다. 내내 두 어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샤를이 서럽게 울며 미라벨의 어깨를 작은 주먹으로 두들겼다.
“어마 시러! 히잉, 흑, 늑때 삼쵼한테, 끅, 그러지 마!”
샤를은 바동거리며 미라벨의 품을 벗어나려 했다. 격렬하게 몸을 뒤트는 탓에 아이를 떨굴까 염려된 미라벨이 내려놓자, 샤를이 엉엉 울며 리카르도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흐엥, 느때 삼쵸온!”
당황한 건 리카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넓은 품에 안겨 오는 작은 아이를 보다가 미라벨을 올려다보았다.
혹여나 자신의 행동이 미라벨을 언짢게 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아이를 마주 안아 주지도 못했다. 미라벨은 상냥한 목소리로 아이를 얼렀다.
“샤를, 엄마한테 오렴. 착하지?”
“시러! 시러!”
“우리 집에 가자. 할머니랑 아실 삼촌이랑, 루이즈 이모가 샤를이 보고 싶대. 다들 샤를만 기다리고 있대.”
“시러! 시러, 안 가! 샤를 안 갈래! 엄마 미오! 삼쵼, 삼쵸온!”
샤를은 리카르도에게 착 달라붙어서 훌쩍였다.
“샤를, 늑때 삼쵼이랑 살래, 안 갈래.”
“샤를…….”
미라벨은 착잡해하며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짧은 시간 동안에 리카르도에게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어떡하면 좋지?’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어깨에 얼굴을 포옥 파묻고 서럽게 우는 샤를을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카르도는 아이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자 쩔쩔매며 달랬다.
“샤를, 엄마한테 그러면 안 돼. 그러면 나쁜 아이야. 엄마는 샤를이랑 집에 가자고 한 건데.”
“흑, 여, 여기는?”
“응?”
리카르도의 다독임에 어깨까지 떨며 울던 샤를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샤를은 애처로운 눈으로 미라벨을 바라보며 호소했다.
“어마, 샤를 여기도 집 하면 안 대?”
샤를의 부탁에 미라벨은 숨을 들이켰다. 아이를 마주한 그녀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미라벨의 얼굴이 굳자, 리카르도가 눈치를 보고서 샤를에게 말했다.
“다음에 언제든지 놀러 와. 샤를이 오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삼촌은 기다릴 테니까.”
“어마…….”
샤를은 간절한 눈으로 미라벨을 올려다보았다. 물기를 머금은 새파란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미라벨은 아이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샤를을 달래야 하는데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목이 뜨거웠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샤를이 슬그머니 리카르도의 품에서 떨어졌다.
미라벨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샤를은 리카르도의 손가락을 작은 손으로 꼬옥 부여잡더니, 주머니에 다른 손을 넣었다.
그리고 미라벨에게 그 손을 꺼내어 내밀었다.
“어마, 이거 줄게요. 그니까 샤를 여기도 집 하게 해 주세요.”
아이의 작은 손이 펼쳐지자, 조금 전에 미라벨이 주었던 초콜릿 쿠키가 나타났다.
샤를은 초콜릿이 반쯤 녹은 쿠키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레 내보였다.
“이거 줄게……. 앙 돼여?”
아이는 콧물을 먹은 소리를 내며 쿠키를 내어 주고서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 모습에 미라벨은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눈앞이 아찔했다.
샤를에게 리카르도는 분명, 별 의미 없는 사람일 텐데.
그래야 하는데. 왜 아이는 이 사람을 이렇게나 따르는 걸까.
아버지라서?
리카르도가 제 아버지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서?
미라벨은 비틀하였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도, 지금 아이의 행동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샤를…….”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미라벨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샤를, 이 사람을 따르면 안 돼.
이 사람은 널 죽이려 들었던 사람이야.
엄마가 널 가질 수 없게 하려고 차마 네게 설명할 수도 없는 짓을 했단다.
엄마에게 네가 필요 없다고 한 사람이야.
이 사람은…….
아이에게 할 말을 찾던 미라벨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어지러웠다. 몸에 힘이 빠져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미라벨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녀의 시야가 흐리게 변하고 아이의 울음소리와, 리카르도의 외침이 아스라이 들렸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소리 속에서 미라벨은 참담함에 젖어 눈을 감았다.
* * *
미라벨이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푸른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라벨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처음에는 뿌옇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진다 싶더니 누군가 그녀의 손을 세게 쥐었다.
“미라벨!”
미라벨은 낮게 갈라지는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리카르도가 괴로워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고서 신음하듯 말했다.
“다행이야…….”
“……샤를은요?”
미라벨은 리카르도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방을 둘러보았다. 방 어느 곳에서도 아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자, 푸른 눈동자가 불안함에 흔들렸다.
“샤를은 어디에 있어요?”
“진정해. 샤를은 옆방에서 시녀와 함께 자고 있어.”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듣고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바닥에 닿자 땅이 출렁이는 것 같은 감각에 몸이 휘청였다.
리카르도는 그녀가 비틀거리자 재빨리 다가와 팔뚝을 잡아 주었다.
“괜찮아?”
“샤를…….”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단단한 품을 벗어나기 위해 하느작거렸다. 몸에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덧없는 움직임이었으나, 그녀의 의지만은 확고했다.
“내 아이.”
미라벨의 애절한 음성에 리카르도가 침음했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서는 녹색 방과 연결된 방문으로 향했다.
“아직 새벽이라, 시녀도 샤를도 둘 다 곤히 자고 있을 거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에게 차분히 설명을 해 주고서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소피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샤를의 모습이 문틈으로 보였다.
아이가 곤히 자는 걸 확인한 미라벨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서 긴장을 풀었다.
“이제 됐지? 샤를은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 우고가 스트레스를 너무 받는 것 같다고 하던데. 식사를 제대로 안 한 탓에 쓰러진 거라고 하더군.”
리카르도는 미라벨을 다시 침대에 뉘어 주며 말했다. 그는 애를 태우며 미라벨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랬어. 음식이 입에 안 맞았나?”
“이곳에서 내가 마음 편하게 뭘 먹을 수 없는 건 당연하잖아요.”
탁, 하고서 리카르도의 손을 쳐 낸 미라벨은 분노로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리카르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짓씹듯이 말했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날 테니, 그렇게 아세요.”
“……그래.”
미라벨의 선언에 리카르도는 침울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곧, 그는 눈을 들어 미라벨을 응시하였다. 무언가 다짐을 한 것 같은 결연함이 서린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