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73화 (74/120)
  • 73화

    리카르도는 샤를을 가뿐하게 안아 들고서 몸을 일으켰다. 미라벨의 시야 속에서 리카르도가 긴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흑발을 한 사내와 그의 품에 안긴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아이.

    마치 그림 같은 두 사람을 바라보던 미라벨은 손에 들고 있던 모종삽을 떨궜다.

    툭, 하고 삽이 떨어져 뒹구는데도 미라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리카르도와 샤를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는 그녀의 심장이 꽉 조여 왔다.

    등골이 쭈뼛하도록 소름이 돋았다. 당장 리카르도에게 달려가 아이를 빼앗아 오고 싶었다.

    당신이 뭔데 내 아이를 안느냐고, 내 아이를 내놓으라고 외치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밀었다.

    ‘진정해.’

    미라벨은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리카르도는 샤를을 빼앗아 가지 않는다. 샤를에게 그는 ‘아버지’가 아니다. 여기서 유별나게 군다면 리카르도에 대한 샤를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다.

    리카르도는 샤를에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흔하디흔한 인연 중 하나에 불과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미라벨은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야 했다.

    “빨리 오셨네요.”

    미라벨은 가까스로 목을 열어 소리를 내었다. 어느덧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온 리카르도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삼쵼…….”

    리카르도를 응시하던 미라벨이 샤를의 웅얼거림에 흠칫했다.

    샤를이 통통한 볼을 리카르도의 가슴에 비비고 있었다.

    낯선 이한테 쉽게 응석을 부리지 않는 샤를의 행동에 당황하던 미라벨의 시선이 리카르도의 셔츠로 옮겨 갔다.

    고급스러운 하얀 셔츠에 샤를의 뺨에 묻었던 흙먼지가 문질러지고 있었다. 미라벨은 난감해하며 샤를에게 말했다.

    “샤를, 대공 전하의 셔츠를 더럽히면 안 돼.”

    “괜찮아.”

    리카르도는 샤를을 데려오려는 미라벨을 만류하였다. 그는 아이의 뺨에 묻은 흙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닦아 주며 말했다.

    “뭐든 다 해도 괜찮다.”

    “웅?”

    자신을 사이에 두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아이가 눈을 깜박였다.

    리카르도는 샤를의 머리에 입을 맞추려다가 흠칫하고서는 그대로 멈췄다. 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샤를이 다시 엄마에게로 돌아가자, 미련 가득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미라벨에게 말했다.

    “백합 구근을 관리하러 온 거지? 내가 뭔가 도울 게 없나?”

    “딱히 그러실 건 없어요. 다 끝나서요.”

    미라벨의 거절에 리카르도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뒤를 따라왔던 소피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왕녀님, 구근 확인이 다 되셨으면 방으로 돌아가시겠어요?”

    미라벨은 샤를과 리카르도를 번갈아 보았다.

    만약 여기서 방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부자의 상봉은 이걸로 끝난다. 잠시 고민하던 미라벨은 입술을 사리물다가 말했다.

    “그래. 이만…….”

    “어마아.”

    소피에게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미라벨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샤를은 파란색 눈을 빛내며 미라벨을 빤히 보고 있었다.

    “늑때 삼쵼이랑 놀고 시퍼.”

    “늑대 삼촌은 이곳의 주인인 대공 전하야, 샤를. 한가하게 놀 시간 같은 건 없으셔.”

    “아니.”

    미라벨의 다독임에 리카르도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는 샤를의 앞에 꿇어앉고서 아이에게 말했다.

    “하나도 바쁘지 않아. 너에게 내어 줄 시간은 잔뜩 있다.”

    “대공 젼하 아니에요?”

    “대공이지만,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너는 그래도 돼.”

    “왜요?”

    아이의 직설적인 질문에 리카르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한 번에 감기는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애틋하게 말했다.

    “너는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과 닮았거든.”

    “그게 몬데요?”

    “그건…….”

    “그럼 샤를, 대공 전하께서 허락해 주셨으니 잠시만 더 있다 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리카르도와 샤를의 대화를 듣던 미라벨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제안에 샤를이 눈을 돌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웅!”

    샤를은 활짝 웃고서 미라벨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선 리카르도에게 다가가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안아 달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아이의 행동에 리카르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미라벨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가 샤를을 안아 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온실에는 아이의 밝은 웃음소리가 가득하였다. 미라벨은 해맑은 아이의 미소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 * *

    집무실에서 나온 나시르는 서재로 향했다.

    요즘 리카르도가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덕에, 나시르의 업무 부담이 제법 줄었다. 그래서 지금 같은 휴식 시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계속 이러셔야 할 텐데.’

