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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67화 (68/120)
  • 67화

    소피는 눈이 시리게 밝은 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소삐!”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던 그녀는 익숙한 아이의 음성에 눈을 깜박였다. 소피가 손을 내리기도 전에, 샤를이 달려와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겼다.

    “샤를 왕자님?”

    소피는 어안이 벙벙해져 샤를을 보았다. 제 품에 안겨 고개를 비비는 아이를 응시하던 소피가 황급히 수정구를 보았다.

    [미안해, 소피. 샤를을 말릴 수가 없었어.]

    수정구 안의 아실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소피는 샤를을 꼬옥 안은 채로 그의 얘기를 들었다.

    [엄마한테 보내 주겠다고 했더니, 당장 가고 싶다고 하도 떼를 써서. 알잖아. 우리 중에 샤를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

    “그렇기야 하죠.”

    소피는 난감해하며 수긍했다. 샤를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단정했을 아실의 금발이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소피는 작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샤를 왕자님은 제게 맡기세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응, 고마워. 그런데 미라벨은 어디 있어?]

    “잠깐 나가셨어요.”

    “어마, 어마는?”

    소피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샤를이 고개를 빼꼼히 들어 올리며 물었다. 소피는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샤를의 통통한 볼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금방 만나실 수 있어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시면요.”

    “며 빰?”

    “네?”

    소피는 샤를의 질문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서 눈을 깜박였다. 아직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라서,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며 빰 이써야 어마 와?”

    “으음……. 그게.”

    소피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아실을 간절히 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에 아실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몇 밤 안 자도 돼, 샤를. 엄마 금방 올 거래.]

    “와아!”

    아실의 대답에 샤를이 손뼉을 짝짝 치며 다리를 바동거렸다. 그 바람에 그를 안고 있던 소피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를 돌보면서 이 정도 사고는 일상다반사다. 그래서 그녀는 익숙하게 중심을 잡았다.

    “어마! 어마! 어마! 소삐 어마 불러 줘!”

    “네, 네. 그럴게요.”

    소피는 정신없이 바동거리는 샤를을 달래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담요 위에 앉은 덕에 샤를은 젖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눈 폭탄을 맞은 채였던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젖은 꼴을 하고서 저택을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 잠시만 옷 좀 갈아입고요. 아, 아실 왕자님. 감사해요. 나중에 미라벨 왕녀님과 함께 연락드릴게요.”

    [그래. 안녕, 샤를!]

    “아녕!”

    소피는 샤를이 수정구 안의 아실에게 시선을 뺏긴 틈을 타 옆방으로 갔다. 그녀는 급하게 옷을 벗고서 갈아입기 시작했다.

    “샤를 왕자님, 얌전히 계세요! 소피 바로 나가요!”

    소피는 샤를을 계속 부르며 옷을 벗었다.

    아이에게서는 한시도 눈을 떼어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옷을 벗어야 하는데,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쉽지가 않았다.

    ‘하필 이런 때.’

    소피는 초조해하며 옷을 마구 잡아당겼다. 힘주어 당기자 그제야 드레스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소피는 온 신경을 샤를이 있는 방에 기울이며 대충 단장했다. 그리고 재빨리 옆방으로 향했다.

    “샤를 왕자님, 많이 기다리셨…… 어?”

    황급하게 녹색 방으로 돌아온 소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샤를이 없었다.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소피의 담요만이 남아 있었다. 소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아실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샤를은 수정구의 빛이 꺼지자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를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던 삼촌이 사라졌다. 소피 이모도 안 보인다.

    ‘어마…….’

    샤를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방을 올려다보았다. 커튼도 녹색, 러그도 녹색, 벽지도 녹색이 주를 이루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화사한 크림색과 황금 장식이 주를 이루는 세골린데 왕실에서 자라 온 샤를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어마…….”

    샤를은 바닥을 짚고서 몸을 세웠다. 그리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소삐?”

    아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게 뾱뾱 소리가 났다. 루이즈가 얼마 전에 사 준 구두에서 나는 소리였다.

    “끙차.”

    샤를은 무거운 문을 열고서 소피를 찾았다.

    하지만 샤를이 연 문은 소피의 방과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앞에는 기다란 복도가 놓여 있었다.

    “어?”

    세골린데와는 사뭇 다른, 어둑하고 서늘한 분위기에 샤를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분명히 아실 삼촌이 엄마한테 보내 준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 곳으로 보내 준 걸까.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어마아…….”

