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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77화 (78/120)
  • 77화

    나시르는 미라벨 왕녀를 만난 이후로 혼란스러움에 휩싸였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아닐 거야. 그런. 그건 말도 안 돼.’

    왕녀는 아르밀라와 닮았다. 아니, 똑같이 생겼다. 스치듯이 보았지만 그녀의 이목구비는 아르밀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왕녀는 아르밀라와 아예 다른 사람인데.

    “아!”

    복도의 모퉁이를 꺾어 돌던 나시르는 돌연 엉덩방아를 찧었다. 건너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어디다 빼 놓고 다녀?”

    머리 위에서 부루퉁한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시르는 한숨을 쉬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닌가?”

    “하여간 말은 잘하지.”

    에치오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나시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시르를 일으켜 준 그가 변명하듯 우물거렸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샤를 왕자님이 기다리고 계신대서.”

    에치오의 얘기에 옷의 먼지를 떨던 나시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가 기다린다고?”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나자 에치오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맹수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워, 왜 그래? 나는 왕자님이랑 친하게 지내면 안 되나?”

    “아니, 그게 아니라.”

    나시르는 고개를 저었다. 에치오의 얘기에 반사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 게 머쓱했다.

    왕녀가 아르밀라인 것도 아닌데, 그리고 에치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리도 없는데.

    “그게 아니면 뭐?”

    “……왕녀님께 잘해 드려. 겨우 복직되었으니 사고 치지 말고.”

    “왕녀님에게 극진하게 굴라는 건 자네가 아니어도 주군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

    에치오는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고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넉살 좋게 말하던 그가 문득, 외알 안경을 매만지는 나시르를 진지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에치오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나시르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이로군.”

    나시르가 운을 떼자 에치오가 팔짱을 꼈다. 그는 벽에 기대고서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게 말이야, 자네 혹시 왕녀님의 옥안을 본 적이 있나?”

    “옥안이라니?”

    나시르는 에치오가 꺼낸 화제에 눈을 찌푸렸다.

    에치오는 얼마 전 기사단장으로 복직되어, 지금은 라그나르 다리의 보수 공사를 지원하고 있었다.

    공사 작업장에 마수가 나타나지 않도록 밤새 지키느라 피곤하다는 얘기라면 또 모를까.

    대뜸 이게 무슨 소리일까.

    “호기심이라면 넣어 둬.”

    나시르는 에치오의 질문을 무시하고서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에치오는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기심이 아니야. 내가 봤다고.”

    “자네가 어떻게?”

    “똑같이 생겼던데.”

    에치오는 앞뒤를 잘라 말했다. 왕녀의 얼굴을 어떻게 봤는지를 설명하기보다 이게 훨씬 중요한 일이라는 것처럼,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미라벨 왕녀님, 그 여자…… 전 대공비랑 똑같이 생겼어.”

    에치오의 얘기에 나시르가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잘못 봤던 게 아니라는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나?”

    “아실걸? 아니, 아셔.”

    에치오는 눈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단호히 말하는 그를 바라보던 나시르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이내, 나시르는 눈을 들어 에치오를 응시했다.

    “이걸 또 누가 알지?”

    “내가 이걸 누구한테 말하겠어. 알아 봤자 찝찝해하기만 할 건데.”

    나시르에게 대꾸한 에치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시르는 수긍하며 작게 목이 울리는 소리를 냈다.

    에치오는 참을성 있게 나시르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는 성미가 급하고 변덕이 심한 제 성미를 잘 알았다.

    그래서 신중히 결정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는 나시르의 조언을 구했다. 기사단장이 되고 나서 생긴 일종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시르는 그에게 기꺼이 답을 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평소 질문을 던지면 곧장 답을 내 주던 나시르가, 한참을 곰곰이 생각했다.

    “앞으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드디어 나온 결론에 에치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왠지 나시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기는 했다.

    “그럼, 아예 모른 척하라고?”

    “그래.”

    나시르는 에치오를 똑바로 바라보며, 당부하듯이 말했다.

    “절대 내색하지 마. 왕녀님과 가주님 사이의 일은 우리가 끼어들 게 아니니.”