    복도를 걷던 나시르는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어젯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더니 유독 피곤했다.

    건국제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라그나르 다리의 보수는 아직 멀었다.

    그렇기에 나시르는 발레리오에게 세골린데의 귀빈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황실의 의견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기는 했지만 이걸 보낼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전서구를 날리기에는 아직 바람이 너무 거셌기 때문이었다.

    ‘세골린데의 손님들은 어떻게 하시려나.’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을 보던 나시르의 생각이 문득 미라벨 왕녀와 그녀의 아들에게 닿았다.

    조금 전 집무실에서 본 장면 때문에 특히나 샤를 왕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샤를 왕자가 리카르도의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순간, 나시르는 헛것을 본 줄 알았다.

    미친 늑대라 불리는 대공에게 안긴 것도 모자라, 그의 품에서 잠들다니.

    샤를 왕자가 대범하다 해야 할지 무례하다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다. 잠든 샤를이 깰세라 리카르도가 목소리를 낮추었던 걸 생각하면,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사이길래.’

    나시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리카르도가 누군가에게 자상하게 군 것을 여태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아르밀라에게조차도 냉정하지 않았던가.

    만약에 리카르도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이랬을까 싶지만.

    그 아이는 이미 아르밀라와 함께 죽었다.

    ‘살아 있다면, 왕자님 정도 되었을까?’

    나시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리카르도가 샤를을 애지중지하는 이유는.

    리카르도 비토레와 애지중지라는 단어를 한 문장에 넣어서 말하는 게 참으로 어색하지만, 그것 외엔 다른 표현법이 없었다.

    ‘샤를 왕자, 라.’

    나시르는 복도를 걸으며 샤를 왕자에 대한 정보를 되짚어 보았다.

    샤를 왕자, 즉 샤를 에티에네트 왕자는 세골린데 왕녀의 아들이다.

    수정구를 통해 레나토로 온 이 왕자는 세골린데의 금지옥엽이었다.

    여기까지가 나시르가 샤를에 대해 알고 있는 기본적인 정보였다.

    보통의 귀빈이라면 이만큼 알고 있는 것으로도 족하다.

    하지만 나시르는 샤를 왕자에 대한 정보를 더 수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리카르도가 그를 끔찍이 아끼니까.

    미라벨 왕녀는 그 사실을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는 리카르도와 샤를을 떼어 놓진 않았다.

    더욱 정확히는 떼어 놓지 ‘못한다’고 해야 하리라.

    카타리나 부인 말에 의하면, 어제는 리카르도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려는 왕자를 왕녀가 꾸짖다가 한바탕 소동이 났다고 했다.

    왕자가 서럽게 울며 리카르도에게 달라붙어서, 왕녀가 진땀을 뺐다고.

    샤를 왕자뻘의 손주가 있는 카타리나 부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 나이대 애들이 고집을 부리면 어른은 이길 수가 없지요.’

    부인이 혀를 차며 말하는 모습을 떠올리던 나시르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샤를 왕자야 그렇다 쳐도 리카르도가 걱정이었다. 겨우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는데, 샤를 왕자와 떨어지게 되면 다시 폐인이 되지는 않을까.

    리카르도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웃게 되고, 이내는 평범하게 업무까지 볼 수 있게 된 데는 샤를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샤를 왕자는 세골린데의 왕족이다. 그러니, 이번 방문이 끝나면 리카르도와는 더 만날 일이 없다.

    나시르는 그게 염려되었다.

    샤를이 세골린데에 돌아가고서 혼자 남을 리카르도가, 또다시 미쳐 버릴까 봐.

    “에츄!”

    복도를 걷던 나시르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변을 바짝 경계하며 둘러보았다.

    대공이 대공비를 잃고서 레나토를 넘보는 자들이 생겼다.

    대부분은 에치오 선에서 처치하였지만, 간혹 간 크게 대공저까지 침입하는 자도 생겼다. 그래서 무술과 담을 쌓은 나시르도 단검을 품에 지니고 다니게 되었다.

    나시르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소리는 집무실 쪽 복도 끝에서 나고 있었다.

    품 안에 손을 넣은 나시르는 잔뜩 긴장하고서 귀를 쫑긋 세웠다.

    “엣츙!”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난 소리에, 단검을 꺼내려던 나시르가 눈을 깜박였다.

    ‘잠깐, 이상한데.’

    수상한 소리이기는 하지만 자객은 아니다. 나시르가 단검을 쥐려던 손을 품에서 뺀 찰나, 다시금 또 소리가 났다.

    “엣츄!”

    이내 복도 끝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톡 튀어나왔다.

    의문의 소리를 내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파악하려던 나시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