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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76화 (77/120)
  • 76화

    미라벨은 나시르가 아르밀라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고요?”

    미라벨은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그녀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시르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아뇨, 그게…… 송구합니다, 왕녀님. 오늘 제가 좀…….”

    나시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는 답지 않게 쩔쩔매다가 입술을 축였다. 미라벨은 그를 바라보다가 베일로 손을 뻗었다. 베일을 정리하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나시르는 그녀를 관찰하지도 못하고서 혼란스러워하고만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아서인지, 잠깐 어지러웠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미라벨은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여전히 몸을 숙이고 있는 나시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무슨 얘기인지 다 알았습니다. 다행히 샤를에게 영향을 줄 만한 건 아닌 것 같네요.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예.”

    미라벨은 멍하니 대답하는 나시르를 내버려 둔 채 방을 나섰다. 차분한 걸음으로 복도로 나온 미라벨은 떨리는 손을 들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아…….”

    미라벨은 어깨가 크게 한 번 들썩이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복도를 지키고 있는 자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태연한 척을 하며 발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가 향하는 곳은 샤를이 있는 녹색 방이 아니었다. 미라벨은 혼자 있고 싶었다.

    이 마음을 추스를,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모시겠습니다, 왕녀님.”

    미라벨이 녹색 방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려 하자, 복도의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미라벨은 힘겹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기사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뒤로 물러났다.

    기사를 뒤로한 미라벨이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한 곳을 향했다.

    처음에는 느긋했던 걸음이 이제는 거의 뛰다시피 하는 것처럼 빨라졌다.

    콰앙.

    미라벨은 서재 안으로 들어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한낮인데도 두꺼운 커튼이 쳐진 서재는 한밤처럼 어두웠다. 미라벨은 밤을 흉내 낸 암흑 속에서 비로소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흑…….”

    미라벨은 문을 등지고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베일 아래로 맑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가주님이, 붉은 방에서 피를 많이 흘리고 누워 있었어요.’

    미라벨의 머리에 루체의 목소리가 빙빙 돌았다. 그녀는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서 숨을 헐떡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났을 거래요.’

    미라벨은 눈을 찡그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고통이 해일처럼 그녀를 덮쳐 왔다.

    붉은 방은 아르밀라가 죄인처럼 갇혀 있던 곳이자 리카르도가 목숨을 끊으려 했던 곳이다.

    그런데 조금 전 나시르에게 붉은 방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미라벨은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리카르도를 먼저 떠올렸다.

    왜일까.

    왜, 보지도 않은 광경부터 상상해 버렸을까.

    그녀는 자신의 과거부터 떠올렸어야 했다. 피 웅덩이 위에 쓰러져 있는 리카르도의 모습이 아니라.

    ‘이대로는 안 되겠어.’

    미라벨은 입술을 사리물고서 눈물을 닦았다. 그새 마음이 너무 약해진 것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한시라도 빨리 레나토를 떠나야겠다는 조바심이 찾아왔다.

    그동안은 폭설로 레나토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라그나르 다리의 보수가 시작되었으며 눈도 제법 녹았다.

    미라벨은 사실, 다리가 다 고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국제를 위해서 온 사절이니 행사는 놓치더라도 황제는 알현하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수도에서도 레나토의 날씨가 어떤지 잘 알 터. 그러니 무리해서 황제의 알현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세골린데 측에서 날씨 핑계를 대면 제국에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리가 무너져 내릴 만큼의 폭설이었으니까.

    게다가 미라벨은 그 폭설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람이 아닌가.

    ‘당장 떠나자.’

    미라벨은 마음을 다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푸른 눈을 빛내며 문고리를 잡았다.

    황궁이든, 세골린데든. 떠나야 했다.

    리카르도가 없는 곳으로.

    * * *

    아르칸젤로 제국은 백합에 미쳐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두란테에게 수많은 황금을 안겨 주었다.

    두란테는 백합의 가격이 오르는 기미가 보이자마자 재빨리 움직였다.

    다른 귀족들이 비싸 봤자 그깟 꽃이라며 무시하였을 때, 두란테의 상단은 백합 판매의 독점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백합의 공급을 확 줄였다.

    제국은 가뜩이나 궂은 날씨 때문에 꽃이 귀했다. 한데 그중에서도 백합이 점점 귀해졌다.

    귀해지니 비싸지고, 비싸지니 수요가 급증했다.