    겁에 질린 샤를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샤를은 눈을 열심히 비볐다. 엄마가 용감한 사람은 울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참았으니, 엄마가 칭찬해 줄 거다.

    루이즈 이모랑 아실 삼촌 앞에서는 많이 많이 울었지만, 그건 엄마가 안 와서 그런 거니까. 샤를은 죄가 없다.

    이상한 합리화를 한 샤를은 당당한 표정으로 엄마를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뾱뾱 소리와 함께, 아이는 녹색 방에서 멀어져 갔다.

    샤를이 사라진 걸 뒤늦게 안 소피가 나왔을 때는, 이미 아이가 계단을 내려간 뒤였다.

    * * *

    아직 눈이 완전히 그치지 않았고, 라그나르 다리의 공사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니 미라벨은 레나토를 떠날 수 없다.

    그 사실을 아는데도, 리카르도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또 그녀가 사라질까 봐서 밤에도 마음을 놓고 잘 수가 없었다.

    리카르도는 새벽에 녹색 방 앞을 서성이다가, 새벽빛이 복도에 찰 때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로비의 계단에 걸터앉은 그는 차갑게 식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괜한 소리를 한 건가.’

    미라벨은 에치오에게 내려진 처분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자마자 급속도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의도치 않게 그녀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게 된 듯했다.

    ‘에치오를 복직시키긴 해야겠군.’

    리카르도는 한동안 뒤로 미뤄 놓았던 에치오의 처리를 생각했다.

    그동안은 정신이 없어 살피지 못했지만, 에치오는 아르밀라 수색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아르밀라를 찾았지 않은가.

    비록 그녀가 미라벨로 돌아온 게 에치오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를 계속 벌하는 데는 이제 의미가 없다.

    ‘그리고 또 내가 놓친 게 뭐가 있지?’

    리카르도의 커다란 구두가 탁, 탁 하고 계단의 카펫을 두드렸다.

    그는 미라벨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마음이 편안했으면 했다.

    죄책감이나 분노, 원망 같은 힘든 감정은 다 내려놓았으면 했다. 그런 건 죄다 리카르도의 몫이니까.

    뾱.

    뾱.

    ‘뭐지?’

    생각에 빠져 있던 리카르도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허리를 세웠다.

    고개를 돌려 계단을 올려다보았으나, 나선형으로 휘어진 계단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환청인가.’

    리카르도는 인상을 쓰고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르밀라가 사라진 이후로 환청이나 환각이 그를 종종 괴롭히곤 했다. 요즘은 그나마 덜하다 싶었는데, 다시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미라벨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리카르도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의원은 환청과 환각이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스스로 충분히 다스릴 수 있을 터다.

    뾱.

    뾰옥.

    뾱.

    그러나 마음을 다잡으려는 리카르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점점 커졌다.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기묘한 소리에 리카르도의 신경이 곤두섰다.

    리카르도는 미친 자로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입을 열었다.

    “뭐야.”

    “흐엥…….”

    예민한 음성을 내뱉은 리카르도에게 돌아온 건 웬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였다.

    리카르도는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라니.

    레나토에 아이가 있을 리가 없는데. 환청이 갈 데까지 간 모양이었다.

    리카르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계단을 올라가자, 난간이 동그랗게 곡선을 그리는 부분을 지나서 작은 형체가 보였다.

    리카르도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형체를 바라보았다.

    아이다. 세 살 남짓 되었을 법한 어린아이. 그런데 아이가 어떻게 여기에 있단 말인가.

    “뭐…….”

    “어마, 어마…….”

    뒤로 돈 채로 계단 턱에 매달려 엉금엉금 기어 내려오던 샤를이 서럽게 엄마를 불렀다.

    계단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 이럴 땐 엄마가 안아서 내려 주곤 했는데. 엄마는 물론이고 아무도 안 보였다.

    해서 눈물을 참는 것도 슬슬 한계에 달하던 때에, 엄청나게 무섭고 서늘한 귀신 같은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흐윽, 윽, 으앙!”

    “자, 잠깐!”

    리카르도는 호박 바지를 입은 아이가 뒤로 넘어가려 하자 황급히 낚아챘다.

    엉겁결에 아이를 안게 된 리카르도는 제 품에 안긴 샤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가 낯설지 않았다.

    이 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 맑고 푸른 눈동자. 그리고 사랑스러운 양 볼까지 전부…….

    “샤를!”

    아이를 뚫어지게 보던 리카르도는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굳은 얼굴을 한 미라벨이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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