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시르는 강렬한 빛에 눈을 찌푸렸다. 어둑한 복도와 달리 녹색 방은 마치 봄날의 오후처럼 환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그래서 나시르는 빛을 등진 여인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샤를은 용케도 상대방을 바로 알아보았다. 심지어 그녀를 향해 손을 뻗기까지 하였다.
“어마!”
“샤를.”
나시르는 한 박자 늦게 여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샤를 왕자가 어머니라 칭하고, 녹색 방에 머무르는 손님.
미라벨 왕녀다.
나시르는 고개를 숙여 왕녀에게 예를 갖췄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샤를을 안은 왕녀가 몸을 바로 세우고서 그에게 다가왔다. 짙은 그림자가 그의 몸 위로 내려앉는다 싶더니 이어서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사해요, 나시르.”
‘감사해요, 나시르 님.’
순간 왕녀의 음성과 겹쳐서 떠오르는 음성에 나시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익숙한, 그리고 그리운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가 눈에 힘을 주자 시녀가 가져온 베일을 쓰던 왕녀가 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아무것도.”
나시르는 당혹스러워하며 시선을 내렸다.
찰나였지만 왕녀의 목소리가 그를 동요시켰다.
왕녀의 음성은 나시르가 두 번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아르밀라, 그 가여운 여인의 목소리와.
‘나도 그분을 그리워했던 건가.’
나시르는 씁쓸히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샤를 왕자의 위로 탓일까. 오늘따라 생각의 끝이 자꾸 아르밀라에게로 향했다.
아르밀라 비토레.
마른 어깨를 움츠리고서 슬픈 눈으로 리카르도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여자.
그리고 끝내 눈산 속으로 사라진 가여운 여자.
“……려다줬나요?”
“예?”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르밀라의 처연한 얼굴을 떠올리던 나시르가 멍한 소리를 내었다. 왕녀는 그의 반응에 풋 하고 웃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시르가 샤를을 데려다줬냐고 물었습니다.”
“네. 복도에서 우연히 왕자님을 뵈어서요. 그래서…….”
“루체가 잘못했어요!”
나시르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옆에 서 있던 루체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루체가, 루체가 깜박했어요! 왕자님이 제일 중요한데. 왕자님 잃어버리면 큰일 나는데. 왕자님 데리러 가는 거, 깜박했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루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외쳤다. 하녀의 속죄에 왕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샤를이 안전하게 내 품으로 돌아왔으니 괜찮아.”
“하, 하지만…….”
“괜찮대도, 루체. 일어나렴.”
“마자, 루째! 괜차나!”
왕녀의 말을 거드는 아이의 명랑한 음성에 루체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루체는 그새 빨갛게 익은 코를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왕녀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루체는 바보예요. 멍청이…….”
“그런 말은 하지 마.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
나시르는 공손히 앉은 채로 왕녀의 인자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는 순간적으로 아르밀라와 똑같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언뜻 들으면 비슷했지만, 완전히 달랐다.
아르밀라의 목소리는 늘 힘이 없고 잘게 떨렸다. 작게 속삭이듯이 말을 해서 때로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했다.
하지만 왕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단이 있었다. 또한 위엄까지 서려 있어 누가 들어도 왕족의 음성이라 할 만했다.
‘세골린데 억양 때문이었나?’
나시르는 눈썹을 모으며 쉽게 의혹을 지워 냈다. 그는 무릎에 손을 짚었다.
왕자를 무사히 데려다주었으니 가던 길을 마저 갈 생각이었다. 몸을 일으킨 나시르는 왕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 했다.
“루째 덕뿌네 샤를, 빨간 데도 구경해써! 괜차나 루째!”
샤를 왕자의 말만 아니었다면.
“……빨간 데라니?”
왕녀는 ‘엣츙!’ 하고 기침을 하는 왕자에게로 고개를 틀고서 물었다. 왕자는 자신의 코를 닦아 주는 엄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말했다.
“웅! 그치만 쉿! 비밀이래써. 늑때 삼쵼한테는 비밀.”
왕자는 자그마한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워 왕녀의 입술께로 가져갔다. 왕녀의 입술을 가리고서 비밀을 지키라는 제스처를 한 왕자가 나시르를 바라보았다.
“그쵸. 비밀!”
“아…… 네.”
갑자기 터뜨려진 작은 폭탄에 당황한 나시르는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왕자의 입단속이 철저하지 못했다.
애초에 세 살배기 아이의 입단속이 쉬울 리 없건만.
