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걸로 충분해.”
리카르도와 미라벨의 시선이 얽혔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뜨겁게 응시하며 다짐하듯 말했다.
“네가 허락한 이상으로는 절대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을게.”
맹세와도 같은 말에도 미라벨의 경계심은 줄지 않았다. 그녀는 리카르도를 차갑게 쏘아보며 운을 뗐다.
“어차피.”
동시에 문으로 향한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없을 거예요. 눈이 녹고 있으니까.”
미라벨의 말에 숨겨진 뜻을 읽은 리카르도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이 녹으면 눈산의 길이 열린다. 그러면 미라벨 일행은 세골린데로 돌아갈 수 있다.
즉, 라그나르 다리가 건국제 전에 보수되지 못할지라도 미라벨은 떠날 수 있다.
그러니 리카르도가 샤를에게 접근한다 해도, 아이는 조만간 떠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에게 리카르도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질 한때의 인연에 지나지 않을 터.
미라벨은 바로 그 점을 짚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미간을 구기고서 미라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촛불로 밝힌 어두운 곳에 있는데도 그녀의 금발은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반짝이는 금발을 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서 흐릿해졌다.
언젠가, 리카르도는 이런 촛불 아래에서 아르밀라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사이, 몇 가닥이 금실처럼 빛났더랬다.
그때의 아르밀라는 연정으로 빛나는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를 원했었다.
그때의 그녀는…….
리카르도는 홀린 듯이 금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리카르도의 손이 닿기 직전, 미라벨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샤를의 열이 다 내리거든 만나게 해 줄게요.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한 빈손을 바라보던 그가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기다릴게.”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순순한 대답을 듣고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리카르도는 허망한 눈으로 작아지는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렇게, 문가에 선 채로 한참을 있었다.
* * *
샤를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아이는 텅 빈 약병을 빤히 바라보다가 엄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눈빛이었다.
간절하게 반짝이는 부담스러운 눈길에, 미라벨이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래, 샤를?”
“샤를 약 다 먹어써!”
샤를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일주일째 침대 생활을 하느라 갑갑할 만도 하건만, 아이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게, 다 먹었네.”
미라벨은 바닥을 보인 약병을 옆으로 치우고서 샤를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꼬박꼬박 약을 잘 챙겨 먹은 덕인지, 몸 상태가 다행히 금방 평소대로 돌아왔다. 샤를은 미라벨이 열을 재는 동안 얌전히 있다가 몸을 배배 꼬았다.
“어마, 이제 샤를, 다 나아써?”
“응.”
“그러며언, 이제 샤를 늑때 삼쵼 만나도 돼?”
“음…….”
미라벨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갈수록 약을 안 먹으려 들기에, 다 먹으면 늑대 삼촌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다. 딱 한 번 지나가듯 한 말인데 그걸 철석같이 믿은 모양이었다.
미라벨이 뜸을 들이자, 샤를이 그녀를 오동통한 작은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더없이 간곡히 말했다.
“늑때 삼쵼 샤를 안 훔쳐 가써. 삼쵼이 안아 주니까 샤를 안 아팠어. 삼쵼 조은 사람이야.”
“그래.”
미라벨은 착잡해하며 샤를의 이야기를 들었다. 리카르도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엄포를 놓았던 걸, 아이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리카르도를 두려워할 만도 하건만.
샤를은 리카르도의 험담을 기억하면서도 필사적으로 그의 편을 들고 있었다. 잠깐 만난 게 전부일 텐데도, 리카르도에게 정을 많이 준 것 같았다.
“샤를 약 다 먹었는데…….”
미라벨은 아이의 청에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둘의 만남을 미룰 수 없었다.
‘그래도 단둘이서는 안 돼.’
사실, 미라벨은 샤를과 리카르도가 만나는 건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샤를이 원하고 있는 데다가, 같은 공간에서 지내고 있는 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방해하여 아이의 애를 태우느니 차라리 만나게 해 주는 게 낫다.
하지만 샤를이 리카르도에게 지나치게 정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래서 리카르도에게도 경고하지 않았던가.
미라벨은 샤를을 안고서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있는 소피를 보았다. 수틀에 수를 놓으면서 미라벨을 흘끔거리던 그녀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미라벨이 대공을 못마땅해한다는 걸 아는 소피는 샤를이 늑대 삼촌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눈치를 보았다.
미라벨은 소피에게서 시선을 돌리고서 샤를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굳게 결심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늑대 삼촌이랑 같이 온실에 갈까? 엄마랑, 소피 이모랑 다 같이.”