    에치오는 나시르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을 내린 나시르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웃었다.

    * * *

    “꺄하하! 늑때 삼쵸온!”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복도를 지나, 온실로 퍼졌다. 온실에서 차를 마시며 샤를과 리카르도를 기다리고 있던 미라벨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미라벨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퍼졌다. 리카르도를 만날 생각에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샤를 빨라! 샤를은 느때 삼쵼보다도 빨라!”

    뾱뾱뾱뾱!

    샤를의 목소리와 함께 아이가 신은 구두에서 나는 소리도 점점 커졌다.

    이내 샤를이 등장하자 미라벨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를, 왔니?”

    “웅, 어마!”

    샤를은 언제나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서 엄마에게로 뛰어갔다.

    미라벨에게 폭삭 안긴 샤를은 그녀의 뺨에 쪽, 하고 입맞춤을 하고서 수줍게 말했다.

    “보고 시퍼써.”

    “엄마도 우리 샤를 많이 보고 싶었어. 대공 전하랑 재미있게 놀았어?”

    “샤를!”

    미라벨이 샤를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던 때, 뒤에서 리카르도가 달려왔다.

    검은 부츠에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달라붙는 검은 바지, 그리고 나풀거리는 하얀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에 미라벨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리카르도는 생기가 넘쳐 보였다. 활기차게 웃는 그의 모습에 미라벨의 심장이 조여 왔다.

    이토록 밝은 리카르도는 본 적이 없었다. 미라벨에게 그는 무섭고, 차가운 사람이기만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마음이 갑갑했다.

    미라벨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리카르도는 샤를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아이를 대번에 들어 올렸다.

    “왜 이렇게 빠르지, 응? 누가 이렇게 빠를까? 샤를을 도무지 따라잡지를 못하겠구나.”

    “꺄하하하! 어마, 샤를이 이겨써!”

    샤를은 리카르도의 목에 매달리며 까르르 웃었다. 흑발의 청년과 그의 넓은 어깨에 올라탄 검은 머리의 아이는 마치 사이좋은 부자처럼 보였다.

    미라벨은 시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약 리카르도가 아르밀라를 사랑했다면.

    그녀의 아이를 받아들여 주었다면.

    그랬다면, 언젠가는 이런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러지 않았다.

    미라벨은 리카르도를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아르밀라와 그녀의 아이를 부정해 놓고, 샤를을 사랑하는 척 구는 모습이 못내 역겨웠다.

    행복해 보이기까지 해서 더욱, 싫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그가 그녀의 행복을 앗아 갔으니 그녀도 그에게 행복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이리 오렴, 샤를.”

    “웅!”

    미라벨이 손을 내밀자, 샤를은 미련 없이 리카르도의 품을 벗어났다. 미라벨은 샤를을 보듬어 안고서 리카르도를 관찰했다.

    샤를을 미라벨에게 넘겨준 그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를을 안고서 행복하게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미라벨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고 함께 논다고 해도 거기까지다. 누구도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를 이길 순 없다.

    하물며 리카르도는 샤를의 그 무엇도 아니다. 다 크고 나면 기억도 못 할, 한때 알고 지내던 어른에 불과하다.

    미라벨은 자신의 목을 끌어안는 아이를 다독이다가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하녀들이 전부 물러나자, 미라벨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샤를과 놀아 주셔서 감사해요.”

    “매번 그런 말을 할 필요는…….”

    “당연히 해야죠. 대공과 샤를은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귀한 시간을 써 주시는 것이니까요.”

    미라벨의 설명에 리카르도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느리게 숨을 쉬고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도는 미라벨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시선을 떨구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오늘은 중요한 용건이 있어 이쪽으로 모셨어요.”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표정을 못 읽은 척 굴었다. 주인 잃은 개 같은 꼴을 하는 리카르도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미라벨은 샤를의 작은 손에 초콜릿 쿠키를 쥐여 주며 여상히 말했다.

    “어젯밤 제설 작업이 끝나 눈산의 길이 열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일 세골린데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드려요.”

    미라벨은 덤덤히 말을 마쳤다. 후련함마저 느껴지는 인사말을 남기고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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