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흐에에엥!”
샤를이 카펫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자세를 봐선 침대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토록 섧게 우는데도 복도에선 그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마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문을 설치한 게 도리어 독이 된 듯했다.
“흐아앙!”
리카르도는 문을 닫지도 않고서 아이를 향해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는 샤를을 조심히 안은 뒤 얼굴부터 살폈다.
“다친 건가? 착하지, 고개를 들어 봐라.”
“히잉, 어, 어마…….”
리카르도가 살살 어르자 샤를이 훌쩍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보들보들한 아이의 뺨을 어루만진 리카르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열이 있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게 문제가 아니다. 아이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샤를의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정돈해 주었다.
“엄마는 어디에 있…….”
샤를에게 물어보려던 리카르도가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그녀가 없는 시간을 노려서 아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상기한 탓이었다.
일정대로라면 미라벨이 지금 여기에 없는 게 맞는다.
하지만 이상했다. 열이 난 아이를 방치하고 나가다니. 샤를을 애지중지하는 미라벨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 이유를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리카르도는 아이를 안은 채로 언성을 높였다.
“발터!”
“예, 가주님.”
리카르도의 외침에 마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집사가 등장했다. 파올로를 해임하고 새로 고용한 집사, 발터였다.
발터는 리카르도와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서 말했다.
“당장 주치의를 데려오겠습니다. 그 전에 우선 열을 내려야겠군요. 가주님께서 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리카르도는 그제야 깨달음을 얻고서 샤를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진작 했어야 했는데, 너무 놀란 바람에 미처 생각지 못했다.
리카르도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주문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자 그의 손 아래에서 보랏빛 빛이 퍼져 나왔다.
마법에 휩싸인 샤를의 몸이 정상적인 체온을 되찾았다.
리카르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이에게 마법을 조금 더 불어넣었다. 이내 칭얼대던 아이는 평안한 얼굴로 쌕쌕 잠이 들었다.
마법으로 아이를 재운 리카르도는 자신의 가슴에 기댄 아이를 신중히 살폈다. 샤를은 언제 울었냐는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리카르도는 아이가 진정되었다는 걸 확인하고서 겨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샤를의 울음소리를 들은 순간, 그리고 넓은 방에 혼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본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오로지 샤를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는데도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어째서 미라벨은 샤를을 두고 나간 거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리카르도는 인상을 썼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침대를 바라보았다.
이불이 뭉쳐 있는 모양을 보니, 아이가 자면서 잠투정을 한 듯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침대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리카르도는 샤를이 깨지 않도록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어 그는 이불을 정리한 후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작은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였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미라벨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공……!”
미라벨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부르고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에게 들킨 리카르도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는 초조해하며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방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서…….”
“샤를!”
하지만 미라벨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걸어와 리카르도를 밀치고 샤를을 살폈다.
“아, 신이시여…….”
땀에 젖은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은 미라벨이 풀썩 주저앉았다.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잠든 아이의 조막만 한 손을 쥐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고마워요.”
쩔쩔매며 미라벨의 기분을 살피던 리카르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랍고도 얼떨떨했다.
미라벨이 고맙다고 하다니.
미라벨은 아이를 잡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며 말하기 시작했다.
“루체랑 소피를 온실에 보내고, 저도 나가려는 때에 샤를이 갑자기 열이 났어요. 원래 가끔 이러거든요. 아직 어려서 그렇다는데. 하녀를 부르는데 종을 흔들어도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미라벨은 말을 잇지 못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침을 삼켰다.
여기서 더 말을 했다간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얼마나 막막하고 무서웠는지 모른다.
샤를은 열이 오르는데, 도와줄 사람은 없고, 아이는 계속 울었다.
아이가 울면 울수록 열이 급속도로 올라서 애가 탔다. 급한 대로 물수건을 만들어 닦아 주었는데도 차도가 없었다.
왜 또 하필 오늘 하녀들이 오지 않는 건지.
걱정과 초조함으로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루이즈의 말에 의하면, 샤를은 얼마 전에 구토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열이 나는 건 좋지 않은 신호다. 열을 빨리 내려야만 했다.