    귀하고 비싼 것이라면 무조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수도다.

    그리고 수도가, 제국의 유행을 주도한다.

    두란테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현재, 백합 구근 한 개가 수도 중심부의 저택값까지 치솟고 있었다.

    두란테는 백합을 비싼 값에 파는 동시에 백합 생산권마저 손에 쥐었다.

    제국 유일의 곡창 지대인 아달베르토령의 토지를 백합밭으로 전부 갈아엎었다.

    사람들은 두란테를 부러워하며 떠받들었다. 황금과 같은 꽃을 가진 자에게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고자 모여들었다.

    이대로만 가면 귀족회는 물론이고 주요 귀족들을 모두 두란테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아달베르토에 폭설이라니!”

    백합의 수요만 끊이지 않는다면.

    “이래선 안 돼. 이대로는.”

    두란테는 백작령에서 올라온 편지를 구기며 중얼거렸다.

    황제의 목줄도, 황금줄도 모두 그의 손에 있건만. 하늘이 두란테를 돕지 않았다.

    보통 폭설은 레나토에 머물고, 그곳의 눈산을 넘지 못한 채로 눈구름이 사라진다. 그런데 이번의 눈구름은 달랐다.

    강풍을 동반한 폭설이라고 하더니 바람이 눈구름을 아달베르토령까지 이끈 것이다. 그리하여 농사를 짓던 이들은 망연자실하게 백합이 얼어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폭설에 온실을 지을 틈도 없었다.

    입김이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에 아달베르토령의 사람들은 당황하며 집 안에 틀어박히기에 바빴다.

    한파는 레나토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달베르토령의 주인인 두란테가 수도에 나와 있기까지 했다.

    이에 대처는 더욱 더뎠고, 그것이 백합 농사의 실패로 이어졌다.

    집사가 보낸 편지에는 올해 백합 농사는 물론이고 다른 곡식의 수확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백합의 수익을 기대하고 곡식밭을 뒤집었기에,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는 소식과 함께.

    “백합…… 백합이 더 있어야 해.”

    두란테는 초조해하며 집무실의 책상을 두들겼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황궁의 지붕을 응시하며 머리를 굴렸다.

    지금 귀족회의 귀족들은 백합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상단이 두란테에게 백합을 받을 수만 있다면, 비토레 대공을 차기 황제로 지지하겠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두란테는 지금 백합이 더 필요했다. 제국 전체의 백합을 가지고 있는데도 부족하기만 했다.

    황제는 지금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이것이 두란테의 초조함이 극에 달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두란테는 황제가 건국제에서 리카르도와 자신의 딸이 성혼하도록 밀어붙이게 하려 했다.

    하지만 황제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두란테의 입김이 아무리 거센들, 황제가 붕어하려는 마당에 무도회를 열자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런 때조차도 도움이 안 되지.”

    두란테는 황제의 병약함에 치미는 짜증을 어쩌지 못하고 혀를 찼다. 황실 주치의를 바꾸겠다고 해서 아달베르토령의 주치의를 시작으로 벌써 의원만 다섯 번째 바꾸었다. 그때마다 두란테가 새 의원을 매수하느라 들인 돈도 적지 않았다.

    황제는 매번 새 의원에게 새로운 약을 처방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건강이 급격히 나아지길 바랐다.

    과하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각기 다른 성분의 약들이 몸 안에서 서로 어찌 작용했는지, 황제는 두란테가 예상한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쇠약해져 갔다.

    급기야는 건국제를 아예 취소해야 했을 정도로.

    그러니 리카르도의 혼사를 황명으로 강제하기는 틀렸다. 이렇게 된 바에야, 일단 대공을 황제로 올린 후에 줄리아를 황후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귀족 모두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백합은 그러기 위한 유일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구근이라도 미리 확보해야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구근을 얻지?’

    일단 제국에서는 불가능하다. 제국의 백합은 이미 두란테가 다 갖고 있어서 더 긁어모을 것도 없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얻어야 하는데.

    해외, 해외라…….

    생각에 잠겨 있던 두란테가 눈을 부릅떴다.

    ‘세골린데!’

    묘수를 생각해 낸 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번 건국제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세골린데의 미라벨 왕녀는 백합을 사랑하기로 전부터 유명했다. 그러니 두란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왕녀를 황궁으로 불러내야 했다.

    무슨 일을 일으켜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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