주변에 샤를 또래의 아이가 없는 나시르로서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제며, 화법 모두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왕자가 어딜 구경했다는 거죠?”
왕자에게 비밀을 지키겠다고 말해 주던 왕녀의 눈길이 나시르에게 꽂혔다. 나시르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사리물었다.
왕녀는 외부인이다. 외부인에게 비토레가의 깊은 비극이 담긴 장소를 섣불리 발설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샤를 왕자가 ‘그곳’을 본 이상, 마냥 잡아뗄 수는 없는 노릇.
나시르가 시간을 끌자, 그의 곁에 서 있던 루체가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루체가 조바심을 내자 나시르는 초조해졌다. 그는 루체가 ‘그곳’에 대해 뱉어 내기 이전에 먼저 설명을 해야만 했다.
“대공저에 버려진 방이 있습니다. 더는 사용하지 않는 창고 같은 곳인데 왕자님께서 우연히 그곳을 발견하셔서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최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돌려서 설명한 나시르의 말에 왕녀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시르가 한숨 돌리기도 전에, 그녀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그걸 비밀로 하라고 했나요?”
“그건…….”
“단지 창고였다면 비밀일 필요도 없죠. 대체 어떤 곳이기에 아이의 입단속까지 한 거죠? 샤를이 뭘 봤는지, 어디에 갔는지 자세히 설명하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왕녀는 말없이 나시르를 응시했다. 무거운 침묵 뒤에, 그녀가 루체에게 명을 내렸다.
“루체 넌 들어가서 소피를 도와 샤를에게 점심을 먹이렴. 보좌관과 할 얘기가 있으니.”
“예, 왕녀님!”
나시르와 왕녀 사이에 끼어 눈치를 살피던 루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루체가 문을 닫고 들어가자, 왕녀는 문을 등지고 서서 나시르를 바라보았다.
마치 샤를 왕자가 있는 방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선 왕녀가 굳은 어조로 말했다.
“샤를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입니다. 무언가에 관심이 생기면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 절대 잊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도 않죠. 그러니 보좌관이 아이에게 어떤 걸 보여 줬는지, 아이가 뭘 보았는지 나는 알아야겠습니다.”
왕녀는 일국의 왕녀로서가 아니라 아이의 어머니로서 말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행여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야겠다는 태도에 나시르는 한숨을 삼켰다.
왕녀가 무얼 걱정하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그녀는 무려 세골린데의 왕녀다. 제국민도 아닌 이에게 비토레가의 은밀한 역사를 공개하기는 곤란했다. 나시르는 눈썹을 모으고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뭐가 되었든, 저도 그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세골린데의 왕녀로서 약속하지요.”
나시르는 결국 한숨을 토해 내었다. 왕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숨기기도 곤란했다. 그는 복도의 기사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제 말은 듣고 잊어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왕녀는 나시르의 목소리에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르는 일단 걸음을 옮겨 빈방으로 왕녀를 인도했다. 텅 빈 방에 들어온 나시르는 왕녀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고르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샤를 왕자님께서 발견하신 곳은 창고가 아니라 선대 대공비의 방입니다. 왕녀님이 머무르시는 방이 녹색으로 치장되어 있듯이, 그곳은 붉게 꾸며져 있지요. 그래서 왕자님께서 빨간 데라고 하신 겁니다. 왜 그 방을 본 걸 비밀로 부탁드렸냐면, 가주님과 돌아가신 대공비 전하의 사연이 있는 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주님께서는 아직도 대공비 전하를 그리워하고 계셔서…… 왕녀님?”
가만히 서서 나시르의 설명을 듣던 왕녀가 갑자기 문틀을 거머쥐었다. 손등이 하얗게 질린다 싶더니, 그녀가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왕녀님, 괜찮으십니까?”
나시르는 왕녀의 반응에 당황하며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왕녀의 머리에 쓰고 있던 베일이 출렁이고,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베일 아래로 드러난 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붉은 방…….”
왕녀의 잇새에서 비어져 나온 단어에 나시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나시르는 왕녀에게 ‘그곳’이 ‘붉은 방’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이걸 알고 있는 걸까.
놀란 나시르의 손에 힘이 풀리자, 그에게 기대고 있던 왕녀의 몸이 아래로 쏠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베일이 나풀거리며 흘러내리고, 왕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왕녀님!”
왕녀를 따라 몸을 숙인 나시르가 황급히 그녀를 다시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베일을 벗은 왕녀의 얼굴을 본 그는 자신이 무얼 하려 했었는지도 잊은 채, 속삭였다.
“아르밀라 님……?”
그의 주군이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여운 여인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