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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68화 (69/120)

68화

미라벨은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리카르도에게 샤를을 만나거든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를 찾지 못해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소피가 사색이 되어 찾아와 샤를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소피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실이 샤를을 일찍 보내 버렸고 잠깐 옷을 입는 사이 아이가 없어졌다고.

세골린데 왕실에서였다면 샤를이 사라진 건 하등 문제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안 된다.

미라벨은 눈이 뒤집혀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리카르도를 찾을 때는 뒤지지 않았던 작은 방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택 밖으로 나가 보려고 계단으로 향했을 때.

“샤를!”

가장 두려워하던 장면이 그녀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안 돼!”

미라벨은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와 리카르도에게서 샤를을 낚아챘다. 그녀를 보자마자 아이가 활짝 웃었지만, 미라벨은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건드리지 말아요.”

“미라벨…….”

“저리 가라고요!”

미라벨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샤를의 동그란 뒤통수를 감싼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아이는 절대 안 돼. 못 넘겨.”

미라벨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울먹였다. 동시에 샤를을 세게 끌어안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도 동의했잖아요. 당신은 이 아이에게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어요.”

리카르도는 참담한 심경으로 미라벨의 경고를 들었다. 그는 늘어뜨린 손끝을 가만히 까닥였다. 조금 전까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의 따뜻한 온기가 허상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나도 알아.”

“샤를은 엄마랑 떨어져서 못 지내요. 세골린데에서도 그래서 여기로 아이를 보내 준 거예요.”

리카르도는 빠르게 말을 내뱉는 미라벨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미라벨을 사랑하고, 샤를에게 닿고 싶은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

미라벨에게 있어 리카르도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뺏으려는 악인에 불과했다.

“미안해.”

“사과하지 마!”

미라벨은 시선을 내리는 리카르도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말을 이었다.

“더는 사과하지 마요. 사과할 일을 만들지도 마요. 더는…….”

“어마아…….”

미라벨의 공포를 느꼈는지, 그녀의 품 안에서 샤를이 칭얼거렸다. 아이의 음성이 두 사람 사이에 퍼지자 미라벨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리카르도는 시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거리를 좁히려는 무리한 시도도 하지 않고, 그저 미라벨을 보기만 했다.

리카르도의 애절한 시선은 수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지만 미라벨은 고개를 틀어 리카르도의 시선과 고백을 외면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샤를이 조막만 한 손으로 엄마의 어깨를 꼬옥 끌어안았다.

“어마, 히잉, 울지 마아.”

“……엄마 안 울어, 샤를.”

미라벨은 젖은 음성으로 대답하고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샤를을 소중하게 끌어안고서 계단을 올랐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걸음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아이의 사랑스러운 소리가, 그 환청이 다시 들려오길 간절히 바라며.

* * *

소피는 미라벨이 샤를을 안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헐떡이기까지 했다.

세골린데와 아르칸젤로는 표면적으로는 친교를 맺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특히나 이곳 레나토는 왕녀와의 파혼으로 감정이 좋지 않을 터.

그런 곳에서 왕녀의 아이가 사라졌으니, 소피로서는 가슴이 철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저, 저는 정말로, 수명이 줄어드는 줄 알았어요.”

“찾았으니까 됐어. 괜찮아, 소피.”

“흑, 네, 네…….”

미라벨은 소피를 달래 주고서 샤를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아이를 소파 위에 올려놓자, 엉엉 우는 소피를 보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소삐 왜 울어?”

“흐윽, 샤, 샤를 왕자님이, 흑…….”

“샤를이 혼자 밖으로 나가서 소피가 걱정을 많이 했대. 그러니까 앞으로는 꼭 소피나 엄마랑 같이 밖에 나가야 해. 알았지?”

“으응.”

미라벨의 부드러운 가르침에 샤를이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은 끙차, 하고 소파를 내려와 소피의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 주었다.

“우지 마, 소삐. 샤를도 안 울어써. 샤를은 용감한 사람이니까.”

“네. 안 울게요.”

“어마, 샤를 안 우러써. 무서웠는데 참아써.”

소피를 꼬옥 안아 주던 샤를이 활짝 웃으며 미라벨에게 말했다. 미라벨은 자신에게 도도도 달려오는 아이를 따뜻한 눈길로 보았다.

샤를을 발견한 당시에 아이의 볼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지만, 그녀는 모른 척 말했다.

“그래? 우리 샤를 왕자님, 최고로 용감한 사람이네.”

“응!”