미라벨은 발을 동동거리다가 결국 혼자 방을 나섰다. 그녀는 간절히 리카르도를 찾아 헤맸다. 그 말고 도움을 청할 이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도라면, 샤를을 낫게 해 줄 수 있을 거다. 미라벨의 두통도 단번에 해결해 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집무실에서도, 서재에서도 리카르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인지 저택이 텅 비어 있었다. 그 탓에 리카르도를 불러 달라고 청할 사용인들도 만날 수 없었다.
막막한 마음에 엉엉 울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돌아왔는데 리카르도가 샤를을 돌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얼마나 안도가 되던지.
“우선 마법으로 열은 내렸어. 곧 의원이 올 거다.”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데리고 나갈걸.”
아이를 보던 미라벨이 자책했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달래 주었다.
“밖엘 나갔으면 추위에 열이 더 났을 거다. 잘한 거야.”
“난 샤를이 없으면 안 돼요.”
미라벨은 울먹이며 말했다. 깊은 호수 같은 푸른 눈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내겐…… 샤를뿐이에요. 난…….”
“가주님! 주치의를 데려왔습니다!”
미라벨의 목소리 위로 발터의 외침이 겹쳐졌다. 리카르도는 재빨리 미라벨의 머리에 베일을 씌워 주고서는 주치의에게 말했다.
“설명은 들었겠지. 어서 진찰해라.”
“예, 전하.”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굳은 듯이 앉아 있던 미라벨은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사내를 알아보고서 숨을 들이켰다.
‘우고……?’
신중하게 샤를의 상태를 살피는 의원은, 우고였다. 미라벨의 임신 사실을 그녀가 도망칠 때까지도 숨겨 주었던 자.
‘대공이 죽였을 줄 알았는데.’
리카르도는 주치의가 미라벨의 임신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럼 당연히 그가 그동안 그녀의 비밀을 숨겨 줬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터.
리카르도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그 경우, 죽음으로 사죄를 받는다.
오죽하면 레나토의 주인은 은혜와 원수는 절대 잊지 않고 갚는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리카르도의 사전에 ‘용서’는 없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처분도 대공치고는 유한 편이었지.’
샤를이 진정된 덕에 미라벨은 제법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비앙카와 파올로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해고는 리카르도치고는 약한 처벌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아쉽진 않았다. 추천장 없이 잘린 탓에, 두 사람은 먹고살 길이 없어졌을 테니까. 대공가에서 불명예스럽게 해고당한 이력 때문에 그들은 손가락질당하며 살게 될 것이다.
다만, 미라벨은 에치오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 때문에 직위를 해제당했으니까.
그러니 리카르도가 전보다 너그러워진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미라벨은 에치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을 테니.
“송구합니다, 왕녀님.”
생각에 잠긴 미라벨에게 우고가 난감해하며 말을 걸었다.
“왕자님의 손을 놓아주셔야 진료를 볼 수 있습니다.”
미라벨은 조용히 샤를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우고가 진찰을 편히 할 수 있도록 비켜 주려 하였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려는 때,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아……!”
다시 주저앉으려는 미라벨을 받쳐 준 건 리카르도였다. 그는 잽싸게 잘록한 허리를 감싸 쥐고서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단단한 팔뚝이 허리를 감자, 미라벨은 리카르도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새벽의 숲에서 나는 것 같은 청량하고도 서늘한 그의 향기가 미라벨을 훅 감쌌다. 동시에 따뜻한 체온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넓은 가슴에 안긴 미라벨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베일로 얼굴이 가려져 있는 게 다행이었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바로 놓아주지 않고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집요한 시선에 미라벨의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놓아주세요.”
리카르도는 미라벨을 한 번 세게 끌어안은 뒤에 아쉽다는 듯이 놓아주었다.
때마침, 샤를을 진찰하던 우고가 입을 열었다.
“왕녀님, 혹시 최근에 왕자님께서 탈이 난 적이 있으십니까?”
“얼마 전에 구토를 했네.”
미라벨은 목을 가다듬고서 대답을 했다. 그녀의 답에 우고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깊게 한숨을 쉬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심상치 않은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