“루째도!”
“그래, 루체도.”
미라벨의 대답에 샤를이 활짝 웃었다. 아이는 신이 잔뜩 난 얼굴로 미라벨을 와락 껴안았다.
“조아!”
미라벨은 키득거리는 샤를을 꼬옥 안아 주었다. 그녀가 소피에게 리카르도를 온실로 불러 달라고 하자, 소피가 기다렸다는 양 벌떡 일어났다.
샤를은 미라벨에게 어서 온실에 가자고 조르며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미라벨은 하는 수 없이 아이와 함께 온실로 향했다.
“신난다, 신난다!”
미라벨은 아이의 밝은 미소를 보며 쓰게 웃었다.
샤를이 웃으면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따라서 기뻐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샤를이 좋아하면 할수록, 그녀의 마음은 무거워지기만 했다.
* * *
단풍잎 같은 아이의 손에 흙이 잔뜩 묻었다. 멜빵바지를 입은 샤를은 온실의 정원에 철푸덕 앉아 흙을 조물조물했다.
미라벨은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서 백합 구근의 상태를 살폈다. 꾸준히 관리한 덕에, 다행히 레나토의 한파에도 얼지 않았다.
미라벨은 흙을 가지고 노는 샤를에게 구근을 하나 주고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흙으로 토닥토닥해 줘. 그렇지, 그렇게.”
“토닥, 토닥.”
샤를은 미라벨이 가르쳐 준 대로 구근이 심어진 화분의 흙을 도닥였다. 악력이 약해 흙은 만지나 마나였지만, 그래도 아이는 진지하게 할 일에 임했다.
미라벨은 화분의 구근에 물을 주며 샤를에게 말했다.
“그래. 토닥토닥. 잘하네.”
“샤를 잘해!”
칭찬을 받은 샤를이 방긋 웃고서 양손으로 흙을 마구 두들겼다. 미라벨은 흙장난을 하는 아이의 뺨에 묻은 먼지를 닦아 주고서 말했다.
“또 넘어지면 안 되니까, 루체 손 잡고 돌아다녀야 해. 알았지?”
“웅!”
샤를은 힘차게 대답하고서 옆에 있던 루체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미라벨을 도와 구근 몇 개를 화분에서 꺼내던 루체가 환하게 웃었다.
“헤헤, 샤를 왕자님. 루체만 믿어요!”
“웅! 루째 믿어!”
샤를은 목청을 높여 대답하고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내 침대 생활만 하다가 모처럼 밖에 나와서 잔뜩 신난 모양이었다.
“이로케, 이로케 해 조, 루째!”
샤를은 작은 손으로 정원의 촉촉한 흙을 주워서 화분 위에 뿌렸다. 샤를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루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화분에 물을 뿌려 주는 거예요? 구근은 건조해야 하는데?”
“아! 그거는, 그거는…… 어마가 알아!”
우물쭈물하던 샤를이 이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서 말했다. 아이의 대답에 미라벨은 푸흣,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리카르도와 곧 만나게 될 거란 생각에 심란했는데, 샤를 덕분에 웃게 되었다.
“세골린데의 백합 구근은 건조한 곳에 보관하면 안 되거든. 수분 공급을 잘 해 줘야 해.”
“아하.”
루체는 드디어 궁금증이 풀렸다는 얼굴로 생긋 웃었다. 루체와 마주 바라보며 웃던 미라벨의 미소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이내 미라벨은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서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변화에 샤를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어마?”
미라벨은 샤를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못하고서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라벨을 잡고 흔들던 샤를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녀가 보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샤를은 미라벨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리카르도가 어색한 낯을 하고 온실 입구에 서 있었다.
“늑때 삼쵼!”
잔뜩 긴장한 표정의 리카르도를 향해 샤를이 외쳤다. 미라벨이 가장 두려워하던 순간이었다.
리카르도와 샤를의 만남.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눈치를 보다가 샤를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무릎을 굽혔다.
미라벨은 샤를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리카르도를 응시하며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우와!”
샤를은 미라벨을 뒤로하고서 리카르도에게 힘차게 달려갔다. 어딜 갈 땐 루체의 손을 잡으라는 가르침은 깡그리 잊은 듯했다.
“삼쵼!”
“……샤를.”
리카르도의 입술 사이에서 아이의 이름이 비어져 나오고, 작은 아이가 넓은 품에 폭삭 안겼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샤를을 보는 미라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두 사람을 주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