엄마에게 칭찬받은 샤를이 우쭐하고선 턱을 치켜들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혼자서 킥킥거리던 샤를이 미라벨에게 양손을 쭉 뻗었다.

미라벨이 아이를 들어서 무릎 위에 앉히자, 샤를이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근데, 아까 그 삼쵼은 울려고 해써.”

“누구?”

“샤를 안아 준 삼쵼.”

다정하게 물어보던 미라벨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샤를은 엄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서 종알거렸다.

“아실 삼쵼보다도 키도 크고, 무섭게 생겼어. 샤를이랑 똑가튼 머리카락이야. 샤를 보고 막 울려고 해써. 어마한테 혼나는 거 불쌍해써.”

“네? 이게 무슨 얘기예요?”

두서없는 이야기에 눈물을 추스르던 소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라벨은 샤를을 안은 채로 생각에 깊이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샤를을 토닥이며 무심히 말했다.

“샤를이 대공을 만났어. 그 얘기야.”

“근데 방금 대공 전하께서 울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왕녀님께서 그분을 혼냈단 건 또 뭐예요?”

미라벨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샤를의 얘기를 되짚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리카르도가 울려고 했던 것도 같고. 불쌍했던 것도 같고…….

“아무것도 아냐.”

이내 미라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리카르도가 울든, 불쌍하든.

아이를 뺏길 뻔한 걸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여유고 사치다.

미라벨은 샤를의 동그란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니까, 만나지 마. 알겠지?”

“왜?”

“샤를을 훔쳐 갈지도 모르거든. 무서운 늑대처럼 샤를을 채 갈지도 몰라.”

“히익! 시러!”

샤를은 미라벨의 엄포에 겁을 집어먹고서 엄마의 품에 파고들었다. 반쯤은 진심 어린 우려를 담아 경고한 미라벨은 샤를을 조용히 껴안았다.

아이를 훔쳐 갈 무서운 늑대.

아버지가 아닌, 피해야 할 사람.

샤를에게 리카르도를 그렇게 각인시키는 미라벨의 마음 한구석이 시려 왔다.

* * *

리카르도는 안절부절못하며 복도를 서성였다. 며칠 전에 샤를을 만나고서 그는 여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양손 가득 실렸던 아이의 무게가, 따끈했던 체온이 자꾸 떠오른 탓이다.

리카르도는 딱 한 번만 더 샤를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라벨은 아이를 꽁꽁 감추어 두고 보여 주질 않았다. 그동안은 더러 나오던 식당에조차 오질 않았다.

“후으…….”

리카르도는 크라바트를 손가락으로 당기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미라벨은 시녀와 루체를 데리고 백합 구근을 살피러 갔다. 세골린데에서 가져온 백합이 상하지 않도록 보살피는 건 그녀의 일과였다.

처음 몇 번은 샤를을 데려가더니, 아이가 텃밭에서 크게 넘어지고선 방에 두고 나간다.

이건 루체에게서 입수한 고급 정보였다.

루체는 리카르도가 미라벨에 대해 물어보면 의심 없이 순수하게 대답하곤 했다. 그녀가 아르밀라라는 걸 아느냐고 물었을 때만 제외하고.

루체는 미라벨과 아르밀라는 다른 사람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간혹 자신이 미라벨에 대해 설명할 때 ‘아르미라 님’이라고 하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루체가 고하는 미라벨의 일과 하나만큼은 정확했다.

그리하여 리카르도는 몇 날 밤을 뒤척이며 고민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오늘부터 라그나르 다리의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 지체하다간 미라벨도, 샤를도 놓칠 수 있다. 그에게 여유 따윈 없었다.

리카르도는 떨리는 마음으로 녹색 방의 문을 두드렸다. 긴장하여 쓸데없이 세게 두드렸으나, 방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샤를.”

리카르도는 입 안에서 여러 번 굴려 보았던 아이의 이름을 처음으로 발음해 보았다. 어색한 탓인지 목소리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문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리카르도는 손가락을 쫙 폈다가 접었다.

속이 바짝 탈 정도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는 답이 없었다. 리카르도는 다시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샤를, 안에 있니?”

낯간지러운 상냥한 어투를 입에 담은 리카르도가 목을 가다듬었다. 누가 보고 있지도 않은데,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래서였다.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는데도 이상하다는 걸 못 느낀 건.

“샤를?”

한참을 문 앞에 서 있던 리카르도는 기이할 정도의 고요함에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어젖힌 그는 아이를 발견하고서 사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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